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
종전(終戰)
보름 후.
연구원이 도수의 방으로 찾아왔다.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는 파리한 얼굴로 결과지를 내밀었다. 이를 확인한 도수가 고개를 들었다.
“설명 부탁드립니다.”
“환자가 복용한 약물, 그러니까 B&W사에서 개발한 심장성형제는 마약과 흡사합니다.”
“어떤 점에서요?”
“해당 약물로는 어떤 병도 치료가 불가능한 것은 물론, 오히려 서서히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할 겁니다.”
“…….”
도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우려했던 바가 사실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어떤 방식으로 복용자를 죽어가게 만드는지 알 수 있을까요?”
“예. 전에 말씀하셨던 것과 일치합니다. 지속적으로 복용할 시에 통증을 가라앉히고 근육을 출혈 없이 녹여 심장 크기를 조절해 주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통증이 줄어드는 것은 마약 성분으로 인한 신경 이상 증상이며, 심장크기를 줄여주는 것도 종국에는 심장을 손상시켜 죽음에 이르도록 만들 겁니다. 게다가 중독성도 현재 시중에서 판매되는 마약 이상이니 중간에 복용을 중단하기도 쉽지 않겠죠.”
“중독성, 일시적인 통증 완화 효과, 신체에 손상을 주는 것… 모두 마약과 동일하군요.”
“그렇습니다.”
“이런 미친놈들.”
도수는 욕설을 씹어 뱉었다. B&W의 만행이 사실로 드러나자 참기 힘든 분노가 솟구쳤다. 세계 굴지의 제약회사에서 대체 왜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르는 짓까지 서슴없이 해가며 문제를 일으키는 걸까?
아직은 이해할 수 없는 행보였다.
미간을 구기고 있던 도수가 물었다.
“증언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연구원 역시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런 약물이 시중에 판매될 걸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이에 대해 알면서도 함구한다면 살인을 방관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역시 매디 보웬이 소개해 준 사람다웠다.
도수는 새삼 혼자 싸우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든든해졌다. 매디 보웬도, 연구원도, 그에게 협조하는 다른 의료진들도 아무런 대가 없이 B&W와 싸우고 있었다. 심지어 그의 환자였던 병리학자는 이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도수는 의지를 담아 말했다.
“감사합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 문제는 곧 정리될 겁니다.”
***
부검의의 동영상과 병리학자의 증언을 확보한 도수는 매디 보웬, 그리고 엘 파소에 있는 천하대병원 인력에게 각각 자료를 전송했다.
이제 남은 것은 카르텔과 B&W의 관계를 밝혀내는 것뿐이었다. 그 방법은 간단했다. B&W가 만든 심장성형제의 문제점을 터뜨린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카르텔도 움직일 것이다.
죽음보다도 미국의 감옥을 더 두려워하는 카르텔 입장에선 미국의 제약회사로 마약을 유통한 사실이 알려지는 즉시 왕처럼 군림하며 누리고 있는 모든 특권을 포기한 채 쫓기는 상황이 발생할 테니까.
따라서 도수가 다음으로 한 일은 매디 보웬을 만나는 일이었다.
“제약회사에 대해 밝힌 것들을 언론을 이용해 터뜨려야겠습니다.”
매디 보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문제는 걱정 마. 그나저나… 이 문제가 불거지면 한바탕 난리가 나겠다.”
그럴 수밖에 없다.
세계 각지의 병원들이 B&W와 거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정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집단이니 이번 일과 같은 대담한 짓을 저지를 수 있었으리라.
매디 보웬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네 할아버지의 사업도 영향을 받을 수 있어.”
천하대병원 역시 B&W의 제품을 많이 받아쓰는 병원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도수는 할아버지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도수 부모님의 죽음이 B&W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되려 B&W 한국지사장을 가까이 둔 사람이었다.
“할아버지도 모두 알고 계세요.”
“그게 정말이야? 천하대 이사장이?”
“예. 그간 묵과할 수밖에 없었던 건 몰라서가 아니라 증거가 없어서였어요. 할아버지도 이 문제가 해결되길 바라고 계실 겁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셨을 텐데.”
“그분도 의사셨으니까요.”
“…….”
매디 보웬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그럼 이제 문제는 없을 것 같고… 기사 내보낼게.”
“네.”
“네 이름도 거론될 거야.”
“알고 있습니다.”
도수 역시 각오한 바였다. 처음에는 이 일에 깊게 개입되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개입된 이상 빨리 모든 문제를 정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매디 보웬이 말했다.
“B&W에 제대로 한 방 먹일 수 있을 거야.”
***
매디 보웬의 추측은 정확했다. 기사가 나가기 무섭게 모든 방송사에서 B&W와 관련된 내용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 쉬쉬하고 있었던 곳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모두 태세 전환을 했고, B&W는 고립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B&W 역시 태세 전환을 할 수밖에 없었다.
“카르텔과의 관계를 정리해야 합니다.”
그 말을 들은 회장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일개 의사 하나도 처리 못 해서 이 지경까지 오다니.”
“…….”
“우리가 이 프로젝트에 들인 돈이 얼만 줄 아나?”
“죄송합니다.”
이번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던 B&W 사장이 고개를 숙였다.
“최대한 여파가 없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자네도 일단 일선에서 물러나는 게 좋겠네.”
회장은 이번 프로젝트와 연관된 모든 연결 고리를 끊고 한 걸음 물러날 생각이었다.
사장 역시 이번 프로젝트에 총괄이사를 맡았을 때부터 예상하고 있던 행보였다. 일이 잘못될 경우 자리를 내놓아야 할 만큼 위험성이 높은 프로젝트였다. 일이 틀어진 것은 도수 때문이 아닌 자신의 소홀한 처신 때문이라고. 그는 회사 대신 스스로를 원망했다.
“물론입니다. 카르텔 건까지만 제가 처리하고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회사 차원에서 보상할 거야. 자네가 지금껏 고생한 것에 대해 충분한 퇴직금이 지급될 걸세.”
“감사합니다.”
“천만에… 단, 이번 일을 잘 해결하는 조건이란 것은 잊지 말게.”
“예. 물론입니다.”
“자네도 알겠지만 우리 회사는 무너지지 않아.”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회사가 무너지지 않는 걸 원하고요.”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프로젝트를 우회해야 해서 유감이지만 때가 되면 다시 불러들이지. 이 프로젝트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자네니까. 이번에는 이도수 같은 걸림돌이 생기지 않도록 터를 잘 닦고 다시 해보잔 뜻이야. 어차피 이번 프로젝트는 메인이벤트를 위한 전초전일 뿐이니까. 내 말 알겠나?”
“예. 감사합니다.”
사장은 고개를 숙였다. 그는 회장이 자신이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인 것을 알고 있었다. 회장의 말에 따르면, 일단은 모든 것을 내려놔야 한다. 이번 프로젝트와 관련된 이들을 잘라내기 위해선 총대를 멜 사람이 필요했다.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사장은 끝까지 충성심을 버리지 않았다. 회장과 그가 이끄는 B&W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미국에서 제약회사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하고, 개중에도 B&W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다른 제약회사였다면 이번 사태가 일어난 순간부터 수명을 다했다고 봐야겠지만 B&W만큼은 달랐다. B&W는 미국이란 나라가 망하기 전까진 추락할 일이 없었다. 이번 심장성형제 개발에 투자를 한 것도, 심장성형제와 신약 성분을 검사하고 판매 허가를 내준 곳도 정부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
B&W가 타격을 받은 것보다 더 막다른 궁지에 몰린 것은 후아레스 카르텔이었다. 그들은 원래 하던 대로 마약을 만들고 미국으로 밀반입을 했을 뿐이지만, 이번 일은 규모가 달랐다.
그 전까지 미국이란 큰 시장에서 어마어마한 수익을 내온 카르텔이다. 이 돈으로 무기도 사고 잠수함까지 구입해 가며 멕시코 정부와 전면전을 벌여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국은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마음먹으면 카르텔을 쓸어버릴 수도 있지만 멕시코와의 국제 관계도 걸려 있을뿐더러 파고들수록 굉장히 골치 아픈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마약과의 전쟁에서도 경험했지만, 미국은 카르텔을 완전히 근절하진 못했다. 한 세력을 없애면 또 다른 세력이 자라나고, 그들은 새로운 방법을 찾아 더 교묘하게 저항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단순한 ‘마약’이 일부 중독자들이 이용하는 시장에서 횡행했다면 제약회사와의 커넥션은 미국 국민 전체를 위협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국민들은 병원도 마음 놓고 못 갈 환경에 처한다. 그동안 당연스레 이용했던 병원이나 복용해 왔던 약도 불신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비난은 허술한 정부에 쏟아질 터였다. 더불어 카르텔에 대한 적개심은 DEA요원들이나 일부 관계자들을 넘어 세계적으로 증폭될 터였다.
“망할 미국 놈들!”
카르텔 수장이 외치는 대상은 미국 전체가 아닌, 제약회사 ‘브라운&윌리암슨’이었다.
“아무 문제없을 거라더니… 의사 새끼 하나 처리 못 해서 이게 무슨 사단이야?”
“보스. 자중하셔야 합니다. 이미 기사가 나간 지금 그 의사 놈을 건들이면 불난 데 기름 붓는 꼴이 될 겁니다.”
“그 자식을 건드리지 않으면? 이 상황이 잘 무마될 거라고 보는 건가?”
“그건…….”
“이건 DEA요원 한둘 죽인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야. 미국에선 우릴 못 잡아먹어 안달 낼 거다. 벌써 특수부대를 파견했을지도 모를 일이지.”
“피하셔야 합니다.”
다른 부하가 말했다.
이번 의견은 제법 귀에 들어왔다.
따라서 후아레스 카르텔의 수장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피해야겠지. 하지만 그냥은 못 피한다.”
“…….”
“우릴 이 꼴로 만든 놈을 이대로 두고 달아날 수는 없지.”
카르텔이 무서운 점은 SNS에 욕 한 마디만 올려도 찾아와서 죽인다는 점이다. 그렇게 조성한 공포를 무기 삼아 강성한 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치안이 열악한 멕시코에 한한 일이었으나, 도수는 멕시코에 있었다. 멕시코 후아레스는 그들의 왕국이자 무법 지대였다.
“놈을 잡아와.”
“죽이지 않고요?”
“아직 의혹밖에 제기되지 않았을 때, B&W는 우리와 관계를 끊으려고 들 거다. 의혹이 사실로 되면 그놈들도 감당 못 할 일이 생길 테니까. 똥 싼 놈이 치우지도 않고 튀려는 속셈이지.”
“그렇겠죠.”
“하지만 우리가 이번에 B&W를 공격한 의사 놈을 쥐고 있으면? 그놈은 이번 사건의 열쇠가 된 놈이야. B&W는 그놈 입에서 또 어떤 얘기가 나올지 벌벌 떨고 있을 거란 뜻이다.”
개중에 똑똑한 부하가 화색을 띠었다. 그는 보스의 말에서 이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찾은 것이다.
“의사 놈을 잡고 B&W를 협박하면 되겠군요.”
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제약회사 놈들은 바퀴벌레 같은 놈들이야. 이 정도 일로 절대 망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와의 관계가 밝혀진다면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겠지. 우리가 백날 떠들어 봐야 어차피 그놈들은 부인할 거다. 당연히 미국 놈들도 우리 말을 믿진 않겠지. 하지만 그 의사 놈이 떠든다면 얘긴 달라져.”
“하긴… 미국에서도 놈은 이미 영웅이 됐다고 합니다.”
“그래. 그래서 가치가 있는 거다. 그놈은 살아 있는 증거야. 그놈을 없애줄 테니 이 문제를 무마해 달라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에 부하가 낄낄댔다.
“저들만 살려고 했을 텐데 머리깨나 아프겠군요.”
“그럴 힘이 있는 놈들이야. 우리가 여길 떠나면 어딜 가서 뭘 해먹고 살겠어? 또 우리 가족들은? 영영 우리의 고향에 돌아오지 못할 거야. 그럴 수는 없다. 휴양지에 가서 여자 궁둥이나 두드리며 살게 되던, 미국 감옥에 가게 되던… 그럴 바에는 죽는 게 나아. 무슨 수를 써서든 그 의사 놈을 잡아와라. 그놈이 우리 생명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