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8 Game No. 68 같은 아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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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는 어때?”
“글쎄요. OSL이나 크게 다르지 않네요.”
결과적으로 이영우와 다시 한 조가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형규와 다른 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 조에 마수가 없다는 것도 다행이었다. 아직 공중 유닛 컨트롤이 너무 낮기 때문에 마수를 상대하는데엔 한계가 있었다. 자신 있는 환국전과 [날빌러]가 최고의 효율을 발휘하는 용족전만 한다는 건 꽤나 괜찮았다.
“하긴 나도 뭐. 이게 뭔 차이인가 싶다.”
나처럼 똑같은 선수와 같은 조가 된 건 아니지만 다른 육룡인 허영우와 한 조가 되었다. 그나마 박천기라는 약한 선수가 함께 해서 다행이지만 육룡의 둘이 함께 있어 부담이 있는 조였다.
“그래도 2번째 조지명식이라고 전과 많이 다르던데? 할 말도 다 하고. 잘했어. 진짜.”
현우 형의 칭찬에 어색한 미소가 얼굴에 번졌다.
OSL 조지명식과 달리 MSL 조지명식에서 유독 많은 사람들에게 시달렸다. 현우 형은 그 것이 좋은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만한 실력을 갖추었기에 여기저기서 가만 두지 않는 거라고. 듣고 보니 그럴싸했다.
전 시즌 OSL 우승자인 이영우와 MSL 우승자인 임동원에게 시달린 것도 모자라 육룡과 함께 묶여 도마뱀 꼬리 소리까지 들었을 땐 정신이 차리기 정말 힘들었다.
무슨 정신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번쩍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물이 엎질러진 후였다. 혹 건방지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걱정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임동원의 팬 밖에 없었다. 오히려 적절한 발언이었다며 감싸주는 글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렇게 보였으면 다행이네요.”
걱정도 많았다. 사람들의 반응이 좋지 않을까봐.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정반대였다. 창 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경기는 1경기도 하지 않았는데 수십경기는 한 것 같은 피로감이 온 몸을 덮쳤다. 물 먹은 솜처럼 몸이 축 늘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며칠 간 리그가 없어서 다행이다.
내일이 OSL을 하는 금요일이긴 하긴 하지만 나랑은 상관없다. 이미 개막전을 치렀으니까. 내 경기는 다음 주 수요일인 16강 3회차에 잡혀있다.
김윤호와의 대결.
반드시 이겨야하는 경기다.
진다고 탈락이 확정되는 건 아니지만 자력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은 아예 사라진다. 노릴 수 있는 건 이영우의 3승 1위 진출 후 남은 3명의 1승 2패 3자 재경기.
재경기는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매우 힘든 일이기에 피할 수 있다면 피해야했다.
‘당장 걱정할 건 이 경기가 아니라 폭스전이지.’
예고올킬.
업적을 얻긴 했지만 초급도발과 달리 곧바로 보상이 주어지진 않았다.
할 수 있을까란 의문이 들었지만 떠오르기가 무섭게 지워버렸다. 시작도 하기 전에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 해야 할 건 나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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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왔....어라? 일찍 다 자네.”
활기차게 인사를 하며 안으로 들어갔지만 숙소의 불은 꺼져 있었다. 경기가 없는 날이라 그런지 컨디션 관리를 위해 연습시간을 줄이고 빨리 취침에 든 것 같았다. 난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내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다른 사람의 모습은 보였지만 연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 후 씻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연습실 불이 켜져 있네?’
누군가 연습실에 있다. 방에 없던 연호려나?
오늘 패배가 충격 이었나보다. 연습에 방해가 되지 않게 조심스럽게 연습실 문을 열었다. 역시 안엔 연호가 있었다. 컴퓨터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자판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로 보아 연습을 하는 건 아닌 듯싶었다.
혹시?
‘야한거 보는 거 아냐?’
시커먼 남자 놈들만 사는 공간이니 연습 시간을 피한 새벽에 그런 일이 종종 있긴 했다. 연호를 놀래어 줄 요량으로 걸음소리를 줄여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얼마나 집중하고 있기에 아예 눈치도 못 채네.’
그렇게 연호의 뒤에 선 순간 연호가 보고 있던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난 그대로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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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연호레기 경기 보신 분?ㅋㅋㅋㅋㅋ >
<개쓰레기임. ㅎㄷ 갓승우 아니었으면 오늘도 패배했을 듯.>
<국립암센터 031-920-0114 몸에 이상 있으신 분 바로 연락하세요. 빠른 발견만이 살 길 입니다.>
<왜 다들 욕만 하냐? 신연호 경기 난 좋은데. 내가 원래 저혈압이 있었는데 연호레기 경기 보고 낳음. 이거 특허내야 할 듯.>
<낳기는 미친ㅋㅋㅋ니가 애 낳냐?>
<항암제. 항암제를 달라.>
<이 새끼는 나올 때마다 지면서 꼬박꼬박 나오냐? 성이 신씨가 아니라 이씨인거 아냐? 감독 친척?>
악플.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건 연호에 대한 욕이었다. 아까 내이름을 검색했을 때완 전혀 다른 내용들이다. 연호는 그런 악플을 일일이 정독하고 있었다.
초점이 풀린 눈으로.
자세히 보니 눈가에 눈물이 흐른 자국이 살짝 보인다. 순간 야한 것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고 의심했던 것이 미안해졌다.
상황이 애매해졌다.
여기까지 와서 몰래 나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인기척을 할 수도 없고.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어? 언제 왔어?”
모니터 화면에 내 모습이 비쳤는지 연호가 고개를 돌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직 눈물 자국이 선명한데 입가엔 미소를 그리고 있다.
억지웃음.
여기서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모른 척을 해야 하는 걸까? 어쩌면 이게 답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겪었으니까.
경기에서 1번 실수했을 뿐인데 살인이라도 저지른 범죄자마냥 욕이 쏟아졌다.
내가 그 정도로 잘못 했던걸까라는 생각과 동시에 죽으면 편해질까란 생각까지 들었다.
이미 같은 아픔은 겪었기에 괴로워하는 친구를 외면할 수 없었다.
친구니까.
“혼자 뭐 그런 걸 보고 있냐?”
난 옆 자리 의자를 가져와 연호 옆에 나란히 앉았다.
정면 돌파가 내가 내린 답이었다. 모르면 모를까 안 이상 그냥 지나쳐 갈 수가 없었다. 이럴 때 혼자 있으면 더욱 더 우울해진다. 안 좋은 생각만 하게 되고.
나도 박성훈 코치님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더 늪에 빠진 것 마냥 허우적거렸을지 모른다.
내가 힘들 때 박성훈 코치님이 손을 내밀어 주셨듯 연호에게 손을 내밀어 주고 싶었다. 이 문제를 해결해줄 순 없다. 하지만 옆에 있어줄 순 있다.
“이거? 그냥. 오늘은 또 무슨 욕을 먹고 있나 하고.”
그렇게 말하는 연호의 얼굴은 모든 걸 포기한 사람의 얼굴 같았다. 희망도 목표도 모두 잃어버린 사람. 주변은 제 색을 가지고 있는데 연호만 회색으로 죽어 있었다.
“나도 욕 먹어봐서 잘 알지. 커뮤니티 어딜 가도 내 욕이고 날 우습게 편집해서 만든 동영상이 항상 베스트에 올라있고. 그건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되더라. 볼 때마다 가슴 한 구석이 쿡쿡 아파오고. 그게 하루 이틀이면 사라질 줄 알았거든? 아냐. 미친 듯이 계속 올라 오드라. 가장 짜증났던 건 나도 모르게 내 자료에 딱 1번 피식 웃은 적이 있거든? 그때가 진짜 최악이었어. 최악. 그 걸 보고 내가 웃을 줄이야.”
속사포 같이 쏟아지는 말에 연호가 피식 웃었다.
“요즘 네가 너무 잘해서 잊고 있었다. 너도 이스포츠의 역사를 만든 애였지?”
승드셋과 몰수로더.
연승가도를 달리고 있는 지금이야 가벼운 유머 정도로 쓰이지만 당시엔 정말 심각하게 욕을 먹었다. 프로게이머로서의 자질부터 시작해서 실력까지. 그냥 머리부터 발끝까지 분해당하 듯 까였다고 보면 편했다.
“그래. 내가 14연승으로 용족 최다 연승 기록을 세우긴 했지만 그 전에 이미 승드셋과 몰수로더로 이름 좀 날렸다.”
과장 된 몸짓에 순간 웃음을 터뜨리는 연호.
웃으니까 얼마나 좋아?
잠시나마 연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그 것도 잠시. 지독한 허무가 연호를 다시 덮쳤다.
“모르겠다. 여기 올라 온 글처럼 내가 재능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요즘 나갈 때마다 지는데 미칠 것 같다. 몇 연패 인지도 까먹었어. 정확히 말하면 안세기 시작한 거지만. 정말 내가 재능이 없는 걸까? 어제 경기도 사실 다 역전한 거 진거잖아. 흥분했어. 김택윤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가 할 것만 생각했어. 아마추어처럼. 운 좋게 화면에 안 잡혔지만 김택윤 흑완 보는 순간 욕했다. 아마 그 것까지 화면에 잡혔으면 지금보다 배는 더 까였겠지.”
자조적인 말투.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1번 겪은 일을 연호는 날마다 겪고 있었으니까. 무어라 말하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웠다. 그냥 들어주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난 내가 신들의 전쟁을 진짜 잘하는 줄 알았어. 동네에서도 항상 1등하고 지역 대회 나가서도 1등하고. 당연히 프로게이머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했고. 프로게이머가 되면 우승을 차지할 줄 알았지. 항상 듣던 소리가 최고였으니까. 연습실에서도 좋았어. 형들도 다들 칭찬해주고. 동기나 동생들도 잘한다고 해주고. 감독님도 경기 나가도 되겠다고 했을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나간 개막전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
내 앞가림을 하기에도 바쁜 시절이었기에 다른 누군가의 개막전이 어땠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연호의 표정으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개박살 났어. 말 그대로 개관광당했지. 손이 떨리고 시야는 좁아지고. 아무 것도 안 되고 안보이더라. 첫 경기라서 그런거라고 다들 위로해주는데. 그 뭐라고 해야 하지? 나만 알 수 있는 거 있잖아. 본능적으로 이게 첫 경기라 그런 게 아니라는 게 확 느껴졌어.”
나도 했던 고민이다. 아니 우리 둘 뿐만의 고민이 아니다. 2군에 있는 선수들이나 1군에 있다 하더라도 개인리그 본선의 문턱조차 밟아보지 못한 선수들, 그리고 승률이 채 4할이 되지 않는 선수들은 모두 같은 고민을 안고 있을 것이다.
“그 다음 경기도. 그 다다음 경기도 마찬가지였어. 부스에 앉을 때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데. 진짜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더라고. 그래도 사람이다 보니 조금씩 적응 되면서 나름 승수도 챙기면서 주전으로 활약할 수 있었는데 작년부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버렸어. 그때랑 똑같아. 부스에만 앉으면 식은땀이 나고 눈앞이 캄캄해지는게.”
연호는 슬럼프에 빠져있었다.
아주 길고 긴 슬럼프.
연호가 요즘 연패를 하고 있긴 하지만 전체 승률로 보았을 때 그리 나쁜 수준은 아니었다. 확실히 재능은 있다. 위로해주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연습실에서 하는 걸 보면 확실히 센스가 있다.
그 센스가 경기에서 잘 나오지 않아서 그렇지.
오늘 경기만 해도 그렇다. 용혼으로 용광포의 공격을 대신 맞아줌과 동시에 흑완을 밀어 넣는 건 정말 상상도 못할 플레이였다. 마무리만 잘 되었더라면 아니 상대가 김택윤만 아니었따면 짜릿한 역전승을 차지했을 것이다.
“진짜 미치겠다. 연습실 반만큼만 나오면 좋겠는데.”
연호의 짙은 한숨이 연습실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