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3 Game No. 153 믿습니다! =========================================================================
Game No. 153
‘좋았어.’
이정훈 감독이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완벽한 전략의 승리.
생각보다 수월하게 승리를 따내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쉽게 경기가 풀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승우만 잡으면 돼.’
이영우만 잡으면 CT를 쉽게 잡을 수 있다고 이재명 감독이 판단했듯이 이정훈 감독도 이승우만 잡는다면 충분히 역올킬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 경기가 고비였다.
김대형이 원래 하던 대로 무난하게 경기를 운영했다간, 이승우의 철퇴에 쓰러질 것 같았다.
그래서 평소에 하지 않던 패스트 흑완을 주문했다.
이정훈 감독의 말에 김대형은 조금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차라리 장기인 중반 이후의 운영 싸움을 하는 것이 좋겠다며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지만 이정훈 감독은 단호했다.
그리고 그 단호함이 지금 빛을 발하고 있었다.
‘경기는 이제 시작이다.’
이정훈 감독이 승부욕에 불타는 눈빛으로 아스트로 벤치를 바라보았다.
***
“고생했다.”
“고생은요. 아쉽네요, 아쉬워. 올킬이 코앞까지 왔는데.”
부스에서 나왔을 때 가장 먼저 든 감정은 3킬을 했다는 뿌듯함보다 경기를 마무리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었다.
그것도 아주 진한.
시야가 좁아졌다. 체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너무 성급하게 생각했다.
그것이 패인이 되었다.
패배하고 돌아왔음에도 감독님을 비롯한 팀원들이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겨 주었다.
아쉬운 것이 사실이다.
올킬이 눈앞에 왔으니까.
공군도 스파키즈도 아닌 CT의 올킬이.
성공했다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커다란 중앙 화면에서 방금 치른 경기의 하이라이트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선택이 조금 아쉬웠다.
차라리 안정적인 선택을 할걸. 후회해 봤자 늦었다. 이미 경기는 끝났다.
떠난 기차에 대고 손수건을 흔들어 봤자 아무 의미 없다. 지나간 기차는 다시 돌릴 수 없다. 경기 역시 마찬가지다.
정말 깔끔하게 졌다.
변명의 여지없이 깔끔하게.
“솔직히 김대형이 그런 빌드 쓸 줄 누가 알았냐?”
“그러게. 난 이번 시즌 김대형이 용용전에서 흑완 쓰는 거 처음 본다.”
내가 4세트에서 선택한 건 마지막 세 번째 방법이었다. 김대형의 흑완을 배제하고 본진 4제단을 올린 것.
진짜 내 마음대로 아무거나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당연히 나름 치밀한 계산이 있었다.
이영우의 경기 분석만큼 김대형의 경기 분석도 열심히 했다.
전체적인 경기 스타일은 피지컬형이었고 운영 스타일은 수비형에 가까운 선수였다.
기발하고 번뜩이는 전략으로 승리를 따내기보단 기본기를 통해 안정적인 운영을 꾀하는 선수.
10경기 중 9경기가 그런 스타일이었고 용족전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조금 불리해지더라도 피지컬에 자신이 있기에 언제든 경기를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점을 파악한 난, 고심 끝에 4제단을 선택했다.
폭발적인 용혼 물량으로 [투신]을 2번 사용한다면 김대형의 본진을 밀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오판이었다.
흑완을 선택했을 줄이야. 흐물거리는 걸 보았을 때 가슴이 철렁했다.
그 순간을 떠올리니 지금도 아찔하구나.
정말 눈치채지 못했다.
그냥 안전하게 본진에서 2제단을 올린 줄만 알았다. 오히려 이번 러시로 끝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전부 착각이었다.
그렇게 스킬 아끼려고 애썼는데 결국 스킬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경기에서 패배했다.
이로써 연승 기록은 22연승에서 멈추었다.
아쉽지만 그래도 괜찮다.
내가 당장 은퇴하는 것도 아니고 언제든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기록이었다.
4회 올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직 3라운드도 끝나지 않았다. 3라운드 마지막 경기인 나무전자전을 포함해 12번의 기회가 남아 있었다.
자자. 기록에 연연하지 말자.
저번 경기 후 얻은 교훈이었다. 어차피 깨진 기록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머리만 아프다.
사실 22연승도 엄청난 기록이었다.
역대 2위.
누군가 그랬다.
2등도 잘한 거라고.
암. 그렇고말고.
다음에 또 기회가 오겠지 뭐.
이제 경기는 내 손을 떠났다. 직접 마무리 지었다면 최고였겠지만 아쉽게도 그럴 수 없었다.
이제 할 수 있는 건 벤치에 앉아 팀원을 응원하는 것이 전부였다.
아직 스코어는 3:1.
CT는 김대형이 3킬을 더 해야 경기에 승리하게 되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우리는 3명 중 1명만 이기면 경기에서 승리할 수 있다.
확실히 유리한 상황.
솔직히 남은 세 명이 올인성 날빌만 남발해도 김대형 입장에선 난감해진다. 설사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김대형은 올인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가 꽤 크다.
이미 역올킬에 대한 부담감이 상당한 상태.
또한 김대형은 여태껏 올킬을 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먹는다고 올킬도 해 본 선수가 전략이나 운영에 대한 강약 조절을 적절히 할 수 있다.
김대형이 CT의 터줏대감이긴 하지만 이쪽 경험이 부족하다.
그 점을 노린다면 충분히 잡아낼 수 있을 것이다.
종족 역시 가장 용족.
상대 플레이에 맞춰서 하기 가장 까다로운 종족이다.
이렇듯 여러 가지 면에서 아직 우리 팀이 유리하다. 중계진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편파 판정이 아니다.
객관적으로 판단한 것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난 편안하게 경기를 지켜볼 수 있었다.
만약 마지막에 남은 CT의 선수가 이영우였다면 지금처럼 여유 있지는 않았을 거다.
자, 다들 이기면 나한테 고맙다는 말부터 하라고.
“그럼 경기 마무리하고 오겠습니다!”
우리팀에서 차봉으로 선택한 선수는 연호였다.
연호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부스로 향했다. 저번 2킬 이후 부쩍 자신감을 찾은 모습이다. 비록 성적은 아직 그만큼 따라오지 못했지만.
그래도 아주 좋은 현상이었다.
본인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없는 선수는 제 아무리 좋은 전략을 들고 나가고 승리를 따내지 못한다.
-벼랑 끝까지 몰린 팀을 구원해 낸 건 이영우가 아닌 김대형이었습니다!
-일단 가장 위협적인 선수는 본인이 끌어내린 상황이거든요?
-혹시 모릅니다. 역올킬 나올 수도 있어요!
-아직 김대형 선수가 역올킬을 한 번도 해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그래도 이번 경기마저 잡는다면 몰라요. 아직 몰라요.
-후끈 달아오른 경기장 분위기와 함께 저희는 5세트 전장으로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5세트.
약 20분간의 혈투가 서서히 마무리되고 있었다.
-아. 신연호 선수 이렇게 무너지네요.
-정말 잘 싸웠는데 말이죠?
-전체적인 구도도 잘 짰습니다. 먼저 배짱 좋게 확장을 가져간 후 병력과 테크의 우위를 점하는 것.
-그림은 잘 그렸는데 김대형 선수의 전투력이 너무 뛰어나네요.
-2킬입니다. 2킬. 이승우 선수에 이어 신연호 선수도 잡아내는 분위기입니다.
아쉽게도 승자는 김대형이었다.
좋은 상황이었음에도 한 방 전투에서 패배하며 연호는 GG를 선언하고 말았다.
으, 아쉽다.
분명 이길 수 있는 상황이 있었다. 연호가 못한 건 없었다.
한 5초 정도 망설인 것?
그걸 탓할 순 없었다.
모든 화면을 보고 있는 관중이나 중계진 입장에서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이지, 본인의 화면만 보며 한정된 정보를 가진 연호가 확신을 가지고 들어가는 결정을 내리는 건 쉽지 않았다.
본인의 상황을 속인 김대형의 플레이를 칭찬해 줘야 했다.
모두 박수로 연호를 맞아 주었다.
졌지만 ‘잘 싸웠다’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겠지?
스코어는 3:2.
한 점차로 따라잡히긴 했지만 아직 여유는 있었다.
이번에 감독님이 선택한 카드는 승대였다.
전장은 마수가 유리한 곳.
대부분의 마수 선수가 그렇듯 승대도 용족에게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감독님이 승대에게 전략을 주문하셨다.
하지만 김대형이 승대의 의도를 완벽하게 파악해 버리는 바람에 전략이 무산되었다.
그걸 보면서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더럽게 눈치 빠르네.
감각이 제대로 날 선 것 같았다.
그때부터 승대의 운영이 조금씩 꼬였다.
본진에 발업 용아가 난입당하는 불안한 모습을 보이더니 경기가 점점 불리해지기 시작했다.
초반 피해 탓에 조합에서 밀리고 말았다.
단순 그슨대 조합인 승대와 달리 김대형은 용혼과 비렴 조합을 완벽히 갖추었다.
적어도 마굴 단계의 마수에겐 무적의 조합이었다.
승대가 필요한 건 시간이었다.
김대형도 그걸 잘 알았다.
결국 군락이 가기 전 한방 병력에 본진이 무너지며 GG를 선언하고 말았다.
-김대형 선수 3킬 해냅니다! 경기장이 후끈 후끈 달아오르네요!
-허무하게 끝날 것 같던 경기가 풀 세트까지 왔습니다.
-3킬. 본인 최고 기록과 같죠?
-그렇습니다. 김대형 선수 3킬은 한 적이 있지만 올킬은 여태까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오늘 그 기회를 잡았어요!
-만약 아스트로의 대장까지 잡아내며 역올킬을 해낸다면 본인의 기록을 갈아치움과 동시에 팀을 수렁에서 건져 내는 거예요!
-반면 아스트로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그냥 작은 불씨인 줄 알고 대충 꺼트리려고 했는데 꺼지기는커녕 이미 다리를 다 불태우고 몸을 태우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특급 소방수의 진화가 필요합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스코어는 3:3 동점.
입 안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우리와 달리 경기장은 뜨거운 함성으로 가득 찼다.
풀세트까지 가는 접전이 반가운 것이다.
4:0으로 허무하게 끝날 것 같던 경기가 이젠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짙은 안개 속에 빠졌다.
누가 이길지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속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불안감이라는 불씨가 조금씩 피워지기 시작했다.
여유는 사라졌다.
등에 기대고 있던 등은 승대가 GG를 선언한 순간부터 바짝 세워져 있었다.
안 좋은 생각이 불쑥 들었다.
설마 이거 지는 거 아냐?
내가 3킬이나 했는데? 그 3킬에 이영우도 포함되어 있는데?
에이 설마.
애써 찝찝한 생각을 흐트려 놓았다.
좋은 생각, 좋은 생각!
지금은 좋은 생각만 하자. 잡귀야 물럿거라!
“그럼 가 보겠습니다.”
마지막 대장 카드는 현우 형이었다.
7세트에 대장으로 출전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만도 한데 현우 형의 입가엔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이 부담감을 버틸 수 있는 사람은 현우 형밖에 없었다.
그랬으니 마지막 대장까지 현우 형을 아껴 두었겠지.
감독님 입장에선 이전에 끝내기를 바라셨을 거다. 전략은 참 좋았는데 한 타이밍씩 어긋났다.
이미 지난 일이다. 곱씹어 봤자 아쉬움만 더 진해질 뿐이다.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지금 생각할 건 현우 형의 승리뿐이었다.
이제 물러날 곳도 없었다.
상황은 똑같다. 양쪽 다 벼랑 끝 상태. 조금이라도 휘청이면 그대로 떨어진다.
그나마 분위기가 나은 건 CT 쪽이었다.
3연패로 쳐져 있는 우리와 달리 3연승으로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올라와 있는 상태였으니까.
“형, 응원할게요.”
간절함을 담아 현우 형을 바라보았다. 현우 형도 나를 바라보았다.
많은 말은 필요 없었다.
서로가 하고 싶은 말은 이미 눈빛에 모두 담겨 있었다.
“꼭 이겨서 네 3킬을 헛되지 않게 해 줄게.”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현우 형만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우리 함께 멋지게 인터뷰 하러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