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저렉션-142화 (142/152)

# 142

삑. 삑. 삑. 삑.

환자 바이탈은 흔들림이 없었다.

도수가 가슴을 닫을 때까지, 환자는 생기를 잃지 않은 모습으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도수가 말했다.

한 걸음 떼자.

비틀.

중심이 무너졌으나 그는 간신히 몸을 가눴다.

“괜찮으세요?”

강미소가 물어왔다.

도수는 희미한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멀쩡합니다.”

체력이 크게 소진돼서 그렇다.

마치 오래 앉거나 누워 있다 일어나면 일시적인 현기증이 나는 것 같은 현상일 뿐.

몸에는 문제가 없었다.

“환자 옮겨주세요.”

그렇게 말한 도수는 수술 장갑을 벗고 수술실을 빠져 나왔다.

밖에선 수잔 제임스의 보호자인 벤 제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수술은 잘됐습니다.”

벤 제임스가 휘청거렸다. 마치 도수가 수술을 마치고 몸을 일시적으로 가누지 못했던 것처럼.

그 역시 긴장이 풀린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좀 더 지켜봐야 합니다만. 일단 생사의 고비는 넘겼다고 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아아!”

벤 제임스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가 딸을 생각하는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고맙소. 고마워요.”

뛰어난 달변가인 그조차 말을 부드럽게 이어가지 못했다. 목이 메어서 말이 턱턱 막히는 것이다.

도수는 벤 제임스뿐만이 아니라 수 많은 환자들의 보호자들에게서 이 같은 반응을 목격해 왔다. 이런 순간이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수술할 땐 냉철한 의사라도 뜨거운 심장을 가진 사람이다.

도수 역시 특별한 감흥이 생기는 건 마찬가지였다.

“일단은… 환자 곁에서 잘 돌봐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목례한 도수는 그를 지나쳐 엘 파소 병원에서 배정받은 방으로 돌아갔다. 지치는 수술이 끝났으니 잠시라도 눈을 붙일 작정이었다. 두어 시간 뒤 다시 있을 수술을 위해서라도 휴식은 반드시 필요했다.

방문을 열려는 순간.

간호사 하나가 전화기를 들고 달려들었다.

“선생님!”

“예.”

“전화 좀 받아보세요.”

창백한 안색과 잔뜩 굳은 표정.

초조함이 묻어났다.

도수는 불길한 느낌과 함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야.

“매디 보웬?”

-전화기가 꺼져 있어서.

“수술 중이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결과라도 물었겠지만.

그녀는 그조차 묻지 않고 대뜸 말했다.

-후아레즈 병원으로 와줄 수 있어?

“거긴 왜…….”

-네가 찾던 병리학자가 실려 왔다는 정보야. 총을 여섯 발이나 맞았다고…….

“예? 그게 무슨……!”

-나도 그쪽으로 가고 있는 중이야.

도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젠장…….”

-그쪽 병원 의사들은 손도 못 대고 있다고 들었어. 네가 와줘야 할 것 같아.

도수는 후아레즈 병원 의사들의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멕시코 내, 미국과 연결되는 국경 인근에 위치한 병원이다. 후아레즈 상황을 고려할 때, 엘 파소보다 훨씬 많은 총상 환자들이 매일같이 들이닥칠 터.

그들이 손을 못 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환자가 위급하다는 뜻이다.

“최대한 빨리 가볼게요.”

-알겠어.

뚝.

메디 보웬이 전화를 끊었다.

도수는 그 즉시 발길을 돌려 정영구에게 찾아갔다. 정영구는 병동에서 환자 진료를 보고 있었다.

“잠시 저 좀 보시죠.”

정영구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환자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진 않았다. 함께 병실 밖으로 나온 후에야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주치의로서 담당 환자를 보고 있던 중이었다. 그 상황에 난입한 것은 도수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엘 파소 병원에 마땅한 인맥이 없는 도수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죄송합니다. 후아레즈 병원으로 지원을 갈 수 있을까 해서요.”

“후아레즈?”

정영구는 전혀 예상치 못한 얼굴로 되물었다.

“거긴 왜?”

“총알을 여섯 발이나 맞은 환자가 있습니다. 전혀 손을 못 대고 있는 상황이고요.”

“그쪽에서 지원 요청을 했던가?”

“아닙니다.”

“아니면 그쪽에 의사가 없어?”

“그것도 아닙니다.”

“그쪽에서 지원 요청을 하고 우리 병원으로 트랜스퍼를 한다고 해도 절차란 게 있는데, 아무런 요청이 들어오지 않았는데 그 환자 살리자고 후아레즈로 넘어가겠다는 거야?”

정확이 이해하고 있었다.

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냥 환자가 아니었다. 후아레즈 병원에서 손도 못 대고 있는 환자다. 더불어 B&W의 핵심적인 정보를 물고 있는 장본인. 어쩌면 이번에 총격을 당한 것도 이 일과 연관이 있을지 몰랐다.

그러나.

“안 돼.”

정영구는 칼같이 대답했다.

“네 멋대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내가 힘쓴다고 해도 들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도수는 주머니 속에 보관해 둔 시계를 꺼내보았다. 정확히 언제 실려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차로 국경을 넘으면 골든아워 내에 도착 못할 확률이 컸다.

결국 헬기를 이용해야 한다는 뜻.

“부탁드립니다.”

도수가 초조하게 말하자 정영구가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일로 헬기를 움직이려면 최소 과반수 이상의 과장급 인사의 허가가 필요해.”

“다른 방법이 없겠습니까?”

“…….”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정영구가 대답했다.

“외상센터 당직 교수가 허가만 해주면 가능한데 오늘 당직이…….”

그의 얼굴색이 변했다.

도수는 그 표정에서 방법이 생겼다고 확신했다.

“당직이 누굽니까?”

“흉부외과 과장.”

“……?”

도수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정영구는 알고 있다. 흉부외과 과장이 도수를 적극적으로 도우려 한다는 것도.

‘공교롭게 됐군.’

정영구는 흉부외과 과장의 말을 기억했다. 폭풍이 몰려오고 있으니 이제부터라도 줄을 잘 서라는 말을.

“…어쩌면 방법이 있을 것도 같다. 내가 한번 말해보마.”

도수는 정영구의 얼굴을 살폈다. 적극적으로 설득해 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전혀 생각이 없었다면 애초에 방법을 제시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도수는 그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황상 어느 정도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어차피 믿는 것밖에 선택지가 없기도 했다.

“기다리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정영구는 지체하지 않았다. 환자가 위급하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고, 어차피 진행할 일이라면 미뤄서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환자에게 시간은 금이다.

정영구는 그 시간을 지키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곧바로 핸드폰을 들어 흉부외과 과장에게 전화를 넣었다.

“접니다.”

상대가 무어라 대답했고, 정영구는 도수가 말한 대로 상황을 설명했다.

도수의 표정에 안도감이 맺히고.

정영구가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정영구가 도수를 쳐다봤다. 도수는 다시 시간을 내려다봤다. 그 모습을 빤히 응시하던 정영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준비해서 출발해라.”

“알겠습니다.”

도수는 기다렸다는 듯 움직였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정영구가 고개를 내저었다.

“무시무시한 추진력이로구만.”

그러니 사건 사고마다 현장에 나타나서 제 한 몸 던져가며 환자를 구했던 거겠지.

도수를 직접 만나게 된 후, 한동안 짬시간에 도수에 대해 조사해봤던 정영구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도수는 완전히 상식 밖의 존재였다.

그리고 환자에 대한 그의 열정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조사하는 것만으로도 흥미진진하고 가슴이 뛸 정도이니, 그의 삶이 얼마나 파란만장한지 추측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조용하던 이곳 엘 파소도 도수의 등장과 함께 태풍의 눈이 되고 있었다.

“…피곤한 인생이야.”

정영구는 최대한 엮이고 싶지 않았다.

이미 엮여 버렸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는 그였다.

***

도수는 응급실로 가서 천하대병원에서 온 의료팀을 소집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출동 준비 해주세요.”

그 말에 강미소가 물었다.

“출동할 인원은요?”

“저만 갑니다.”

강미소가 고개를 저었다.

“저도 갈게요.”

“저도 가고 싶은데요.”

아사다 류타로가 거들었지만.

도수는 두 사람의 열의를 받아주지 않았다.

“아닙니다. 두 분은 여기 남아주세요.”

강미소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어디 가시는데요……?”

“후아레즈로 갑니다.”

“멕시코요?”

“네.”

“하지만…….”

그녀는 보이드 파스칼이 도수에게 했던 말을 상기했다. 그는 도수의 안전을 걱정하며 증인 보호 프로그램에 넣어주겠다고 약속했다.

마약상들이 노릴지도 모르는 이런 상황에 멕시코로 가겠다니?

“…너무 위험해요. 차라리 환자를 이쪽으로 옮기는 게…….”

“총알을 여섯 발이나 맞은 환잡니다. 수술도 못 들어가고 있어요.”

옮기다가 사망할 확률이 크다는 뜻이다.

최대한 움직임을 줄이고 출혈을 막아야 한다.

그렇게 시간을 벌고, 도수가 최선을 다해 수술해도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중태일 것이다.

“하지만…….”

“항상.”

도수가 입을 뗐다.

“우린 항상 목숨을 걸고 현장에 뛰어들었습니다. 기억하죠?”

“…예.”

“그때도 환자가 죽어가고 있어서 그랬었고, 지금도 환자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가겠다는 거다.

이렇게까지 말하면 아무도 막을 수 없다.

강미소가 말했다.

“그러니까 저희도 데려가세요.”

“맞습니다. 그쪽 병원 사정이 어떤지도 모르는 것 아닙니까?”

아사다 류타로는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지난 수술 이후 다시 한번 도수의 실력을 확인하고 싶었다. 매번 수술방에 들어갈 때마다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발전하는 게 아니라 원래 수술마다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걸 지도 몰랐다. 그러니 강미소나 다른 팀원들이 목숨 걸고 도수의 수술을 들어가고 싶어 하는 걸 테고.

그러나 도수도 이번만큼은 확고했다.

“그래서 더 함께 갈 수 없습니다. 그쪽 병원 사정을 모르니까요. 전 엘 파소에 친한 사람이 없어요. 다시 말해 엘 파소에서 제 안전을 생각해 주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뜻입니다. 두 분은 여기 남아서 제 안전을 걱정해 주세요. 무슨 일이 생겨도 그 편이 나을 겁니다.”

“…….”

그래도 걱정하는 이들.

미소 지은 도수가 말했다.

“너무 걱정은 마세요. 이근육 요원을 데려갈 겁니다.”

그때서야.

강미소와 아사다 류타로도 어느 정도 마음을 놓았다.

“알겠어요.”

“조심하십시오. 선생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심장성형술을 기다리고 있는 이쪽 환자들도 다 죽은 목숨이란 걸 잊지 마시고요.”

과격한 말투.

도수는 그 어조가 걱정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럼 아사다 선생이 수술하면 될 것 아닙니까. 몇 번 같이했잖아요?”

“나 원…….”

아사다 류타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큰 수술을 몇 번 보고 따라 할 수 있었다면 전 세계 사람들이 심장질환으로 사망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멀쩡하게 돌아와서 또 보여주세요. 몇 번 더 보여주면 제가 더 잘할 수도 있을 테니까.”

“기대하죠.”

그렇게 대답한 도수는 두 사람이 챙겨주는 장비를 입고 든 채 이근육을 데리고 헬기장으로 나갔다.

타타타타타타타타!

헬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구조대원 한 명이 뛰어오더니 외쳤다.

“탑승 규칙에 대해 잘 모르실 테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탑승은…….”

이근육이 입술에 검지를 붙이며 씨익 웃었다.

“닥터 리를 잘 모르시는군! 바로 출발합시다!”

“예?”

구조대원이 당황하는 사이.

도수는 이미 헬기에 올라타고 있었다. 보통 처음 헬기를 타는 사람들은 프로펠러가 일으키는 강력한 바람에 크게 놀라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럽게 굴기 바쁜데 도수는 제 집 드나들 듯 헬기에 올라탔다.

뒤에 벙 찐 채 서 있는 구조대원을 돌아본 그가 손짓하며 외쳤다.

“빨리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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