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
“도수냐?”
아버지였다.
도수는 혼란스러웠다.
‘마약에 중독된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아버지가 보일 리 없다. 아버지의 마지막을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까. 부모님은 라크리마에서 돌아가셨다.
그런데 너무나 생생했다.
깊게 패인 주름 하나하나. 눈에서 하염없이 흐르고 있는 눈물까지.
아버지가 떨리는 손을 들어 도수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감촉 또한 피부를 통해 느껴지고 있었다.
“정말… 아빠예요?”
“그래.”
아버지는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해주고 싶은 얘기가 많지만 시간이 없다. 카르텔 놈들이 우리 관계에 대해서 눈치채면 안 돼.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네 건강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제 건강 상태를요?”
“그래. 고문을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 상태인지.”
도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역시 카르텔 놈들의 생각은 상상을 초월한다. 잡혀오자마자 바로 고문할 생각부터 하다니.
의외로 겁먹거나 당황하지 않는 도수의 얼굴은 본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그렇게 되고 네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안 봐도 알겠구나.”
도수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비록 오랜 세월이 지났다지만 아버지의 모습은 생각보다 더 늙고 여위어 있었다. 그러나 그간 일에 대해 묻는 것보다 급한 질문이 남아 있었다.
“어머니는요?”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네 생각대로…….”
목이 메는지 말을 잇지 못한 그가 화제를 돌렸다.
“그래도 네가 살아 있단 것만으로도 난 너무 기쁘단다.”
“아…….”
도수는 두 번 어머니를 잃은 기분이었다. 아버지를 이렇게 만났으니 기쁜 마음이야 이를 데 없으나 그로인해 가졌던 한 가닥 희망이 무참히 사라진 것이다.
한편 아버지가 그를 찾지 못한 것도 이해가 갔다. 난민생활을 십여 년 가까이 했으니 전쟁터인 라크리마에서 부자(父子)가 재회하기란 쉽지 않았을 터다. 아마도 아버지는 어머니와 도수를 동시에 잃었다고 여겼을 테고, 당시의 도수 못지않은 절망에 빠졌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왜 아버지가 카르텔의 본거지에 있는 걸까?
“어떻게 여기 계신 거예요?”
주위를 훑은 아버지가 도수에게 주사 놓을 준비를 하며 말했다.
“난 그 이후 우리 가족을 그렇게 만든 놈들을 쫓았다. 처음에는 반군의 우발적인 소행인 줄 알았지만 누군가 의도적으로 일으킨 일이었어.”
“어떻게요?”
“반군에 군자금을 지원해 준다는 조건으로… 놈들은 거액이 걸린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고, 나와 네 어미는 그 프로젝트의 걸림돌이었다. 하필이면 매일 사람이 죽어나가는 라크리마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으니 그런 일을 저지르기가 더 손쉬웠겠지. 우린 설마 그렇게까지 하리라곤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
“카르텔이나 반군 놈들 같으면 충분히 조심했겠지만 정장을 입고 펜을 든 채 일하는 자들이 이런 짓을 저지르리라고 누가 예상이나 할 수 있었겠냐.”
“…펜이 칼보다 더 무섭죠.”
도수는 아버지가 말하는 대상이 B&W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짓을 서슴지 않는지도 보아왔다. 살인 교사까지 했다는 것은 놀라웠지만 이미 최악의 범죄조직인 카르텔과 연관이 됐고, 그들로 하여금 납치하도록 조장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담보로 돈벌이를 하려는 수작만 봐도 이미 적당선이란 게 없는 놈들인지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눈을 크게 떴다.
“그놈들에 대해 알고 있는 거냐?”
“예, 아무래도…….”
도수가 말을 이었다.
“우리 가족과는 뗄 수 없는 악연인 것 같더라고요.”
“아…….”
아버지 이찬은 침음을 삼켰다. 그때, 밖에서 미약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가 도수의 피를 뽑기 시작했다.
도수는 그가 다른 누구도 아닌 아버지였기에 순순히 협조했다.
“이제 어쩌죠?”
그 질문에 아버지가 대답했다.
“일단 난 네가 고문을 버틸 수 없다는 것을 보고할 생각이다. 널 잡아 온 걸 보면 죽이려는 게 아니야. 짐작 가는 게 있니?”
“바깥 사정을 전혀 모르시는 거예요?”
“음… 아무래도 오랫동안 여기 강금당해 있었으니까.”
“여긴 왜 오신 거예요?”
“말하자면 길다. 우리 가족을 이렇게 만든 놈들이 꾸미는 프로젝트를 쫓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되더구나. 문젠 이놈들이 먼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손을 썼다는 거지.”
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를 잡아두고 있는 것도 그때문이군요.”
“그건 내가 이곳 보스의 아내를 치료해 줘서…….”
“아뇨.”
도수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양심적인 놈들일 리가 없잖아요.”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거냐?”
“카르텔과 아버지가 말씀하신 제약회사 사이에 거래가 이뤄지고 있죠?”
“그렇지.”
“하지만 두 조직 모두 서로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할 거예요. 지금 돌아가는 밖에 상황도 그렇고요.”
“그래서 날 살려뒀다?”
“네.”
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몰래 숨겨둔 걸 거예요. 아버지를 잡고 있어야 B&W의 약점을 쥐고 있는 거니까.”
“역시… 어쩐지 이상하다 했는데. 그놈들은 내가 연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내가 밝히려는 것들을 막지 않았어. 어차피 여기서 나갈 수 없으니까.”
“맞아요. 그랬을 겁니다.”
“그럼 더 이상한 점이 있다.”
아버지가 물었다.
“너를 왜 필요로 하는 거지? 짐작 가는 바가 있니?”
“네. 아버지와 같은 이유예요. 저도 아버지와 비슷한 일을 했거든요. B&W에 대해 폭로하고 있던 참이었으니까.”
“아아……!”
아버지가 이마를 짚었다.
“왜 그런 무모한 짓을!”
“쉬이.”
조용하란 신호를 보낸 도수가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여기까지 흘러오신 것과 같은 이유예요. 그리고 전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고요.”
“뭐?”
“지금 B&W는 궁지에 몰렸어요. 당연히, 카르텔도 벼랑 끝까지 몰린 셈이죠. 하지만 진실을 완벽하게 파헤쳐서 퍼즐을 온전히 완성시키려면 한 가지가 더 필요했어요.”
“그게 뭐냐?”
“카르텔과 제약회사의 밀접한 관계를 증명해 줄 결정적 증거.”
아버지의 표정이 굳었다.
“그건 내게 있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여기 있는 건 나갈 수 없어서야. 지금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살아남는 거다. 놈들의 감시가 워낙 심해서 언제 나갈 수 있을지…….”
발소리가 점점 더 커지자 도수가 서둘러 말을 잘랐다.
“제 배 속에 추적기가 있어요.”
“추적기?”
“네. 놈들이 찾을 수 없게 삼켰죠.”
“추적기라니…….”
“조금만 버티면 저를 구하러 올 거예요. 개인경호팀, CIA, 특공대… 뭐든 간에.”
아버지는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일반적으로 한국 의사 한 명이 납치당했다고 미국에서 그 정도 대대적인 노력을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적당한 노력만으론 결코 구출될 수 없을 것이다. 도수의 말에 따르면, 이들 부자는 카르텔에게는 자신들의 목숨 줄과도 같은 존재였으니까. 두 사람을 빼앗기면 조직이 무너질 판인데 전멸하기 전까진 두 사람을 내어주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도수의 존재 가치를 잘 몰라서 하는 생각이었다. 도수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할 수 있었다.
“저를 믿고 조금만 버텨주세요. 그럼 우린 구출될 수 있어요.”
“…알겠다.”
아버지는 더 묻지 않았다. 굳이 도수의 부탁이 아니라도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야 한다. 다시 한번 아들을 잃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도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힘들게 만난 아버지의 죽음을 또다시 목격하고 싶지 않았다. 최악의 상황에서 조우했으나, 최상의 계획대로 무사히 탈출할 것이다. 도수는 그렇게 다짐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
실내에는 창문이 없었기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손발이 묶인 채 미쳐 버릴 정도로 지루하고 고된 시간이 흐른 뒤, 찾아온 것은 아버지가 아닌 평범하게 생긴 중년 남자였다.
도수는 그가 누군지 알 수 없었으나, 아버지가 시간을 끄는 데 성공했다는 것만큼은 짐작할 수 있었다.
“제법 터프한 놈일 줄 알았는데 나약한 놈이었어. 남의 몸을 돌볼 시간에 네 몸부터 돌봤어야 하는 것 아닌가?”
“무슨 말이지?”
도수가 짐짓 못 알아들은 체하자 그가 대답했다.
“자네 건강이 별로라더군. 그리고 하나 더. 겁도 없이 쓸 데 없는 일을 저지르는 것도 좋은 선택이 아니었어.”
“날 왜 납치한 거야?”
도수가 묻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너무 급하게 굴지 말라고.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내 소개부터 하지. 난 후아레스 카르텔의 보스 호세 페레스다.”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매년 수천 명을 죽이는 학살자의 모습이라기에는 너무나 평범했기 때문이다. 옆집 아저씨가 연상될 정도였다.
도수는 등골이 서늘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닥터 이도수다.”
“알고 있네.”
호세 페레스가 빙그레 웃었다.
“어떻게 자네를 모를 수 있을까… 스스로가 용감한 것 같나?”
“…….”
“영웅이라도 되고 싶은 거야?”
“그런 생각은 없다.”
“통 이해할 수가 없군. 대체 왜 남 일에 끼어들어 이 고생을 하지? 목숨이 두 개라도 되는 건가?”
“당신은 마약상이니 마약을 팔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지. 안 그래?”
“계속해 봐.”
“난 의사다. 다치거나 아픈 사람을 치료하거나 살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그렇게 환자를 치료하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거고. 나한테서 원하는 게 뭐지?”
“…….”
호세 페레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상대는 까다롭다. 그들이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신념을 가진 이들이다. 강한 신념을 가진 인간은 어떤 유혹이나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고문부터 해서 신념을 무너뜨리고 시작하는 편이 낫겠다 싶었는데, 강도 높은 고문을 몸이 못 버틸 거라는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 강도 낮은 고문을 하는 것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고민하던 그는 빙빙 돌리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때가 되면 우리가 시키는 대로 증언을 해줬으면 한다. 그것뿐이야.”
“내가 얻는 건?”
“목숨을 보장하지. 돈도 원하면 주겠다.”
“얼마를?”
“원하는 만큼.”
“…난 당신들이 마약을 만들던 말든 나설 생각이 없다. 애초에 내가 증오하는 건 당신들이 아니야. 심장성형제를 제조한 제약회사다.”
“그래서?”
“그 제약회사를 옹호하는 것만 아니라면 뭐든 협조하지. 나도 목숨은 소중해. 환자를 살리는 것과 관련 없는 일로 죽고 싶진 않다.”
호세 페레스는 예상 외로 말이 통한다고 느꼈는지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그가 원하는 것은 제약회사에서 힘을 써서 미국의 표적을 벗어나는 것뿐이다. 그 후에는 제약회사와 도수의 관계가 어찌되든 상관없었다. 물론 그렇게 된다 해도 B&W는 도수를 처리해 주길 원하겠지만, 어쩌면 카르텔에 위협이 되는 건 이제 도수가 아닌 B&W였다. 그는 어쩌면 이번 기회가 이이제독이 될 수 있다고 여기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아. 일단 이렇게 하지. 우리도 자네가 말한 제약회사 측과 얘길 좀 해봐야 해서… 조금만 여기서 지내주게. 그럼 곧 답변을 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