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4 Game No. 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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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는 흥미진진하게 흘러갔다. 30분이 넘는 혈투 끝에 승자는 박현우로 정해졌다. 왜 그가 왜 저번 시즌 개인리그 8강에 들었는지를 보여주는 한 판이었다. 초반 빌드가 갈린 것도 컸다.
박현우는 실로 과감한 빌드를 선택했다.
생더블.
만약 김택윤이 견제를 목적으로 제단을 조금이라도 전진해서 지었다면 그대로 경기가 끝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김택윤이 선택한 빌드는 같은 더블신전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박현우는 제대로 배를 불리는 배짱을 부렸고 김택윤은 혹시 모를 치즈러시를 대비해 가난한 더블신전을 했다는 것이다.
이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크게 벌어졌다.
초반에 자원을 폭발적으로 채취한 덕에 물량이면 물량, 업그레이드면 업그레이드. 어느 것 하나 부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용족보다 인구수를 채우는 속도가 빠를 정도였다.
7:3.
별다른 교전도 없었는데 이미 경기는 크게 기울어져있었다.
웅크리고 있던 박현우가 진출한 건 기계 유닛의 공격력 2단계가 업그레이드 되었을 때 였다.
200을 꽉 채운 기계 유닛이 움직이는 건 실로 장관이었다.
김택윤이 온갖 술법을 동원하며 분투를 펼쳤지만 역부족이었다. 쏟아져 나오는 환국의 물량을 막을 순 없었다.
결국 타 스타팅 멀티가 밀린 김택윤이 GG를 선언했고 동시에 스코어는 2:2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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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승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감독님의 노림수가 제대로 적중했다.
“수고했어. 형.”
내 말에 현우 형이 특유의 맑은 웃음을 지었다.
“운이 좋았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현우 형은 참 겸손하다. 생더블이 성공한 것을 그저 운으로 돌리고 있었지만 단순히 운으로 치부할 건 절대 아니었다.
방송경기에서 배짱을 부린다는 것.
그 자체가 엄청난 실력이었다. 배짱을 부린 것이 통했을 때 경기가 매우 유리해진다는 것은 누구나 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배짱을 부리지 못한다. 혹 배짱을 부리다 허무하게 패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우 형은 과감했다. 그리고 그 과감함은 통했다.
김택윤이라는 에이스 카드는 생각보다 쉽게 제거한 것이다.
“다음에 누가 나오려나?”
“글쎄요. 도재열이 나올 것 같기도 하고. 정명혁이 나올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아예 임형규가 나올 것 같기도 하고.”
감독님과 도 수코님이 S1의 다음 엔트리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상대적으로 S1의 카드는 예측하기가 힘들다. 임형규의 추가로 더욱 더 어려워졌다. 종족 별 에이스 카드가 확실히 추가가 되었으니까.
현우 형이 마수전에 약하니 형규를 내보낼 수도 있다. 아니면 환국전을 기가 막히게 잘하는, 역대 환국전 승률 2위인 도재열을 내보낼 수도 있다. 그도 아니면 다음 경기까지 생각해서 균형 잡힌 세 종족전 승률을 보유하고 있는 정명혁이 나올지도 모른다.
세 종족 모두 막강한 카드가 아직까지 남아있어 쉽게 예측이 되지 않았다. 이것이 S1의 가장 무서운 점이자 장점이었다.
“에이스 카드 많아서 좋겠다.”
감독님의 농담같은 푸념.
그때 스텝이 다가와 S1의 엔트리를 전해주고 갔다.
“S1 중견 정명혁이다.”
정명혁이 지금 나온다는 건 단순히 현우 형을 잡겠다는 의도가 아닌 그 후에 나올 대장까지도 잡고 경기를 끝내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정명혁은 충분히 그럴 능력이 된다.
감독님의 말에 각 종족 코치님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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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우 선수. 자신이 왜 아스트로에 에이스라 불리는지 몸소 증명해냅니다.
-잠시 이승우 선수에게 가려져있었거든요? 하지만 오늘 그 존재감을 확실히 돋보입니다.
-김택윤을 잡으며 스코어는 동점! 만약 1킬이라도 더 추가한다면 아스트로가 S1을 잡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오랜 기간 동안 아스트로는 S1에게 승리를 따내지 못했거든요? 마지막 승리가 무려 2년 전입니다.
-9연패 입니다. 9연패. 오늘까지 지면 무려 10연패를 하게 됩니다. 그런 치욕적인 기록을 남겨서는 안되거든요?
-현재 뒤에 이승우 선수가 남아있습니다. 상대방 에이스 카드 중 하나인 김택윤 선수는 이미 패배했구요. 오늘이 기회입니다. 아스트로 입장에선.
아스트로는 창단 이후 쭉 S1에서 약했다. 그렇다고 해도 최근 전적은 찾아보기 참담할 정도로 형편없었다.
이번 시즌 1,2 라운드를 포함 무려 9연패를 하고 있었다. 즉, 마지막 승리가 2013년도였다는 말이었다. 당시 S1의 정규리그 우승이 거의 확정 된 상태에서 치러진 경기라 S1은 1군이 아닌 2군 위주로 경기에 나왔었다. 그마저 4:3으로 에이스 결정전까지 가는 치열한 승부 끝에 승리를 얻어 온 것이었다.
이제는 그 기록을 깰 때가 왔다.
-하지만 순순히 물러날 S1이 아닙니다. 제대로 초 강수를 두었습니다. 바로 정명혁 선수를 내보낸 S1!
-대 아스트로 9연승을 10연승으로 늘릴 수 있는 선수로 아주 제격입니다.
-주목해야할 점은 지금 맞붙는 두 선수가 OSL 16강 한 조에 속해있다는 겁니다.
-미리 보는 16강이라고 봐도 좋겠네요.
-여기서 이기는 선수가 다음에 만났을 때 기분 좋게 경기 펼칠 수 있거든요? 팀에게도 중요한 경기지만 본인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경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어느 선수가 승리할 지 지금 경기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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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장기전.
박현우와 정명혁의 경기는 환국의 동족전 답게 40분이 넘는 초장기전이 나왔다.
전장의 자원은 서로 거의 반반씩 먹은 상황.
이제 남은 곳은 단 한군데였고 그 한군데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펼쳐지고 있었다.
-아. 박현우 선수 힘들어요.
-고군분투 했지만 남은 자원이 없습니다.
-이번 공격에 모든 걸 걸고 어떻게든 뚫었어야했거든요? 막혔습니다. 이렇게 되면 12시는 정명혁 선수 손에 들어가죠.
지형적으로 유리한 건 정명혁 쪽이었다.
어릴 적 바둑을 배웠다던 정명혁은 병력을 배치하는 능력이 귀신같았다. 마치 옵저버의 화면을 직접 보고 있는 것 처럼 적재적소에 딱 필요한 병력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무엇이 중요한지 잘 알았다.
결국 마지막 12시 자원은 정명혁이 차지했다.
극 후반에 이른 상황에서 자원 1군데의 차이는 굉장히 컸다. 정명혁은 모든 화통도감이 돌아가는 반면 박현우는 절반도 채 돌아가지 않았다.
-박현우 선수 화통도감에 불이 꺼졌습니다. 생산 안되요. 자원이 없어요. 자원이.
-반면 정명혁 선수는 12시 자원을 바탕으로 모든 화통도감을 돌리고 있습니다. 정말 아쉽네요. 박현우 선수.
이길 수 있는 순간은 분명 있었다. 금와 8기에 기계 유닛을 가득 태우고 정명혁의 본진에 떨어졌던 그 순간.
분명 박현우 입장에선 최고의 기회였지만 정명혁의 방어 능력이 빛을 발했다. 생각보다 피해를 주지 못하고 허무하게 막혀 버린 병력.
그만큼 병력의 공백이 생긴 박현우였고 정명혁은 그 틈을 정확하게 찌르고 들어왔다.
이때 동시에 멀티 2개가 파괴되었다. 정명혁의 본진에도 피해를 주긴 했지만 이에 비하면 새발의 피 수준이었다. 그 중 하나가 마지막 까지 혈전을 펼치던 12시였다. 만약 무리한 공격을 하지 않고 끝까지 자원전으로 갔다던 다른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박현우 선수 GG를 선언합니다. 싸우고 싶어도 싸울 병력이 없었습니다.
-정말 아쉬울 겁니다. 운영 잘 했거든요?
-경기력은 흠잡을 것 없이 좋았습니다. 다만 정명혁 선수가 조금 더 완벽했을 뿐입니다. 이 경기력이 계속 유지만 된다면 OSL에서 벌어질 리매치가 기대되네요.
-잠시 후 저희는 6세트와 함께 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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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가 S1쪽으로 기울었다.
3;2.
이제 아스트로가 이기려면 마지막 대장이 2킬을 해줘야한다. 이재명 감독은 복잡한 얼굴로 코치진을 돌아보았다. 고민이 많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내 결정을 내렸다.
선수들에게 대장을 발표하기 앞서 코치진을 먼저 불러 모았다.
“우리는 3:2로 지고 있고 남은 카드는 대장 단 한장이다. 코치들은 대장으로 누굴 내보냈으면 좋겠나?”
“현재 상승세를 봤을 땐 승우를 내보내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연습실에서 실력도 굉장히 뛰어나고요. 무엇보다 12연승으로 한참 기세를 탄 승우니까 정명혁을 잡고 2킬을 노려볼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먼저 답한 이는 용족 코치인 유 코치였다.
다들 코치들도 대부분 유 코치의 말에 동의하는 듯 보였다. S1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재명 감독의 생각을 조금 달랐다.
“난 바로 그 점 때문에 승우가 아닌 다른 선수를 대장으로 내보낼 생각이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야. 지금 상황에서 승우를 쓰는 건 너무 위험해. 한참 기세가 오르는 선수의 기가 꺾여 버릴지도 몰라. 일단 정명혁 자체도 용족전에선 이영우보다 낫다는 소리까지 듣고 있는 강자고 이런 상황에서 승우를 내보내는 건 무리수야.”
“그래도 이기려면....”
“우리가 언제부터 S1을 잡아야한다고 생각했어?”
전 코치의 말을 이재명 감독이 잘랐다.
“너희 눈빛을 이해 못하는 건 아냐. 어떻게 보면 나를 겁쟁이라고 생각하겠지. 승부를 피하려는. 하지만 모든 승부를 그렇게 전력으로 맞부딪칠 수는 없다. 확실히 이길 수 있는 상황이라면 모든 걸 걸어 이기고 반대로 이길 수 없는 상황이라면 전략적으로 패배를 선택한다. 이건 100m달리기가 아냐. 42.195km를 달리는 마라톤이지. 그리고 오늘 승우는 OSL 개막전이 있다. 상대는 이영우. 모든 걸 걸어도 넘기 힘든 벽이야. 이번 경기는 깔끔하게 포기하고 다음 경기 준비한다. S1에게 1패 더한다고 하늘이 무너지지는 않잖아? 우리가 지금 우승 경쟁을 하는 것 도 아니고 S1을 이긴 1승이나 육군을 1승이나 똑같아. 폭스 잡으면 돼.”
이재명 감독의 말에 코치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는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오늘 경기를 아무 이유 없이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선택과 집중.
프로리그와 개인리그가 공존하는 프로 게이머들에게 끊임없이 던져지는 난제다.
보통 프로팀 입장에선 프로리그에 집중하길 바란다. 감독들 역시 비슷한 생각이고. 하지만 이재명 감독은 달랐다. 로열로더, 아니 그 보다 더 대단하다는 진 로열로더의 길을 걸으려는 선수다. 개막전이 있는 날 프로리그로 힘을 뺄 순 없다.
더군다나 기록도 걸려있다. 오늘 이영우에게 진다면 공식전 연승기록은 12연승으로 마무리되지만 프로리그 연승 기록은 계속 이어나갈 수 있다. 다음 경기는 아스트로와 함께 최약체 팀으로 평가받는 폭스전이기에 얼마든지 연승을 이어 나갈 수 있다. 오늘만 날이 아닌 것이다.
애초에 이재명 감독은 이승우를 기용할 생각이 없었다. 만약 이승우를 내보려고 했다면 선봉이나 차봉으로 내보냈을 것이다.
“어차피 현우, 연호, 승대, 승우 빼고 다른 카드도 키워야 하잖아. 그렇지?”
모두 동의하는 바였다. 너무 출전하는 선수가 뻔하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는 아스트로였으니까.
“요즘 여준이 어때?”
“괜찮습니다. 특히 환국전에 재능을 보이고 있습니다.”
윤여준.
아스트로 1군 프로게이머도 20살의 용족 선수이다. 요즘 연습실에서 기세가 좋은 선수 중 1명이었다.
“경험도 시켜줄 겸 이번 경기 대장 여준이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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