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
며칠 후.
확장성 심근병증 환자가 처음으로 찾아왔다.
도수는 짧은 시간 내에 스스로 실력을 증명한 상태.
지난 일들로 병원 내에서 위상이 자연스레 올라간 그는 팀을 꾸리고 수술장을 세팅했다.
자신을 존 맥케넌이라고 밝힌 확장성 심근병증 환자가 도수에게 말했다.
“전 평생 이 병을 달고 살았습니다. 아니, 사실 이 병이 있는지도 몰랐죠. 그런데 청천벽력인 게 증상이 나오기 시작하면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얼마 전부터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전 지금 너무 괴롭습니다.”
“…혼자 오신 건가요?”
“그렇습니다. 아내나 아이들은 이 사실을 모릅니다.”
도수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가족분들께 알리셔야 합니다.”
“전 현재 이혼소송 중이에요. 아내가 모르게 수술을 받고 싶습니다.”
“…….”
도수는 그가 왜 아내나 아이들에게 말하지 않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갈라서기로 한 이상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동정받고 싶지도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의사는 상담에 있어서 내담자에게 너무 과몰입하면 안 된다. 현실만을 직시해야 한다.
그래서 말했다.
“큰 수술입니다. 모든 수술이 그렇겠지만, 수술 결과를 장담할 수도 없고요.”
“…….”
“말씀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그래야, 가족분들도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도수는 의자에 앉으며 그와 눈높이를 맞췄다.
“저도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한 번이라도 더, 조금이라도 더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항상 했습니다. 아니, 지금도 종종 합니다.”
“…….”
“만에 하나라도 선생님이 떠나시게 되면, 남는 사람들은 평생 잊지 못할 후회를 안게 됩니다. 그래도 말씀하지 않으실 건가요?”
그 순간.
존 맥케넌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한참 동안 흐느끼던 존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렇게… 힘든 수술인가요? 전 죽을 확률이 더 큰 겁니까?”
“아뇨.”
도수는 고개를 저었다.
“저희 팀이 최선을 다해 선생님을 치료할 겁니다. 하지만 치료에 있어서 백 퍼센트란 건 없어요. 우리 몸은 미지의 영역입니다. 단지 그뿐입니다.”
“정말입니까? 정말 그것뿐인 겁니까?”
“예.”
도수의 어조는 확고해서, 존 맥케넌은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도수의 손을 덥석 붙잡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가족들한테 알리겠습니다. 하지만 꼭 살려주셔야 합니다. 가족에게는 제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요.”
그것이 두려웠으리라.
자신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게 될까 봐.
그리고 그 모습을 보여주며 세상에 더 큰 미련을 남겨둘까 봐.
그렇다고 해도 외면해선 안 된다.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견디는 편이 평생을 후회란 고통 속에 사는 것보단 낫기 때문에.
도수는 그 후회를 직접 경험해 봤기에 환자한테 알리는 쪽을 권한 것이다.
그는 존 맥케넌과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최선을 다할 겁니다.”
***
이후로도 확장성 심근병증 환자들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도수는 수술 일정을 잡았다. 병의 진행도가 더 빠른 사람부터.
그러나 반발이 있었다.
“센터장님. 환자들이 왜 바로 수술 들어가지 못하냐고 컴플레인을 걸고 있어요.”
“…….”
다들 급할 것이다.
자기 자신이 우선일 터였다.
그건 당연한 거다.
하지만 도수 입장에선 모두 같은 환자고, 모두 중요한 환자였다. 수술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선 수술 순서를 조율해야만 했다. 확장성 심근병증에 필요한 심장성형술을 할 수 있는 의사가 도수밖에 없기에 동시에 수술하는 건 불가능했다.
“제가 얘기하죠.”
“가장 크게 반발하는 환자는 수잔 제임스예요. 이십칠 세 여자 환자고 미국 상원의원 벤 제임스의 영애입니다.”
강미소의 말을 들은 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 상원의원이라면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 인물의 딸이 컴플레인을 걸었으니, 엘 파소 병원에서 난리가 나도 이상하지 않다.
“알겠습니다.”
도수는 VIP 병동으로 올라갔다.
수잔 제임스, 그리고 상원의원 벤 제임스가 병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벤 제임스는 도수를 보자마자 말했다.
“얼굴 보기 힘들군요.”
“환자가 갑자기 몰렸습니다.”
도수가 가볍게 목례하며 말하자 벤 제임스가 미간을 좁혔다.
“나와 우리 가족을 이런 식으로 대우하는 병원은 없소.”
“저는 의사고, 모든 환자들을 동등하게 대해야 합니다.”
도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정론을 말했다. 그 태도가 벤 제임스의 심기를 건드렸다.
“내가 원하는 건 간단해요.”
그가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수술 순서에 있어서 내 딸이 우선이 되야 할 겁니다.”
그러나 도수는 고개를 저었다.
“불가합니다.”
“어째서?”
“따님은 병의 진행도가 느린 편입니다. 아직 증세가 나타나지도 않았고요. 그보다 더 위급한 환자들이 많습니다. 더구나 그들이 따님보다 먼저 찾아왔고요.”
“부모의 심정을 아시오?”
“…….”
“난 자식을 위해 모든 걸 할 수 있어요. 내 의원직을 걸고 말입니다.”
벤 제임스는 빈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도수는 그의 말투와 표정에서 그 같은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도수의 입장은 완고했다.
“이렇게 하죠.”
그가 수잔 제임스를 일별하고 덧붙였다.
“저 역시 의원님의 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환자를 반드시 살려야 하는 사명을 가진 의사입니다. 그러니 따님이 회복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
“선생은 분명 사명감 있는 의사예요. 그걸 모르지 않으니 먼 길 찾아온 겁니다. 나 역시 국민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니 선생의 마음을 공감합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잘 알 수 있어요. 선생이 가진 사명감은 결코 부모의 마음만큼 간절하지 않습니다.”
위험 발언이었다.
그 스스로 국민을 자식같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니.
국민을 생각하는 마음보다 내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훨씬 깊고 크다는 의미다.
“…….”
“내가 얼마나 간절한지 아시겠소? 오늘 선생과의 대화가 순조롭게 이뤄지지 않는다면 난 엘 파소 병원을 통해 내 딸을 수술 받게 할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못내 불안한지 덧붙였다.
“의사란 사람이 환자를 허투루 수술하진 않겠지. 만약 과정 중 미비한 부분이 발생하거나 어떤 사고라도 생긴다면 그 책임은 선생이 져야 할 거예요. 내 모든 걸 걸고 약속하겠소.”
“아빠.”
수잔 제임스가 벤 제임스의 팔을 잡았으나, 벤 제임스는 딸에게 말했다.
“가만히 있어라. 내가 알아서 하마.”
“…예.”
도수는 부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궁지에 몰렸을 때 대부분 두 가지 태도를 취한다.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상대를 설득하거나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상대를 압박하거나. 그건 라크리마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곳 미국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러니 같은 병을 가진 환자라도 부유층의 생존률이 저소득층보다 훨씬 높은 것이다.
대부분의 의사들 또한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인다. 받아들이지 못하면 도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도수는 달랐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터였다.
“말씀하신 게 맞습니다.”
도수의 말을 들은 벤 제임스의 얼굴에 ‘그럼 그렇지’하는 표정이 떠올랐지만.
도수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전 환자를 허투루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환자든 그건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마약상이든 교황이든 같은 잣대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그 결과에 대한 책임 또한 언제나 감수하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책임을 회피할 생각이라면 전 그 순간 메스를 내려놓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의원님의 말씀은 제 결정에 어떤 영향도 줄 수 없습니다.”
“무슨 뜻인지?”
“제게는 상원의원님의 따님도, 쓰리디 직종에 몸담고 있는 환자도 모두 똑같은 환자라는 말입니다. 의원님께서 엘 파소 병원을 통해 저를 압박하셔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지금 내게 결정을 바꾸지 않을 거다 통보를 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도수는 조금도 태도를 바꾸지 않고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의원님은 아버지로서 따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십시오. 엘 파소 병원에 이야길 하든 어떤 다른 수단을 쓰든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저 또한 의사로서 제 신념을 지킬 겁니다.”
“……!”
벤 제임스는 적잖이 놀랐다. 지금껏 상원의원직에 오르고 나서 어딜 가든 자신에게 이런 대응을 하는 상대는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수잔 제임스는 뒤에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 또한 아버지한테 이런 식으로 나오는 상대는 처음 보았다. 평생 처음 겪는 상황이었다.
‘…대단한 사람이야.’
그런 생각이 표정과 눈빛에서 묻어났다. 분명 자신이 우선적으로 치료받을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왜 그런 태도 때문에 더 신뢰가 가는 걸까?
그녀는 아버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빠. 더 이상 설득하는 건 무의미한 것 같아요. 조금 더 기다려 봐요. 아직은… 괜찮아요.”
“그럴 수 없다. 네 병에 대해 똑바로 알기는 하는 거니? 언제 증세가 나타나면서 심장이 멈춰도 이상하지 않단다. 내가 어떻게 손 놓고 두고 보란 말이냐. 그렇게 고통스러운 상황은 네 병을 알게 되었던 지난 몇 년이면 족하다.”
도수는 그가 B&W의 ‘심장성형제’를 복용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일단 수잔 제임스의 상태를 투시력으로 보면서 직감했고, 그 생각은 지금 확신으로 변하고 있었다. 상원의원의 딸이 확장성 심근병증을 앓고 있는데 B&W에서 치료약을 제공하지 않았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도수는 고개를 흔들며 그 같은 잡념들을 털어냈다. 지금 중요한 건 눈앞의 환자를 대하는 데 집중하는 것뿐.
도수는 벤 제임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자신이 아버지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지 모른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어떻게든 딸을 위험에서 구하는 일일 테니까.
도수가 입을 뗐다.
“…어쨌든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하나뿐입니다. 최선을 다할 겁니다. 제 모든 걸 걸고 따님을 치료할 겁니다.”
“…….”
벤 제임스는 도수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기다리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심장성형술’을 할 수 있는 건 도수뿐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수술할 수 있는 사람이 도수 한 명뿐이라면 어떤 협박을 하든 아쉬운 쪽은 자신이라는 것을, 셈에 능한 정치인인 그는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약속해 주시오.”
“…….”
“내 딸을 살려주겠다고. 건강한 모습으로 되돌려 주겠다고.”
대개, 도수는 환자한테 결과에 대해 함부로 약속하지 않았다. 그건 신의 영역이지 일개 의사가 관장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 환자나 보호자가 바라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그들의 마음을 끔찍한 고통 속에서 잠시라도 구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의사들은 함부로 약속할 수 없다. 약속하는 순간 책임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환자를 잃는 순간 심리적 안정감과 절제력을 완전히 잃은 보호자들을 마주할 때가 있다. 그런 상황에서 보호자들은 물불 가리지 않는다. 책임을 전가할 누군가를 찾고, 원망할 누군가를 찾게 된다. 만약 의사가 ‘약속’을 했다면 모든 독박을 뒤집어쓰는 건 의사가 될 터였다.
그러나 도수는 말했다시피 책임이 두렵지 않았다. 환자나 보호자가 진실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잠시나마 고통 속에서 벗어나길 바란다면, 도수의 한마디로 인해서 잠시나마 불안감을 덜어낼 수 있다면 기꺼이 의사로서의 책임 정도는 내어줄 수 있다.
“약속하겠습니다. 제임스 양은 반드시 건강을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
도수의 대답을 듣고서야 눈을 질끈 감은 벤 제임스가 말했다.
“…모든 걸 선생께 맡기겠소.”
도수는 가슴 한편이 묵직하게 저며왔다. 그가 감당해야 할 것은 수잔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찾아온 환자들, 또 앞으로 찾아올 환자들 모두 그에게는 모든 것을 걸고 반드시 회복시켜야 할 환자들이다. 그들을 수술해서 성공했을 때 얻을 영광 따위는 지금 느끼는 압박감에 의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나서지 않으면 환자들은 모두 절망감에 휩싸여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할 터였다.
어쩌면 환자들의 절망을 일정 부분 함께 짊어져 주는 것.
그 또한 사람을 살리는 의사로서 감수해야 할 의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대가로 도수가 얻는 것은…….
누군가를 되살리고 그의 삶을 되찾아주었다는, 돈이나 말로는 결코 환산할 수 없는 가치일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