00167 Game No. 167 5세트. =========================================================================
Game No. 167
마지막 세트가 드디어 시작되었다.
다행히 집중도는 아직 유지되고 있었다. 3세트부터 걸린 기분 좋은 최면이었다.
전장은 왕도.
지금 상황과 딱 어울리는 곳이었다.
내 모든 것을 쏟아부으리라.
반드시 승리를 거둬 왕도 사이를 당당히 걸어가리라.
‘[날빌러] 사용.’
경기가 시작됨과 동시에 [날빌러]를 사용했다.
일단 김택윤의 빌드를 유추하기 위해서였다.
[날빌러]가 추천해 준 빌드는 [1제단 앞마당 이후 3제단]이었다.
방금 전 김택윤이 사용했던 빌드였다.
본진 3제단을 선택한 상대와도 용혼 숫자가 같아 밀리지 않고 정석을 사용해도 용혼 수도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전략.
이 빌드를 추천해 준다는 건, 김택윤이 아주 안정적인 빌드를 선택한다는 말과 같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날빌보단 운영에 더 자신이 있는 김택윤이었으니까.
마지막 경기니 조금 불리해지더라도 초반에 끝나는 일 없이 본인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후반으로 경기를 이끌겠다는 생각이겠지.
김택윤의 생각에 장단 맞춰 줄 생각은 없다.
비록 [날빌러]가 추천해 준 건 확장을 빠르게 가져가며 보다 부유한 상태로 후반을 도모하는 것이었지만 이번에도 공격적인 운영을 할 생각이다.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아니다.
[날빌러]가 추천해 준 빌드가 좋은 빌드이긴 하지만 승률 100%의 빌드는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이 함께 발동된다면 모를까.
내 장점은 스탯에서도 알 수 있듯 공격력이다. 때문에 공격적인 운영을 할 때 큰 빛을 발한다.
앞선 4세트에서 증명되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할 것이다.
본진에서 김택윤이 나오지 못하게 완벽히 틀어막을 것이다.
고민 따윈 조금도 하지 않았다.
확신이 있었다.
내 선택이 옳다는 확신이.
***
―대망의 5세트입니다. 경기가 여기까지 오네요.
―목이 다 쉬었습니다. 그래도 기쁩니다. 양 선수가 어마어마한 경기력을 뿜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기라면 얼마든지 좋습니다. 밤을 새워 중계를 할 자신이 있습니다. 정말 양 선수에게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사실 2세트가 끝났을 때까지만 해도 3세트에서 경기가 끝나겠구나 생각했거든요? 잘해 봐야 4세트 정도? 이승우 선수가 김택윤 선수를 잡아낸다면 정말 사과를 해야 할 판입니다. 너무 미안하네요.
―1, 2세트에서 보여 주었던 소극적인 태도가 3세트부터 뒤집어졌습니다. 이것이 무얼 의미하냐? 본인의 색을 다시 찾았다는 걸 의미하거든요? 3, 4세트를 날빌로 다 가져가지 않았냐 뭐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4강이라는, 결승 진출을 가리는 이 큰 경기에서 위축되지 않고 도박수를 탁탁 던지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겁니다.
김태영 해설의 말처럼 일부 커뮤니티에선 이승우가 정면 승부가 자신 없으니 날빌로 승부 보려고 한다는 글이 올라왔다.
대부분 김택윤의 팬들이 올린 글이었다.
팬심에 썼다면 조금 이해되긴 하지만 냉정하게 봤을 때 그 내용은 틀렸다.
여러 번 말했듯 신들의 전쟁은 같은 자원을 먹고 대규모 교전으로 승패를 나누는 게임이 아니었다.
―아직까진 양 선수 똑같습니다.
―김택윤 선수 정말 꼼꼼하게 정찰하네요.
―그게 다 앞선 3, 4세트에서 이승우 선수가 심어 준 두려움입니다. 만약 이승우 선수의 그런 플레이가 없었다면 김택윤 선수는 정말 편안하게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경기를 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어떻습니까? 이승우 선수의 플레이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까? 이것만 봐도 심리적으로 이승우 선수가 크게 앞서 나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상황이 그렇습니다. 지금 이승우 선수 무난하게 하고 있거든요? 일꾼도 잘 뽑아 주고 미리 나간 용안도 없고. 오히려 과감히 정찰을 생략하며 더 많은 자원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 선수 처음으로 개인리그 치르는 선수 맞나요? 몸 안에 천년 묵은 구렁이가 수십 마리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것 같습니다.
둘의 빌드가 차이가 나기 시작한 건 용의 신전이 올라간 후였다.
―김택윤 선수 정말 안정적으로 경기 하죠?
용의 신전 이후 하나의 제단을 추가로 소환한 김택윤.
빠르게 앞마당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용혼을 모으며 방어에 집중했다.
3, 4세트의 패배가 이런 영향을 미친 것이다.
―용의 신전까진 똑같았는데 그 후가 다르네요. 2개의 제단이 더 올라갑니다. 1개의 제단이 더 많은 상황입니다.
―공격할 의사가 분명 있는 거예요!
―이승우 선수 앞선 3, 4세트에서 공격적인 운영을 펼쳐 재미를 많이 봤거든요? 하지만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은 그렇게까지 상황이 좋은 게 아니에요. 만약 막히면 굉장히 불리한 상태로 경기가 진행될 수 있거든요?
―어쩌면 김택윤을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이 공격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실제 네 세트를 펼치는 동안 그 것이 확실하게 느껴졌거든요? 어쨌든 이승우 선수가 먼저 칼을 빼 들었고 그 공격 여부에 따라 상황이 꽤 재미나게 흐를 겁니다.
아예 앞마당 생각이 없는지 2개의 제단을 추가로 건설했다. 한 타이밍을 잡아 공격을 떠나겠다는 뜻이었다.
―무난하게 가면 김택윤 선수가 막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약간 용혼의 숫자가 차이가 나긴 하지만 그 정도는 지룡으로 커버가 가능하거든요?
이승우가 선택한 빌드는 4제단처럼 상대의 지룡이 나오기 전에 공격을 가는 빌드가 아니다.
공격 타이밍이 아무리 빨라도 지룡이 나온 이후다.
그때면 김택윤도 지룡이 나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승부를 결정짓는 건 컨트롤이었다.
―어? 뭐죠? 지금 이승우 선수?
그때 변수가 발생했다.
―이야. 이승우 선수 마지막 경기에도 승부수를 띄웁니다. 현룡을 아예 생략했어요!
엄재웅 해설의 외침처럼 이승우는 현룡사당을 건설하지 않았다. 바로 지룡사원을 소환하며 빠르게 지룡을 확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반면 김택윤은 정석 중에 정석, 현룡을 생산해 이승우의 동향을 파악하며 맞춰 갈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러면 타이밍 나오죠!
―이 선수 또 한 번 칼을 빼 듭니다!
김태영 해설의 말처럼 원래대로라면 나오지 않았을 공격 타이밍이 이승우에게 주어졌다.
약 10여 초 정도 지룡 1기가 많은 순간이 오는 것이다. 그 시기에 이승우는 큰 이득을 취해야 한다.
―놀랍네요, 놀라워. 아니 이 선수 진짜 심장이 강철입니까? 멘탈과 심장 모두 강철로 만들어진 사람 같습니다. 어떻게 진출이 결정되는 마지막 경기에서 이런 선택을 합니까?
엄재웅 해설은 이승우의 배포에 놀랐다. 과감하게 흑완을 배제했다.
만약 김택윤이 흑완을 선택했다면?
지룡이 아무리 빨리 나와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진출 타이밍이 늦어지는 건 당연하고 큰 피해를 받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지금 이승우의 선택은 옳았다.
―김택윤 선수 지금 현룡으로 이승우 선수 본진 다 훑었죠.
―이제 막 의도 파악했습니다. 속으로 기가 찰 겁니다. 아니 마지막 경기에서 현룡을 안 뽑아?
―속이 바짝 바짝 타들어 가죠. 아무리 김택윤 선수라 해도 유닛의 생산 속도로 빠르게 할 수 없거든요? 이미 현룡을 찍어버리는 바람에 지룡 생산이 한 타이밍 늦어 버렸어요!
***
믿는 구석이 있다.
[투신]과 [일점돌파].
이 둘의 시너지 효과만 제대로 나온다면 충분히 뚫을 수 있다.
당장 병력의 수도 많다.
지룡 2기가 나오자마자 모든 병력을 이끌어 김택윤의 앞마당 쪽으로 진격했다.
동시에 제단의 집결지도 모두 김택윤의 앞마당으로 변경했다.
뚫어야 한다.
뚫지 못하면 진다.
아마 김택윤의 지룡은 지금 1기밖에 없을 것이다. 천금처럼 소중한 기회다.
이 기회를 반드시 살려야 한다. 김택윤의 앞마당 근처에 지룡 2기를 내려놓았다.
혹 갑작스럽게 달려들 용혼을 대비해 주변엔 병력을 배치시켰다.
운룡 역시 언제든 지룡을 태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투신] 발동.’
시야에 김택윤의 용혼이 들어오는 순간,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
―이걸 뚫어 내네요! 뚫습니다!
―이 선수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천리안이라도 쓸 수 있는 건가요? 옵저버 화면이라도 보고 있는 겁니까? 어떻게 상대의 약한 타이밍만 이렇게 쏙쏙 골라 들어가는 겁니까!
―해냈어요. 이승우 선수가 해냈습니다.
앞마당이 밀렸다. 김택윤에게 더 이상 희망은 없었다. 똑같이 앞마당이 없는 건 같았지만 상황이 달랐다.
언덕 아래를 장악당해 본진에 갇혀 버린 김택윤과 언제든 앞마당을 할 수 있는 이승우의 상황이 같을 리 없었다.
경기는 끝났다.
역전 시나리오는 없다.
운룡에 탄 지룡이 용안 전부를 잡아 버리면 모를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역전할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해져 갔다.
심지어 지룡이 본진을 떠날 수도 없다.
떠나는 순간 방어를 하지 않고 그대로 본진 위로 올라와 버릴 것이다.
지룡이 1기 더 생산된 후 가는 건 너무 늦다.
이미 추가 생산된 용혼이 본진을 지키고 있을 테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김택윤이었다.
―이 경기가 말렸다는 걸 김택윤 선수가 가장 잘 알죠.
―그걸 알고 있지만 GG를 칠 수 없습니다. 아쉽거든요. 너무나 아쉽거든요. 결승 진출 티켓이 코앞까지 왔었거든요!
―너무 아쉽죠. 불과 2시간 아니 1시간 전만 해도 결승 진출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 경기가 이렇게 뒤집어지니 아쉽다 못해 속에서 열불이 치솟을 겁니다.
연습 경기 혹은 중요하지 않은 경기였다면 앞마당이 밀리는 순간 GG를 쳤을 것이다.
하지만 김택윤은 쉽게 GG를 치지 못했다. 결승 진출을 코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택윤의 얼굴은 굵은 땀방울이 가득 맺혀 있었다. 상황이 얼마나 좋지 못한지 표정만 봐도 느껴졌다.
―이승우 선수도 칭찬해 줘야 합니다. 이 선수 도대체 기록이 몇 개인가요? 오늘도 또 하나의 기록을 만들어 내는 분위기입니다. 역대 최초 동족전 역스윕!
―이승우 선수는 심장이 강철로 만들어 졌나요? 어떻게 이런 과감한 결정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하죠?
―전장의 이름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결과네요. 이승우 선수 왕도를 걷습니다.
로열로더를 직역하면 왕도(王道)를 걷는 자이다.
마지막 전장의 이름이 왕도이니 이보다 더 잘 맞아 떨어지는 건 없었다.
―이 와중에 운룡의 속업까지 하는 김택윤 선수네요.
―늦었죠. 이미 이승우 선수는 앞마당까지 확보하며 자원을 두 군데서 펑펑 돌리고 있습니다.
―아, 견제 떠나 보지만.
―펑.
날아가던 운룡이 기다리고 있던 이승우의 용혼에 허망하게 잡혀 버렸다.
너무나도 뻔한 전략, 그리고 뻔한 경로.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었다.
그만큼 김택윤의 시야가 좁아져 있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잡히죠. 김택윤 선수의 희망을 실은 운룡이 잡혀 버렸습니다.
―더 이상 할 것이 없습니다. 시간 끌기밖에 안 돼요. 곧 이승우 선수는 비렴까지 확보되거든요? 본진 자원으로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너무나 아쉬울 겁니다. 이번에도 4강 문턱에서 무너졌거든요? 진짜 굿이라도 한 번 해야 하는지, 김택윤 선수 진짜 OSL과 인연이 없네요.
―2:0으로 앞서고 있을 때만해도 이번엔 정말 결승 가는 줄 알았거든요? 아, 이젠 안 됩니다.
―결국 삼족오가 또 한 마리의 용을 먹어 치우는 그림이네요.
***
김택윤이 고개를 떨궜다.
경기가 시작한 지 20분이 다 되어가건만 인구수는 겨우 70.
모르긴 몰라도 이승우의 인구수는 거의 배는 될 거다.
경기는 끝났다.
억지로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마저 더 이상 할 수 없다. 그나마 굳건히 지키고 있던 언덕 방어선마저 무너졌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된 거지?
분명 좋았잖아?
그 어느 때보다 분위기가 좋았잖아?
근데 왜?
김택윤의 질문에 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모르겠다.
떨어지지 않는 손을 억지로 움직였다.
―김택윤 : GG.
그리고 그렇게 4강의 마지막 경기를 알리는 GG가 선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