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
짐승들의 도시
“여긴 뭐죠? 설마 우리 숙소는 아니겠죠?”아사다 류타로가 입을 쩍 벌리고 물었다.
강미소 역시 놀란 표정이었다.
“우리 특급 패키지나 이런 걸로 온 게 아닌데.”
그러자 빙그레 웃은 이근육이 말했다.
“경호를 맡게 된 후 미국 연수를 계획하는 천하대병원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러던 중 오성그룹에서 후원을 했고, 보시다시피 이런 숙소가 마련된 겁니다.”
도수는 이번 연수 계획을 최종 검토한 장본인이기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생각보다 사이즈가 크네요.”
그것으로 끝이었다.
대신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경호 인력이 생각보다 많이 배치된 것 같은데.”
“맞습니다.”
고개를 주억거린 이근육이 말을 이었다.
“우려하실 만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산 내에서 신경 좀 쓴 것이니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와 함께 군생활을 했던 친구들이라 믿을 만합니다.”
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미국은 대통령인 케네디도 암살된 나라니까.
B&W 정도 되는 세계적인 제약회사와 척을 진 이상 안전에 신경 쓰는 것은 당연했다.
저택에 짐을 푼 뒤, 도수가 인원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우린 바로 병원으로 이동할 겁니다.”
이근육이 말했다.
“경호 인력이 같이 움직일 겁니다.”
도수는 거부하지 않았다.
“소란 떨어서 좋을 건 없으니 최소 인력만 함께 움직이죠.”
“예. 미리 준비해 뒀습니다. 저는 의료봉사 경력을 인정 받아 병원 근무자로 등록했고, 몇몇 인원들은 청소부나 보안요원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이근육은 경호 인력의 사진이 들어가 있는 문서를 넘기고 덧붙였다.
“보시다시피 모두 한국인입니다. 한국인이 아닌 누군가가 경호원을 사칭해 접근한다면 의심하시는 게 맞습니다. 밀착 경호는 의료 활동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할 생각이니 개의치 않으셔도 됩니다.”
일사천리였다.
상황 설명이 끝나자 도수가 말했다.
“그럼 바로 출근하죠. 엘 파소 병원에 대한 브리핑은 가는 길에 해드리겠습니다.”
인원들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을 끝으로, 그들은 대형 지프를 타고 병원으로 출발했다.
***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도수가 입을 뗐다.
“엘 파소 병원은 멕시코 후아레스 병원과 결연 관계입니다. 그렇다 해도 정말 응급한 환자들이나 고위 인사들을 헬기로 이송하는 것을 제외하면 국경을 사이에 둔 멕시코와는 다른 세상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군사 주둔지가 많은 것 빼곤 미국의 다른 지역과 다를 게 없단 소리죠. 많이 긴장하셨겠지만 크게 위험한 지역은 아닙니다.”
아사다 류타로가 피식 웃었다.
“카르텔 보스 은신처 같은 곳을 숙소로 잡아놓고 그런 말씀을 하시니 마구마구 믿음이 갑니다.”
도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다음. 엘 파소 병원 체제에 말씀을 드리면 국내 병원과 좀 다릅니다. 먼저 외과는 ‘일반외과’ 하나. 따로 분과가 없습니다.”
“텍사스 내 모든 병원이 그런 건가요?”
“병원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도수가 말을 이었다.
“물론 각자 전공하는 분야별로 수술이나 진료를 담당하긴 하지만 ‘일반외과’에 흉부외과, 신장외과, 정형외과, 신경외과를 포함한 모든 외과가 통합된 겁니다. 한국으로 치면 다른 과 수술에도 참여할 수가 있는 거죠. 집도의 실력만 되면 모든 과 수술을 해볼 수도 있는 거고.”
그 말에 강미소는 신이 났다.
“이시원 선생이 알면 엄청 부러워하겠네요. 모든 수술을 해볼 수 있다니… 그걸 알았으면 온다고 했을 텐데.”
“그런 이유로 왔다면 실망했을 겁니다.”
정말 오고 싶었다면 그 정도는 스스로 조사해 봤을 것이다. 만약 텍사스까지 와서 의료 활동을 하는 것에 망설일 이유가 있다면 오지 않는 것이 맞다. 이곳 생활에 불만이 생기면 한국이 그리워질 테니까.
도수는 설명을 계속했다.
“그 외에 실질적인 부분에서 엘 파소 병원이 어떤 문화가 있는지, 어떤 장단점이 있는지는 직접 겪어봐야 합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예요.”
강미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되네요. 미국은 어떨지.”
“외과시스템 자체는 한국이나 일본보다 자유분방한 것 같군요.”아사다 류타로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거들었다.
그러나 두 사람과 달리 도수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학병원도 라크리마보다 훨씬 상황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시설만 훌륭할 뿐 오히려 의료 활동을 하는 데 불편한 점이 더 많았다.
각자 다른 생각을 하는 그때.
차량이 엘 파소 병원 앞에 도착했다.
부지 규모는 천하대병원보다 넓은 반면 건물 규모는 훨씬 작았다.
고층도 아닌 데다 한눈에 봐도 지어진 지 오래된 건물들.
천하대병원의 삐까번쩍한 대리석 건물들에 비하면 초라해 보일 지경이었다.
이런 곳이 텍사스 병원들 중 첫 손가락에 꼽힌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엄청 작네.”
강미소가 중얼거렸다.
아사다 류타로는 예전에도 미국 병원의 시설을 접해볼 기회가 있었는지 찬찬히 설명해 주었다.
“쓸데없는 데 예산을 쓰지 않는 겁니다. 겉보긴 이래도 수술실이나 의료 기기들은 최고를 쓸 거예요. 헬기도 하루에 몇 번씩 뜨는 걸로 알고 있고요.”
“실용적인 데 돈을 쓴다는 거네요.”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겉모습만큼이나 평범한 로비를 지나서 응급실로 갔다.
총을 맞은 환자들이 다섯이나 피를 흘리고 있었다.
한국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케이스의 환자다.
도수는 일행을 대표해 차트를 확인하고 있는 의사에게 물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한국의 천하대학병원 소속 의사들입니다. 혹시 닥터 정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의사가 응급실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 저분이 닥터 정입니다.”
“감사합니다.”
“천하대병원에서 왔다니 환영입니다. 닥터 정은 우리 병원에 없어서는 안 될 최고의 써전이에요. 안 그래도 인력이 달리던 참이었는데 감사합니다.”
밝은 사람이었다.
도수가 말했다.
“별말씀을. 또 뵙죠.”
짧게 목례한 도수는 일행들을 데리고 닥터 정에게로 갔다.
정영구.
이사장의 아들이자 도수에게는 작은 아버지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평범한 외모를 가진 오십 대 아저씨였다. 짧은 머리를 뒤로 넘긴 깔끔한 인상을 상상했는데 까치집을 얹은 푸석한 헤어스타일에 지저분한 수염을 달고 있었다.
“누구?”
그가 묻자 도수가 대답했다.
“천하대병원 중증외상센터장 이도수입니다.”
“아, 그 친구로군.”
정영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얘긴 많이 들었다. 큰아들에게도, 작은아들에게도, 아버지에게도.”
그는 일행 눈치를 보곤 굳이 가족관계를 털어놓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이쪽으로 오지.”
도수는 그를 쫓기 전, 그가 방금까지 치료하고 있던 환자를 확인했다.
샤아아아아아아.
투시력을 쓰자.
환자의 몸속이 한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훑어보니 뇌수술을 한 것 같았다.
수술 흔적만 봐도 솜씨를 유추할 수 있었다.
‘듣던 대로…….’
대단한 써전이다.
도수와 비교해도 크게 꿀릴 것이 없을 정도로 수술 흔적이 깔끔했다.
잠시 환자에게 시선을 뒀던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연구실로 움직인 그들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정영구가 한쪽에 나있는 문을 보며 말했다.
“장난치지 말고 이리 나와라.”
그러자 뜻밖의 사람이 등장했다.
“어?”
강미소가 놀라고.
도수 역시 눈을 치떴다.
“정영훈?”
“아이고 센터장님. 아무리 그래도 정영훈이 뭡니까?”씨익 웃는 정영훈.
아사다 류타로는 돌아가는 상황을 몰라 멀뚱멀뚱 지켜보고 있었다.
도수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온 겁니까?”
“이사장님께 허락을 맡았습니다. 우리 병원의 보석, 센터장님을 잘 보필하라는 특명도 받았고요.”
“…….”
정영훈이 아버지 정영구에게 말했다.
“아버지도 아실지 모르겠지만 여기 이도수 선생은 현재 천하대병원 외상외과, 흉부외과, 신경외과 통틀어서 가장 유능한 써전입니다.”
정영구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자중해라. 언행이 가벼운 건 여전하구나.”
그가 그렇게 얘기한 것은 도수를 ‘천하대병원에서 가장 유능한 신경외과의’로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장남 정영록이 가장 유능한 신경외과의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정영구는 이를 내색하지 않고 도수 일행을 바라봤다.
“이도수 선생이 책임자라고?”
“그렇습니다.”
“중증외상센터장이라고 들었는데 흉부외과나 신경외과 수술도 하는 건가?”
“예.”
“미안하군. 이슈가 됐을 텐데 워낙 경황이 없어서 전혀 몰랐어. 다른 곳도 마찬가지겠지만 여긴 전쟁터다. 다른 세상이지.”
“그런 것 같더군요.”
도수는 응급실에서 봤던 환자들을 떠올렸다.
고개를 주억거린 정영구가 물었다.
“그럼 간담췌도 전공한 건가?”
“전공한 것은 아닙니다만 수술 경험은 다수 있습니다.”
“간담췌 전공의도 아닌 사람한테 수술을 맡겨?”
“특수한 상황이었습니다.”
“설명해 줄 수 있겠나?”
“병원에서 치료를 중단한 환자였고 환자가 제게 수술 받기를 원했습니다. 이사장님께서는 제 경력을 인정해 주시고 수술을 맡기신 겁니다.”
“흠.”
정영구는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이었지만 가타부타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대신 차트 하나를 휙 던졌다.
턱!
차트를 품에 안은 도수가 물었다.
“뭐죠?”
“실력 좀 보자.”
정영구가 말을 이었다.
“차트 보면 알겠지만 췌장암 삼 기 환자다. 네가 해봐.”삼 기면 말기에 속한다.
쉽지 않은 수술을 너무 쉽게 맡긴 정영구가 덧붙였다.
“내가 수술하려던 환자야. 난 신경외과의지만 간담췌 파트를 함께 전공했다. 외상외과 수술도 자주 하고 있지. 네가 내가 보는 앞에서 이 환자를 살린다면 나 역시 이사장님처럼 널 인정하고 의지하겠다.”
“실패하거나 버벅거리면요?”
“보조로서도 실격이다. 돌아가면 된다.”
거기까지 이야길 듣고 있던 정영훈이 못마땅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아버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정영구가 인상을 썼지만 정영훈은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 녀석이 얼마나 대단한 실력을 가진지 모르고 하시는 말씀 같은데 센터장 부임한 지 며칠 만에 우리 병원을 발칵 뒤집어놓은 실력파라구요. 이 나이에 센터장으로 부임한 것도 말이 안 되는데 오자마자 콧대를 박살 내놨다니까요?”
“그 입……!”
정영구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란 녀석은 한국에 있을 때나 지금이나 입만 놀릴 줄 알지.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러니까, 저랑은 다르다고요. 뉴스도 안 보십니까?”
정영훈이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그러나 정영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내가 광대 같은 녀석 수술 영상이나 찾아볼 정도로 한가한 것 같으냐?”
“사람 면전에 대고 광대라니……!”
강미소가 흥분하는 그때.
도수가 차트에서 눈을 떼며 고개를 들었다.
“하죠. 수술.”
“그래. 넌 좀 낫군. 그러니 리더겠지만.”
정영구가 시계를 보고 말을 이었다.
“수술은 오후 여섯 시다. 세 시간 남았으니까 천천히 준비해도 될 거야.”
“그러죠.”
“나가봐라.”
도수는 목례하고 연구실을 나섰다.
밖으로 나와 연구실 문을 닫은 강미소가 말했다.
“뭐 저런…….”
말을 잇다 말고 입을 닫는다.
그래도 아버진데, 쫓아 나온 정영훈의 굳은 표정이 신경 쓰인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비난은 정영훈의 입에서 나왔다.
“후,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좀 달라졌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형처럼 재수 없고 여전히 자기밖에 모르시네. 콩가루 집안이지?”
“그래도 정영훈 선생님은 정상…….”
말을 멈춘 강미소가 정정했다.
“…그나마 정상과 가까우셔서 다행이에요.”
“꼭 이런 상황에서조차 현실적이어야 하나?”
“위로는 거짓이면 안 되니까.”
강미소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피식 웃은 정영훈이 고개를 저었다.
“이것 봐. 아무도 긴장하지 않는 거. 아들이 아버지 망신당하지 마시라고 충언을 올린 거구만 핀잔이나 듣고…….”
이를 보던 도수가 말했다.
“차라리 잘됐습니다. 실력을 인정받을 기회가 빨리 오면 좋죠.”
어차피 앞으로 부딪쳐야 할 난관이라면 여러 번 부딪치는 것보다 한 방에 크게 부딪쳐서 무너뜨리는 게 낫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덜 피곤한 법이니까.
도수가 입을 열었다.
“수술 준비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