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변화
일본에서 여러 가지 일을 겪은 도수는 근 보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일본 총리와의 식사 자리에 팀원들을 보내놓고 자신만 귀국한 상황.
병원에 있는 환자들 생각 외에 별생각을 하지 않고 있던 도수는 공항에 도착한 시점부터 자신이 떠나기 전과 현재의 상황이 크게 바뀌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소식을 전해 들었는지, 입국장으로 수 많은 기자들이 몰려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도수 센터장님, 일본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을 구하셨는데요. 지금 소감이 어떠십니까?”
“일본에서 쓰나미에 휩쓸렸었다는 소문이 정말인가요?”
“제약회사 B&W에 대한 견해 한 말씀만 부탁드립니다!”
도수는 할 말을 잃었다.
‘…매디 보웬의 말이 현실이 될 줄이야.’
선뜻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한마디만 잘못 놀려도 고스란히 방송을 탈 것임을 알고 있기에 노 코멘트로 일관했다.
“현대판 영웅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뜨겁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환자들을 치료하는 센터장님의 모습을 보고 이순신 장군에 비유하기도 하는데요. 잠은 좀 주무십니까?”
천하대병원에서 요청을 했는지 보안요원들이 주변에 배치되어 있었지만 좀처럼 길이 열리질 않았다.
결국 도수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기자들이 던지는 각양각색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한마디로 대신했다.
“저는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조금 피곤했다.
이런 것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걸까?
진심으로 할 일만 하고 싶었다.
그의 꿈은 한 사람이라도 더 치료하는 것이지, 정치인이나 연예인이 아니었으니까.
“저 말고도 수많은 의사분들이 같은 일을 하고 계십니다. 이런 관심은 조금 불편합니다. 제 일에도 방해가 되고요. 그 점을 조금만 양해해 주십사 합니다.”
최대한 공손히 한 말이지만 누군가는 ‘싸가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태도였다.
그러나 도수는 이렇게 시달릴 바에야 차라리 그 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고 여겼다.
오늘 이 한마디 때문에 환자가 자신을 안 찾진 않을 테니까.
진을 친 기자들의 정글을 헤쳐 나온 도수는 차에 타고 문을 닫았다.
타악.
밖에선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이고 있었다.
천하대병원 이사장이 보낸 운전기사가 말했다.
“출발하겠습니다.”
“예.”
부르르릉.
고급 세단이 부드러운 배기음과 함께 병원으로 움직였다.
잠시 후 어느 정도 여파가 가라앉자 도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때, 운전기사가 룸미러로 그를 보며 말했다.
“제 딸이 팬인데… 이따 사진 한 장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도수는 놀란 눈을 떴다. 지금 운전석에 앉은 사람은 다름 아닌 이사장의 운전기사였다. 그 전에도 도수를 몇 차례 봐왔는데 이런 적극적인 공세를 펼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니, 왜…….”
“아아.”
운전기사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일본에 있으시느라 한국 소식을 잘 모르시겠군요. 그쪽은 재난이 벌어진 지 얼마 안 돼서 인터넷이나 소식도 느리죠?”
“예, 뭐.”
“공항에서부터 느껴지셨겠지만 한국에선 난리가 났습니다. 안 그래도 영웅적인 행동으로 주목받던 분이 일본에서까지 영웅이 되셨으니 애국심과 대리만족을 느끼는 거지요.”
“아…….”
“하루가 멀다 하고 정치권에서도 계속 연락이 오는 것 같습니다.”
“전 관심이 없는데.”
“예, 그래서 더 주목받으시는 거지요. 정치권에서든 국민들한테서든. 부와 권력에 초연한 사람은 많지 않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그뿐입니까? 정치권에선 한국과 일본 간의 여러 국제 문제 해결에 나서주십사 하고 김칫국을 마시고 있습니다.”
도수는 괜찮아지려던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번 일과 국제 문제는 무관합니다.”
“그렇겠죠.”
“의사가 환자들이 있는 곳으로 갔을 뿐입니다.”
“센터장님은 그런 생각이셨겠지만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는 우리나라가 일본한테 도움을 준 것처럼 보여졌나 봅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맞는 말도 아니었다.
도수는 의사지, 대사가 아니었으니까.
“…….”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이 일과 무관한 이에게 구구절절 설명하고 설득해 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역시 언론은 굳이 가까이 해서 좋을 게 없어.’
애초부터 언론과 엮이려고 엮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언론을 이용하는 것은 양날의 칼이라고 여겼다. 이번 일만 봐도 그랬다. 생활에까지 방해받을 정도로 관심이 집중되면 일하는 데 방해는 방해대로 될 테고, 그렇다고 아주 무시하면 무시하는 대로 구설수에 오를 것이다.
이렇게 정치권에서 터치가 들어오면 그것 자체만로도 입당을 준비하고 있다느니 한국 대표로 일본과의 정세에 관여할 것이라는 둥 괜한 소문이 나돌 수 있고.
‘신경 쓰지 않는 것도 한계가 있을 테고.’
둘 중 하나였다.
괜히 쓸데없는 루머들이 나오기 전에 입장 표명을 확실히 해서 여론을 정리하든.
그게 아니면 한국을 떠나든.
일단은 한국을 떠나 엘 파소로 가려는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개입하지 않는 편이 속편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가 탄 차량이 병원 앞에 멈춰 섰다.
“사진 한 장만…….”
운전기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도수가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찰칵!
사진을 찍은 운전기사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꼭 우리 딸한테 보여줘야겠습니다. 하하하.”
“포토샵은 필수인 거 아시죠?”
“예?”
“…….”
“…….”
몹쓸 개그를 친 도수는 말없이 차에서 내렸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익숙해졌다는 것이 좋게 변한 점이라면, 이런 부작용도 있었다. 어떤 약도 듣지 않는 난치성 부작용이.
“크흠.”
헛기침을 뱉은 도수는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발견한 병원 사람들이 반가운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센터장님.”
“센터장님, 소문 들었습니다.”
“어서 오세요!”
“사랑합니다.”
뜨거운 환영 열기.
심지어 주변에 앉아 있던 환자들도 엄지를 추켜세우며 그를 반겨주었다.
‘…나쁘지만은 않군.’
기분이 썩 좋았다.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이.
돌아올 곳에서 환영받는다는 자체만으로도 뭉클했다.
다시 돌아온 병원은 떠나기 전과 조금도 바뀌지 않은 모습 그대로였지만 도수의 감회는 남달랐다.
‘내 집보다 익숙했던 곳인데.’
왜 이렇게 낯선 느낌이 드는 걸까?
물론 도수는 알고 있었다.
이것도 잠깐일 거라는 것을. 병원 생활은 이런 감회를 오래 즐길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잠시 후 이사장실로 들어간 도수는 오랜만에 할아버지를 마주할 수 있었다.
“왔니?”
이사장은 미소 지었다.
도수가 자리로 가서 앉으며 대답했다.
“예. 잘 지내셨어요?”
“…….”
빤히 도수를 응시하던 이사장이 말했다.
“걱정했다. 나중에서야 네가 실종될 뻔했다는 소식을 듣고, 살아남은 것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구출 과정에서 생긴 일입니다. 이 정도는 감수하고 갔던 거니까요.”
“난 감수하지 못했다.”
이사장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내가 네 엄마를 잃고 나서 죽도록 후회한 일은 그 애가 하고자 하는 일을 강제로 막으려 한 것이다.”
“…….”
“그보다 더 후회가 됐던 것이 뭔지 아느냐?”
“아뇨.”
“네 엄마를 먼저 보낸 것이다. 앞으론 절대 그런 일을 반복하지 않아. 그런데 난 이번에 널 잃을 뻔했다.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너를 막지 않았어.”
“할아버지.”
도수가 이사장을 부르자, 그 말투에 반응한 이사장이 중얼거렸다.
“…많이 변한 것 같구나.”
“조금요.”
도수는 할 말을 이었다.
“전 매일 출동을 나가요. 앞으로도 그러겠죠.”
“…….”
“그때마다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할 거예요.”
“그렇겠지.”
“할아버지는 그것까지 막으실 건가요?”
이사장은 침묵했다.
어쩌면, 출동마저 못 하게 막을 각오까지 하고 있던 참인가 보다.
그러나 도수는 그 마음에 동조할 수 없었다.
“전 의사입니다. 환자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요. 목숨을 걸더라도… 그게 아니면 저는 살아가는 의미가 없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집착하는 거냐?”
이사장은 물을 수밖에 없었다.
도수가 보이는 환자에 대한 집착은 일반적인 범주를 넘어서고 있었다.
근무량도 근무량이지만 매번 의료 행위에 임하는 태도가 그랬다.
뒤가 없는 사람처럼, 어떤 도의적 책임이나 법적인 채임도 두려워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눈앞의 환자를 살리는 것에만 집중했던 것이다.
이전까진 이런 면모를 보며 장점이라 여겼다. 이런 면이 있기 때문에 그간 많은 환자들을 살려낸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처음으로 도수의 이런 부분이 위험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 발단은 일본에서 쓰나미에 휩쓸려서 죽을 뻔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였다.
그 같은 감정이 고스란히 실린 질문에.
도수가 대답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못 한 채 부모님의 죽음을 목격해야 했을 때, 라크리마에서 가족처럼 지내던 사람들이 픽픽 죽어 나갔을 때, 혹은 제 손으로 죽을 뻔한 사람들을 살려내면서… 언제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잠시 숨을 고른 도수가 말을 이었다.
“그게 제 모든 것이 됐습니다.”
철렁.
이사장은 왠지 이 순간 기쁘거나 슬프기보단 심장이 내려앉았다. 같은 표정을 도수의 부모에게서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기어코… 피는 속일 수 없는 겐가.”
나지막이 읊조린 이사장이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말했다.
“네 인생이다. 난 네 길을 막아서는 사람이 되면 안 되겠지. 하지만 할아버지로서 부탁 하나만 하마.”
“예.”
“네가 살릴 목숨보다 네 목숨을 먼저 생각했으면 한다. 모든 상황에서.”
“노력하겠습니다.”
그런 건 생각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도수는 ‘노력한다’는 말로 다짐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할아버지의 걱정에 부응하는 것이 맞다. 다짐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은가.
이사장 역시 도수가 자신의 말 대로 움직이리라고 여기진 않았지만, 더 이상 그를 억제하려 하지 않았다. 도수에게 조심하겠다는 대답을 듣는 것만이 그를 말리지 않을 유일한 핑계였으니까.
억지로 미소를 띤 이사장이 화제를 돌렸다.
“그래, 이제 앞으로 뭘 할 생각이냐?”
“엘 파소로 갈 생각입니다.”
“……!”
이사장의 표정이 흠칫 떨렸다.
“방금 전에 조심하라고 일렀거늘…….”
“엘 파소로 가는 것뿐입니다.”
“엘 파소가 어떤 곳인지는 알고 하는 말이냐?”
“맥시코와 미국의 접경 지역이죠.”
“경찰과 마약범들의 총격전이 끊이질 않는 곳이다.”
“병원 안에서까지 총격전이 벌어지진 않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할아버지.”
도수가 말을 이었다.
“뭘 걱정하시는지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전 엘 파소 병원으로 가는 것이지, 국경으로 가는 게 아닙니다. 의사로 가는 것이지 경찰로 가는 것도 아니고요. 그러니 너무 심려치 않으셔도 돼요. 제가 엘 파소로 가는 것도 환자치료가 목적입니다.”
“환자 치료?”
“엄승진 환자라고, B&W의 심장성형제를 복용한 환자가 있습니다. 심장성형제를 복용한 다른 확장성 심근병증 환자들도 그곳에서 만나볼 생각입니다.”
“그들은 왜?”
“엄승진 환자에 대해 들으셔서 아시겠지만 B&W의 심장성형제는 심각한 부작용이 의심됩니다.”
“그러한 의혹은 들어서 알고 있다. 내가 묻는 것은 어째서 엘 파소까지 가서 그 환자들을 치료하냐는 게야. 그곳에 뭐가 있기에.”
도수가 대답했다.
“우연인지 다른 이유가 또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병원과 협력 관계에 있는 엘 파소 병원. 그곳에 예전 B&W에서 탐내던 병리학 박사가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B&W에서 중책을 맡고 있던 마이크 휴잇의 말로는 그가 심장성형제의 주요 성분을 밝혀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더군요.”
“B&W……!”
침음을 삼킨 이사장이 말했다.
“다른 건 다 좋다. 네가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도, 굳이 그들을 구출하러 직접 뛰어드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B&W와는 얽히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도수는 그 내용에서 짐작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진실에 근접해 있음을. 왜 B&W를 가까이 두냐는 말에 ‘적일수록 가까이 두겠다’는 대답을 내놓았던 할아버지다.
그를 빤히 응시하던 도수가 귀신같은 추리력을 발휘하며 눈을 빛냈다.
“제가 엘 파소로 가는 것은 B&W가 아닌 환자들 때문이지만, B&W 입장에선 심장성형제를 방해하는 암초입니다. 제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운명이 이끄는 일이에요. 막는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만약 B&W와 관련해 안배해 두신 것들이 있다면 제게 힘을 실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