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저렉션-151화 (151/152)

# 151

호세 페레스는 도수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다. 며칠간 시간을 버는 것뿐이었지만 그의 세 치 혀에 B&W와 함께 침몰하느냐, 살아남느냐의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으리으리한 저택에 진귀한 음식을 대접한 호세 페레스는 부하를 통해 물어왔다.

“여자는?”

원하면 얼마든지 공급해 주겠다.

그런 태도였다.

하지만 도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대신 다른 걸 부탁하지.”

“부탁?”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만났던 닥터를 보고 싶다.”

“그는 왜…….”

묻던 부하가 말을 멈췄다. 극진히 대접하라는 호세 페레스의 엄명 때문이었다.

“알겠다.”

얼마 후, 도수의 아버지 이찬이 불려왔다. 그는 호세 페레스의 부하가 물러갈 때까지 기다리다 입을 열었다.

“대접이 완전 바뀌었군. 대체 무슨 수를 쓴 거냐?”

“제가 저들의 약점을 잡고 있으니까요.”

“저들을 도와줄 생각이냐?”

“아빠는요?”

“뭐?”

도수가 다시 물었다.

“아빠는 저들을 도와주셨나요? 오랫동안 잡혀 계셨고, 고문하기 전 건강 상태를 체크하러 들어왔습니다. 저한텐 그게 더 중요해요.”

아버지를 오랜만에 만난 해후보다 그게 먼저다. 그러한 태도에 아버지는 미소 지었다. 서운해할 줄 알았던 도수가 눈을 크게 떴다.

그를 보며 아버지가 물었다.

“내가 어떻게 했을 것 같지?”

“…저들을 도우셨다면 실망할 것 같아서요.”

“난 의료 봉사를 하던 사람이다.”

“사람은 변합니다. 환경에 의해서, 생존을 위해서.”

“그래, 변하지.”

아버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 또한 변했다. 하지만 의사로서의 철칙을 어긴 적은 없다. 고문당할 사람들의 건강 상태를 확인한 건 맞지만… 그들을 고문하고 죽이는 데 협조하진 않았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도수는 쉬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건강 상태를 체크하는 것 자체가 협조한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향해 아버지가 말했다.

“난 그 대상이 죽음을 위장할 수 있도록 도왔거든.”

“예?”

“약을 하나 만들었다.”

“약이라니…….”

“심장을 일시적으로 정지시켜 주는 약이다.”

“여기 잡혀온 모든 사람들을 구하신 겁니까?”

도수의 말에 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놈들이 확인 사살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 방법이 없어. 대부분은 그렇게 됐지. 하지만… 보복성이 크지 않은 대상이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경우 확인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런 사람들만 살릴 수 있었던 거고.”

“이해가 가지 않아요.”

도수가 덧붙였다.

“그럼 그들은 왜 아빠를 돕지 않았죠?”

“의사는 대가 없이 사람을 살린다. 그들은 내가 자신들을 도운지 알지 못할 거야.”

“그게 무슨… 굳이 왜 구출될 수 있는 길을 포기하신 겁니까?”

“그들이 은혜를 갚기 위해서 어딜 찾아갈 것 같으냐?”

“경찰이나 군…….”

“맞다.”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군경은 카르텔한테 매수된 자들이 반이다. 그들이 살아 있다는 걸 알면 호세 페레스가 가만히 둘 리 없지. 그리고 그렇게 되면 내 신변도 위험해진다. 내가 그들을 도운 걸 알게 될 테니까.”

“아……!”

도수는 아버지의 심계에 감탄했다. 아마 자신이었다면 존재를 알렸을 것이다. 구출을 기다리다 총알받이가 됐을지도 모른다.

도수가 입을 열었다.

“좀 더 조심할 필요가 있겠군요.”

“그래, 네 말대로 미국에서 구출하러 올 때까진.”

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료는 아빠가 가지고 계세요. 저보단 그편이 안전할 것 같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너와 내 거처가 달라지면? 추적기가 너한테 있으니 내가 가진 자료를 세상에 알리는 게 늦어질 거다.”

아버지는 그 말과 함께 자신이 가져온 자료들을 내밀었다. 바지 속에 용케 잘 숨겨왔다. 도수는 주변을 확인한 뒤 받은 자료를 훑었다.

“맙소사…….”

자료에는 그간 B&W와 카르텔 간에 이뤄진 커넥션이 소상하게 적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심장성형제와 마약과의 연관성도 완벽하게 나와 있었다. 여기에 도수가 지금껏 밝혀낸 사실이 결합되는 순간, 완전 빼도박도못하는 진실이 될 것이다.

“목숨을 걸어야 했을 텐데.”

“이곳에서 카르텔 놈들과 몇 년을 살았다. 네 엄마와 널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내 삶은 이미 무의미해진 뒤였어. 그럼에도 내가 살아 있었던 건 의사로서의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이야.”

도수는 속에서 울컥했다.

“이자들을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

“나 역시 그렇게 되길 바란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도수가 눈을 번쩍였다.

“…곧 상황이 변할 거예요.”

***

도수의 예언은 오래 가지 않아 실현됐다. 모두가 잠든 새벽 네 시, 긴장이 풀리는 야음을 틈탄 특공대가 그들이 있는 카르텔의 본거지로 잠입한 것이다.

퓩, 퓩, 푸슉.

보초를 서던 마약상들이 나자빠졌다.

딱 두 발씩, 그들의 가슴과 이마를 쏜 특공대들이 빠르게 진입했다.

인기척을 듣고 도수가 잠에서 깼을 땐, 이미 특공대원이 눈앞까지 도착한 상황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예.”

“저희를 따라오십시오.”

“잠시만.”

도수가 말했다.

“구출할 사람이 더 있습니다.”

***

도수의 아버지 이찬 역시 눈을 떴을 땐 도수와 특공대원들이 방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 역시 도수처럼 전쟁터에서 난민 구호를 하던 사람. 기본적인 교전 수칙이나 피신 수칙은 숙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특공대원들의 보호를 받으며 이동했다.

그렇게 저택 밖으로 나간 순간.

특공대원이 무전을 때렸다.

“끝장낸다.”

그 순간.

탕탕탕탕탕! 타다다다다다!

총성이 하늘을 수놓았다.

여기저기서 조명이 켜지며 비명 소리가 잇따랐다.

도수를 지키던 이근육과 경호원들, 미군 특수부대가 파견된 작전이었다.

당연히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온 정예부대를 카르텔의 시카리오들이 당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야말로 호세 페레스는 독 안의 쥐가 된 셈이다.

습격 규모에 놀란 아버지가 물었다.

“사람 하나 구하자고 이렇게 큰 규모의 부대를 파견한다고? 그것도 미국에서?”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도수가 빙그레 웃었다.

아니나 다를까.

현장 책임자로 보이는 군인이 고글을 벗으며 말을 붙였다.

“모시게 돼서 영광입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도수는 저택을 흘깃 보며 덧붙였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무뚝뚝하게 대답한 책임자가 말을 이었다.

“할리 무어 장군께서 안부를 전하셨습니다.”

“잘 계시죠?”

“저도 직속상관은 아니라 정확한 소식은 알지 못하지만 잘 지내시는 것 같습니다.”

“할리 무어 장군 선에서 결정된 사안인가요?”

“아닙니다. 상원에서 직접 조율한 후 백악관에 요청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미군 장군이 개입된 것만 해도 놀라운데, 상원에 백악관까지.

도수는 도움에 대한 보답을 하기 위해 누가 도왔는지 물어본 것뿐이지만, 옆에서 듣고 있던 아버지는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대체 내가 없던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앞으로 놀라실 일이 많을 거예요.”

도수가 책임자에게 물었다.

“전화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책임자에게 군용 전화를 받은 도수는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아버지의 연락 한 통이면 엘 파소의 의료진들에게도 무탈한 소식을 전할 수 있을 터였다.

곧, 할아버지가 전화를 받았다.

-이사장입니다.

“저예요, 도수.”

잠시 침묵이 흐르고.

할아버지가 외쳤다.

-아아아……! 어떻게 된 게냐? 지금 어디야?

도수는 가슴 한 켠이 따뜻해졌다. 그가 아버지 이찬에게 전화를 내밀자, 이찬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다. 날 탐탁찮아하셔.”

그 목소리를 들은 걸까?

할아버지가 수화기 뒤편에서 말했다.

-설마… 설마…….

말을 잇지 못하는 할아버지.

도수가 말했다.

“맞아요, 할아버지. 아빠가 살아 계셨어요.”

-네 아비가……? 그럼……!

도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전하는 것은 그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자로서 혈육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은, 누구라도 가슴이 미어지는 일이었다.

도수 역시 감정이 없는 기계는 아니었다.

“…죄송해요.”

-네가 무얼.

할아버지가 말했다.

-이찬, 찬이를 바꿔다오.

도수가 전화를 다시 넘겼다. 두어 번 전화를 밀자 그제야 이찬이 전화를 받았다.

“…아버님.”

-찬이냐?

“예, 접니다.”

-…….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아버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못나서… 행복하게 잘 살지 못했습니다. 염치없이 저만…….”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수년간 참아왔던 설움이 하필 이 순간 폭발한 것이다.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 장인에 대한 죄송함,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까지.

무엇 하나 표현할 길이 없는 커다란 감정의 폭풍 속에 휩싸인 그때.

할아버지가 말했다.

-…고생 많았다.

“아…….”

-모든 죄는 내가 지었다. 내가 너희를 받아주지 않아서야.

“아아.”

-미안하다.

“아아아!”

아버지가 털썩 주저앉으며 오열했다.

도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했는데도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아버지는 버젓이 살아 있었고.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케케묵은 마음도 풀어졌다.

‘보고 계시죠?’

도수는 어머니를 향해 물었다.

어머니가 이 장면을 보셨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속이 무너지고 슬픔이 몰아쳤다.

이래서 환자 보호자들을 보면서도, 남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도 늘 부모님에 대한 내용들을 피해왔던 그다.

하지만 왠지, 이젠 더 이상 피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더 이상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지 싶었다.

그렇게 각자의 감정에 매몰된 두 사람을 향해, 현장 책임자가 입을 열었다.

“가셔야 합니다. 아무리 떨어진 곳이라도 위험할 수 있으니.”

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찬을 부축해서 일으킨 뒤, 차에 탔다.

부르릉!

시동을 건 운전병이 액셀을 밟았다.

카르텔의 본거지와 멀어지며 도수는 마약상과 관련된 일이 자신의 손을 떠났다는 것을 실감했다. 한 꺼풀 무겁고 불편한 옷을 벗은 듯 개운했다. 이제, B&W와의 악연도 청산될 터였다.

“아빠.”

그 말에 아버지가 고개를 돌렸다. 두 눈은 퉁퉁 붓고 얼굴엔 온통 눈물 자국이 선연했다.

살짝 미소 띤 도수가 말했다.

“저도 이제… 제 몸을 아껴가며 일할 이유가 생긴 것 같아요.”

아버지가 세차게 주억거렸다.

“그래, 그래야 한다.”

“아빠 덕분에, 엄마 덕분에 의사가 됐어요.”

“네가 의사가 됐다는 게… 놀랍고 대견해서. 네 엄마도 봤어야 하는데.”

아버지가 말을 잇지 못하자.

도수가 손을 잡았다.

“이젠 우리 같은 사람들이 더 이상 생기지 않도록 같이 치료해요. 부모님을 잃거나 자식을 잃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꾸욱.

손에 힘을 준 도수는 진심으로 다짐했다. 우여곡절 끝에 만난 아버지. 이젠 함께 환자를 보고 사람을 살릴 수 있다. 하늘이 도와서 다시 만난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다시 그들 같은 가족이 생기지 않게끔 노력하는 일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