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엘 파소
며칠 후.
도수는 격무에 시달리고 있는 중증외상센터 인원들을 일일이 면담하는 시간을 가졌다.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김광석이었다.
“김 교수님. 저는 엘 파소로 갑니다.”
“미국……?”
“네, 그렇습니다.”
김광석은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언젠간 더 큰 세상으로 나갈 줄 알았지.”
“한국의 의료 수준도 세계 어느 나라 못지 않죠.”
“의료 수준이란 건 ‘어디가 낫다’고 분별할 순 없으니까. 하지만 여러 나라의 시스템을 경험해 보는 건 분명 큰 공부가 될 거야. 나 역시 해외에서 근무를 했었고, 그때 보았던 의사로서의 사명감이 내 인생에 큰 귀감이 됐다. 해외에선 일반외과에서 간담췌를 전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증외상센터에 자원했던 것도 그 때문이고.”
“배울 점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김광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할 거야. 해리랑 애 엄마한텐 말했나?”
“찾아뵙고 말씀드리는 게 맞는 것 같아서요.”
“좋은 생각이야. 나보다 낫군.”
김광석이 씁쓸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는 아내가 암 수술을 받은 후에도 가족들과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도수가 말했다.
“같이 가실래요?”
“오후에 수술이 있다.”
“아…….”
“식사는 건강히 다녀온 후에 하자꾸나.”
“예.”
도수도 의사이기에 김광석의 사정을 이해했다. 빙그레 웃으며 도수의 어깨를 두드린 김광석은 자리에서 연구실을 나갔다.
다음 면담은 반나절이 지난 저녁이었다.
이번엔 강미소가 들어왔다.
도수는 똑같이 말했다.
“저는 엘 파소로 갑니다.”
“예?”
일본 총리와 식사를 마치고 엊그제 도착한 강미소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벌써요? 들어오신 지 얼마나 됐다고요?”
“그렇게 됐습니다. 좋은 기회가 생겨서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조금 갑작스러운데.”
“그래서 말입니다만.”
“……?”
“엘 파소로 같이 갈 인원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강미소가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정말요? 어떻게 될지 확실히 모르겠다고 하셨잖아요.”
“예. 이사장님이 허락해 주셨습니다. 외상센터가 돌아갈 정도 인력을 남겨두기만 하면 최정예 팀을 구성해서 나가도 괜찮다고.”
정확히 말하면 ‘괜찮다’가 아니라 ‘최정예 팀을 구성하라’고 했다.
이사장은 도수가 못내 걱정됐던 것이다.
강미소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저야… 너무 좋죠. 그런데 엘파소가 어디더라?”
“미국입니다.”
도수의 대답에 강미소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건 저도 알거든요?”
“택사스요.”
“맥시코 접경 지역……?”
“네.”
“아! 기억났어요. 다큐에서 본 적 있는데…….”
“다큐에서요?”
“예. 마약 카르텔이 활개 치는 후아레즈 카운티와 맞닿은 곳이라고.”
도수는 피식 웃었다.
“우린 병원에만 있을 건데요.”
“하긴. 엘 파소는 멕시코령이 아니라 미국령이니까…….”
고개를 주억거린 강미소가 말했다.
“귀한 수술 엄청 많이 하실 것 같아요. 그래서 갈래요. 저도 쫓아다니다 보면 센터장님 절반은 가지 않겠어요?”
그녀는 가식이 없었다.
도수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같이 가죠. 아마 큰 수술은 원 없이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요. 어차피 해외 나가는 게 처음도 아니고.”
시원하게 대답한 강미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탕!
책상을 두드린 그녀가 말했다.
“갑시다. 까짓것!”
그리곤 씩씩하게 방을 나갔다.
마지막, 이시원과 김용찬을 면담한 것은 새벽녘이었다. 도수는 그 둘을 한자리에 불러놓고 말했다.
“엘 파소로 같이 파견 갈 인원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곳 센터장 자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이시원이 묻자 도수가 대답했다.
“김광석 교수님이 남으실 겁니다.”
그 말을 들은 이시원이 눈알을 뒤룩뒤룩 굴렸다. 해외 발령을 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전 여자 친구도 있고…….”
“괜찮아요.”
도수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이곳에 남는 사람도 똑같이 중요합니다. 신임 센터장님을 도와주세요.”
“확실히 돕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도수가 시선을 옮기자.
김용찬도 의사를 전했다.
“마음 같아선 센터장님을 모시고 싶지만… 저도 힘들 것 같습니다.”
그는 천하대가 모교였다. 또한 같은 중증외상센터의 조근현 교수가 스승이었다. 아무리 도수가 센터장을 따라가는 거라고 해도 괜히 자리를 비웠다가 조근현 교수와의 사이가 소원해지진 않을까 두려운 것이다.
도수는 충분히 납득했다.
“알겠습니다. 두 분 그만 나가보세요.”
이시원과 김용찬이 나가기 무섭게.
누군가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따로 부른 사람이 없었기에 도수는 의아한 표정이 됐다.
“누구?”
“나다. 동생.”
씨익 웃고 있는 얼굴을 빼꼼 내민 남자.
바로 정영훈이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는 편의점 봉투를 흔들어 보였다.
“핫바에 사이다 한 잔?”
“됐습니다.”
그 순간.
꼬르륵!
“…….”
안 그래도 출출했던 도수다.
피식 웃은 정영훈이 허락도 없이 성큼 발을 들였다.
“네 배는 아니라는데?”
“…잘못 들으셨겠죠.”
“천둥이 치더만. 병원 무너지는 줄 알았다.”
“기분 탓일 겁니다.”
“그렇다 치고. 사온 사람 성의가 있으니 먹어라. 돈 없으니까 하나 더 사달라고 하진 말고.”
바스락.
봉투를 연 정영훈이 절반쯤 헐벗은 핫바와 시원한 사이다를 건넸다.
달콤하고 노릿한 향이 코끝을 찔렀다.
허기가 지고 목이 탔다.
“잘 먹겠습니다.”
핫바를 받아 한 입 베어 문 도수가 불쑥 말했다.
“여기 온 걸 알면 정영록 선생이 안 좋아할 것 같은데.”
“그 인간은 원래 나 안 좋아해.”
“왜 공감이 가는지.”
“네 손에 들린 핫바를 봐서라도 벌써 그러면 곤란한데.”
“농담입니다.”
전혀 농담 같지 않은 표정에 정영훈이 피식 웃었다.
“아직 날 못 믿겠지?”
병원 내부에는 끊임없이 영웅화되고 있는 도수를 탐탁치 않아하는 세력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정영훈의 형, 정영록이고.
그점을 상기한 도수가 까칠하게 대답했다.
“얼마나 봤다고요.”
“그치. 정영록 그 인간 친동생이기도 하고. 근데도 내가 준 음식 잘 먹는다? 독인지 약인지도 모르면서.”
“독입니까, 약입니까?”
“뭐?”
“둘 중 뭘 주러 오셨는지.”
도수가 그를 응시했고.
눈길을 받은 정영훈이 짙은 미소를 그렸다.
“나도 가자.”
“예?”
“따분하거든. 여기 생활.”
멋대로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정영훈이 덧붙였다.
“네가 날 믿든 말든 그건 관심 없어. 엘 파소 파견. 나도 데려가라.”
“…….”
의외였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정영훈이 엘 파소 행을 부탁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이유가 뭡니까?”
“말했잖아? 따분하던 참이라고… 엘 파소에 근무하고 있는 아버지도 뵙고 좋지.”
“그 이유가 전부예요?”
“아버지한테 형이 얼마나 한심한 작태를 보이고 있는지 고자질도 할 겸.”
“그리고?”
“무슨 대답을 바라는 건데?”
도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평소에 수술이나 고생에 관심 없던 분이 왜 이러시는지 궁금해서요. 지금까지 들은 핑계론 충분치 않습니다. 아버지를 보러 가시는 거나 고자질은 언제든 하실 수 있는 거니까.”
“난 왜 네가 날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
“그건 이유를 들어보고 판단하죠.”
“휘유, 만만치가 않네.”
피식 웃은 정영훈이 말을 이었다.
“난 후계자 자리에 관심이 없거든? 근데 우리 형이 후계자가 되는 것도 싫어. 뭐, 그렇다고 해도 난 애초에 상대가 안 되고 아버지도 그 자리에 관심이 없으니 형이 천하대병원 이사장 자리를 물려받을 건 기정사실이었지. 네가 오기 전까진.”
도수는 정치놀음에 관심이 없었기에 대충 한 귀로 흘리고 물었다.
“그런데요?”
“근데 우리 할아버지가 너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시잖냐. 불나방처럼 불길 속만 찾아다니니 불안하신 건지 뭔지…….”
“…….”
“그래서 사촌동생, 널 좀 지켜보고 싶어졌다.”
“그런 이유라면 사양입니다. 저흰 환자를 위해 엘 파소로 가는 거예요. 환자를 치료할 사람이 필요한 거지, 지켜볼 구경꾼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흐음.”
정영훈은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이 널 왜 싫어하는지 알겠다.”
도수가 어깨를 으쓱이자.
피식 웃은 정영훈은 등 뒤로 손을 흔들며 연구실을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던 도수는 왠지 찜찜했다. 이렇게 쉽게 물러날 줄은 몰랐던 것이다.
***
엘 파소(El Paso) 카운티.
미국 텍사스 서쪽 끝 국경에 위치한 이 도시는, 맥시코 시우다드 후아레스와 인접해 있었다.
국경을 사이에 두고 두 지역은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었다.
치안이 우수한 텍사스에 속해 마약 카르텔이 기승을 부리는 후아레스에 맞닿아 있는 것이다.
엘 파소 공항에 도착한 도수는 한 사람을 만났다.
“오랜만입니다.”
우람한 덩치에 선글라스를 쓰고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
바로 이근육이었다.
손을 맞잡은 도수가 대답했다.
“오랜만이에요.”
“걱정 많이 했습니다.”
이근육의 눈길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그는 전날 라크리마에서 도수를 지키는 임무를 실패했고, 그 일로 군을 떠나 용병이 됐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도수에게 영감을 받았는지 라크리마와 미국에서 의료봉사를 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도수의 연락을 받고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다.
“괜찮습니다.”
도수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가 굳이 이근육을 부른 건 의료팀을 경호해 줄 사람이 필요해서였다.
아무리 그들이 가는 지역이 엘 파소 내 위험 지역은 아니라고 해도 어떤 일이 발생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일에는 군에서 경호임무를 맡았던 사람이 적격이었다.
씁쓸한 미소를 지은 이근육이 말했다.
“저를 불러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모르는 사람보다야 아는 사람한테 신변을 맡기는 편이 믿을만하죠.”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안전하게 생활하실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위험한 일이 생기진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부탁드립니다.”
“예.”
이근육이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를 도수 뒤에서 빼꼼히 지켜보던 강미소가 대뜸 말했다.
“신기해요. 말로만 들어봤지 용병은 처음 보는데. 듣던 대로 근육질이시네요.”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여기 많이 위험해요?”
강미소는 못내 불안한 표정이었다.
그녀를 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은 이근육이 대답했다.
“아무래도 국경 근처는 아직 위험한 편입니다. 그래도 언론에서 보도되는 것만큼 위험하진 않습니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까요. 특히 병원 주변은 보안이 철저해서 큰 위험에 휘말릴 일은 없으실 겁니다. 일단 가시죠.”
그는 선큼성큼 앞장섰다.
강미소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무뚝뚝한 양반이네.”
한편 아사다 류타로는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이거 뭐 된 것 같은데.’
엘 파소가 이런 곳인지는 몰랐다.
그저 도수가 온다기에 무조건 오겠다고 했던 것뿐.
그런데 웬 군인이 나타나더니 위험성에 대해 대화를 나눈 것이다.
하지만 아사다 류타로는 곧 마음을 정정했다.
‘그래, 닥터 리가 평범한 곳을 찾아다닐 리는 없지.’
섣부르게 가슴 졸이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그들이 가는 곳은 국경 지역이 아닌 병원이었으니까.
더욱이 심장수술이 필요한 환자들을 여럿 받아야 할 상황이라고 했으니, 그를 필요로 하는 상황이 많을 터였다.
‘환자만 신경쓰자.’
그렇게 공항을 나선 네 사람은, 이근육이 몰고 온 대형지프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넓은 도로, 사막, 야자수와 띄엄띄엄 있는 단층 건물들과 영문 간판이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나라에 왔다는 것을 실감케 했다.
그렇게 주위 풍경에 빠져든 사이 도착한 곳은 엘 파소 병원 인근의 으리으리한 저택 앞이었다.
끼이이익.
차를 멈춘 이근육이 말했다.
“다 왔습니다.”
“……?”
차에 타고 있는 의료진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임시 숙소라고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호화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