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저렉션-147화 (147/152)

# 147

물질이란 신비하다.

사람 몸을 매일같이 해체하는 도수마저도 모든 물질을 꿰뚫진 못했다.

시신의 심장을 뒤덮고 있는 물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물질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보단 훨씬 더 나을 것이다.

심장성형제라는 약물의 원리는 간단하다. 혈관이나 기능 손상 없이 심장을 녹여서 원상태로 만들어주는 식이었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심장이 녹아가면서 고통스럽지 않다는 것. 이로 추론해 볼 때 천천히 심장을 녹일 만큼 강력하면서도 혈관 안에선 반응하지 않는 물질. 또한 감각을 마비시키는 물질일 확률이 컸다.

심장성형제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이 과정에서 심장의 주요 기관에 타격을 주는 경우가 가끔 발생한다는 점이다. 심장성형제나 심장성형제 성분으로 추정되는 마약을 복용하고 저마다 다른 시기에 급사(急死)하는 것이 그랬다.

도수는 멈춘 심장을 덮고 있는 물질을 조심스럽게 걸러냈다.

그러자 앞에 있던 부검의가 물었다.

“왜 지금껏 발견되지 않았을까요?”

“외부에선 발견할 수 없는 약물일 겁니다. 만약 과다 복용으로 즉사하지 않았다면 전부 심장이나 혈관으로 녹아들었겠죠.”

“녹아들었다고요?”

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진작 이 약물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겁니다.”

바로 그때 부검의가 눈을 부릅떴다.

“이건… 심장이 녹았습니다.”

소량 복용할 경우 점차 심장의 표면부터 녹게 된다. 기능에는 문제를 주지 않고. 무시무시한 부작용이었지만 기막힌 반응을 초래하는 약물이긴 했다.

그걸 과다 복용 했을 때, 약물은 심장을 통째로 녹이며 치명적인 손상을 주었다.

‘이런 미친놈들.’

도수는 이 약물을 만든 놈들의 대담성에 혀를 내둘렀다. 만약 똑같이 자살하고 누군가 부검을 하는 상황이 있었다면 진즉 이 약물에 대한 의혹이 제기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좀처럼 초래되기 힘든 특수한 상황이고, 혹시라도 이 같은 상황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심장성형제’가 원인인지 밝혀내긴 쉽지 않았다. 또한 밝혀낼 방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심장성형제’가 이미 상용화되고 많이 쓰인 상태에선 ‘심장성형제’를 사용한 의사들이나 병원들이 문제가 밝혀지는 것을 꺼려 할 터였다.

이 모든 것들은 지금 상황에서도 적용되는 문제점이었다.

하지만 도수는 이 문제를 그냥 넘길 생각이 없었다.

“이 약물의 출처와 공급처가 밝혀진다면 지금 상황을 증언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입니다.”

부검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런 무서운 약물은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됩니다.”

“동감합니다. 괜찮으시다면 미리 영상을 남겨주셨으면 합니다.”

“미리요?”

“예. 아직은 약물의 출처나 공급처를 알 수 없고, 밝혀낸다 하더라도 어디서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으니까요. 직접 증인으로 참석해 주시기 어려운 상황도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부검의는 잠깐 고민했지만 아직 B&W에 대해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만약 세계 최고의 제약회사가 이 약물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말이 달라질 수도 있을 터였다. 지금이야 아무것도 현실로 다가온 문제가 없으니 양심적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직접적으로 큰 사건에 얽힐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면 대부분은 피하고 싶기 마련이다.

그래서 도수는 미리 제안했고, 부검의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게 좋겠군요.”

***

부검실로 쓴 수술방을 나선 도수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저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건 없이 전화하는 스타일은 아닌데.

“맞아요.”

도수가 말을 이었다.

“약물 성분을 분석해 줄 믿을 만한 사람을 알아봐 주셨으면 합니다.”

-있어. 취재원이었던 사람.

“기자님이라면 그런 사람을 알 거라고 생각했어요.”

도수의 말에 매디 보웬이 피식 웃었다.

-너한테 칭찬 들으니 감개무량한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지금 후아레즈야. 스토커라도 된 것처럼 자꾸 널 쫓아다니게 되네.

“자꾸 B&W와 동선이 겹치니까요.”

-정답이야. 그나저나 성분 분석 한다고 약물 성분이 나올까?

지금껏 꼬리가 잡히지 않은 약물이다.

그러나 도수는 냉큼 대답했다.

“나올 거예요. 그걸 위해 한 사람이 목숨을 내놨으니까. 그 전까진 구할 수 없었던 물질을 구했습니다. 심장이 뛰는 움직임에 반응해서 심장을 녹였어요.”

-그게 가능한 건가? 약물이 AI도 아니고…….

“심장이 뛸 때마다 몸에 여러 가지 반응이 일어나죠. 혈액이 공급되고 혈압과 체온이 오르며, 심장 자체에도 열감이 생깁니다.”

-결국 네가 말한 약물이 그런 생체 변화에 반응한다는 거야?

“제 짐작은 그래요.”

-하긴… 몇 가지 성분만 섞어도 폭탄을 만들 수 있으니까.

납득한 매디 보웬이 물었다.

-근데 왜 지금까지 그 약물을 못 구했던 거지?

“특정 생체 활동에 따라 자연스럽게 체내로 녹아들어요. 그러고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거죠. 이것도 제 추측이긴 하지만 거의 정확합니다.”

-그 사람은?

“약물을 과다 복용 해서 즉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내에 약물이 남은 거죠.”

-…누가 그런 짓을?

“B&W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병리학자였습니다.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B&W의 심장성형제 연구 개발에 참여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양심에 의한 자살… 스스로 욕심을 끊으면서까지 약물에 대해 밝혀내려 한 건가?

“우리 추측이 맞다면 B&W에서 본 게 있었겠죠.”

-오케이. 일단 알겠어. 네가 말한 사람은 알아봐 줄게.

“그런데 후아레즈에는 무슨 일이에요?”

-빨리도 묻는군.

“마약단속국 직원 말로는 이 사건과 연관된 카르텔이 저를 노리고 있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기자님도 안전하지 않다는 뜻이죠.”

-아니, 난 안전해.

“……?”

-미국 대사관이거든.

아아.

그렇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도수보다 훨씬 더 철저한 경호를 받고 있을 터였다.

새삼 기자로서 매디 보웬의 영향력을 실감한 도수가 대답했다.

“만약 제가 그 전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엘 파소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천하대병원 파견 인원들을 찾아가시면 돼요. 편지와 샘플을 보내놨습니다.”

그 한 마디가 매디 보웬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어떻게 보면 도수가 이 사건에 직접적으로 뛰어들게 된 계기도 그녀와 무관하지 않다. 그녀가 만약 도수 부모님과 이 사건과의 연관성을 찾아내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도수는 이 일에 개입하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심정을 짐작한 도수가 덧붙였다.

“…기자님 때문이 아니에요. 어차피 전 이 일에 연루됐을 겁니다.”

빈말이 아닌 확신이었다.

자꾸 B&W와 동선이 겹치고 있었다. 운명이 이리로 이끄는 것이다.

라크리마에서 수도 없이 생사의 고비를 넘기며 느낀 점이 있다. 죽을 사람은 어떻게든 죽는다. 반면 살 사람은 끔찍한 테러 속에서도 생존한다. 두려워한다고 달라질 것이 없고 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살아갈 뿐이다.

자기 자신과 평생 상관없다고 생각한 사고를 당해 병원에 실려 오는 환자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어느 날 하루아침에 누군가의 인생이 뒤바뀌는 곳. 청천벽력과도 같은 상황을 매일 직면해야 하는 것이 응급실 의사의 숙명이었다.

“고생해 주세요. 그럼…….”

전화를 끊은 도수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슬슬 이 길고도 지난한 싸움의 결말이 다가오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 싸움을 하며 마치 한 번의 대수술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수술방에서.

수술의 성패를 결정짓는 순간은 환자에게도, 그리고 의사에게도 찾아온다. 환자는 매 순간이 사투겠지만 의사에게 그와 같은 순간은 온몸이 녹초가 되고 절망이 시커멓게 덮쳐오는 순간이다.

절대 환자를 살릴 수 없다는 판단이 들고 환자의 죽음이 눈에 잡힐 듯 선명하게 보이는 순간.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은 그 찰나의 순간이야말로 환자의 생사를 결정짓는 히든타임이다.

그리고 도수에게는 이 순간이 그런 히든타임이었다. 지치지만 포기하지 않아야 하고 두렵지만 용기를 내야만 한다.

개인이 짊어지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으나, 이 순간을 견뎌야 앞으로 스러질 수도 있는 수많은 생명들을 되살릴 수 있을 터였다.

***

그 일이 있은 후 도수는 도수대로 결전을 준비했다. 엘 파소에서 받은 심장성형술 대상 환자들을 아사다 류타로의 눈을 통해 관찰했다. 아사다 류타로는 도수 못지않은 실력을 가진 흉부외과 파트의 권위자였기에 누구보다 세심하고 정확했다. 그의 보고서는 한 장, 한 장, 한 편의 논문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 수준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게 무슨 일이 일어날 듯, 일어나지 않으며 며칠이 지났을 때 매디 보웬에게서 연락이 왔다.

-대사관을 통해서 사람을 보냈어. 네가 원하는 적임자야. 후아레즈 병원과도 이야기가 됐으니 연구실을 제공해 줄 거야.

굳이 하나하나 말해주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할 일을 하는 여자였다. 아니, 기대 이상의 성과를 가져오는 능력자다.

“감사합니다.”

도수는 그 날 오후 매디 보웬이 보낸 연구원을 만날 수 있었다. 그녀가 보낸 사람답게, 해당 연구원은 도착하자마자 연구실에 들어가서 일에 착수했다.

“보름 정도는 걸릴 겁니다.”

보름.

긴 시간이었지만 맥시멈으로 이야기한 것 같았다. 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상황은 들었습니다. 만약 이 약물이 B&W와 관련이 있다면 정말 어마어마한 여파가 있겠군요.”

누구도 그 여파를 대비하거나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도수는 그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대답했다.

“하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연구원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습니다. 하지만 두려운 건 어쩔 수 없군요.”

씁쓸한 미소.

도수가 대답했다.

“선생님께 피해가 갈 일은 없을 겁니다. 완벽히 준비가 되기 전까진 일련의 과정에 대해 공개할 생각이 없으니까요.”

“…감사합니다. 당신에 대해 매디 보웬 기자님께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언제나 용감하게 앞일을 헤쳐 나간다고요. 어린 나이에 대단합니다. 이런 일에 뛰어들다니… 실력만큼 용감한 분이군요.”

도수는 공치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 역시 어쩔 수 없이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세상 대부분의 일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흐름대로 따라가기 마련이다. 도수 또한 그런 케이스였다.

라크리마에서도, 한국에서도, 그리고 지금도 남들은 칭송하고 있지만 그에게는 ‘죽어가는 사람을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이라는 단순하고도 분명한 동기가 있을 따름이었다.

“꼭 좀 부탁드립니다. 이 일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다면 환자들의 목숨뿐 아니라 제 목숨까지도 위협받을 테니까요.”

“걱정 마십시오.”

대답한 연구원은 칭찬을 받고도 조금도 거드름을 피우지 않는 도수를 새삼스레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제 입으로 얘기하긴 낯간지럽지만… 저는 이 분야에서 최고입니다. 그래서 기자님도 저를 이리로 부른 것이고요. 성분에 대해선 확실히 분석을 해두겠습니다. 가져오신 이 성분이 문제가 되든 아무 문제가 되지 않든… 성분을 밝혀내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가 문제일 겁니다.”

“…….”

누구든 결과에 따른 책임을 질 수밖에 없을 터였다. 만약 B&W의 심장성형제가 이 약물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결론이 난다면, 카르텔과 B&W가 무관하다는 결말이 나오게 되면 도수는 B&W를 의심한 데 대한 값을 치를 것이다. 어쨌든 B&W에서 생산한 심장성형제에 대해 거짓된 정보를 유포하고 다닌 셈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도수는 진심으로 자신과 매디 보웬,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만 하고 밝혀내지 못했던 의혹이 신기루였으면 하고 바랐다. 어떤 책임을 지게 되더라도 그 편이 해피엔딩일 테니까.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가진 채.

보름이 훌쩍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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