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
아사다 류타로는 자신 있게 말한 것처럼 병원장 앞에서도 당당하게 선언했다.
“전 이도수 센터장을 따라가려 합니다.”
“자네 미친 건가?”
병원장은 기가 막혔다.
이 또라이가 또 다시 또라이 짓을 하려 한다.
그러나 아사다 류타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제가 의사로서 가야 할 길을 이도수 센터장을 통해 보았습니다.”
“뭐?”
점입가경이다.
병원장은 입에 거품을 물며 말했다.
“이 자식이 반성하라고 했더니 자숙하는 시간도 안 가지고 또 미친 소리를 하네! 내가 닥터 리 대신 아사다 선생이 가야 할 길을 보여줄까? 엉? 보여줘?”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아사다 류타로가 마치 권총을 꺼내는 것처럼 품 안에서 하얀색 봉투를 꺼내더니 날리듯 내밀었다.
“자!”
코앞에 멈춘 봉투를 빤히 내려다본 병원장이 물었다.
“뭐야?”
“사표입니다. 제 앞길을 막으신다면 저 역시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아주십시오.”
“이런 미친놈…….”
병원장은 졸도할 지경이었지만 간신히 정신을 붙잡았다. 가뜩이나 병원에 이 환자 저 환자 몰려들어 만원인데 자신까지 쓰러지면 병원 침대가 남아나겠는가?
“후우…….”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챙긴 병원장은 책상을 톡톡톡 두드렸다.
생각에 잠긴 끝에.
병원장이 감았던 눈을 뜨며 물었다.
“꼭 그렇게 해야만 직성이 풀리겠나?”
“그렇습니다.”
“환자는 이곳에도 차고 넘친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비상시국이야. 이런 때 병원을 비우겠다니. 병원 내 여론이 좋지 못할 거야.”
“지금 차고 넘치는 환자들 중에는 흉부외과 환자가 드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각 병원에서 지원을 나온 덕분에 평소보다도 몇 배에 달하는 의료진이 상주해 있고요. 의사가 환자보다 많아서 라인 잡는 것도 서로 경쟁할 판입니다. 그리고…….”
“또 뭐야?”
“더 떨어질 이미지도 없는 것 같은데요.”
“하!”
병원장은 다시 한번 기가막혔다.
이 자식과 대화만 했다 하면 혈압이 오른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이 대화를 마무리 짓고 싶었다.
“그래, 참 잘나셨구만. 아주 자랑이다, 자랑이야.”
“솔직히 병원 측에는 미안할 때가 많습니다.”
“그게 지금 병원 떠나겠다는 놈이 할 말이냐?”
“하지만 이 역시 제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
할말을 잃은 병원장에게.
아사다 류타로가 덧붙였다.
“제 팀원들 역시 이런 저의 매력에 빠져서 함께하고 있는 거고요. 제가 현재 유능한 흉부외과 써전이 된 것도 이런 성향이 반영된 결과라고 봅니다. 전 어디든 가리지 않고 의사의 사명이 이끄는 곳으로 달려들기 때문이죠.”
“…자화자찬하라고 한 얘긴 아니다만.”
아사다 류타로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쭈.”
병원장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예의바른 척 말고 얼른 나가라… 안 나가?”
“그럼…….”
“알겠으니까 나가라고!”
“예, 그럼.”
구십 도로 허리를 숙인 아사다 류타로는 몸을 돌려 로봇걸음으로 병원장실을 나섰다.
그리고 문을 닫자마자, 주먹을 움켜쥐었다.
‘됐쓰!’
병원장이 최대의 난관이었다.
하지만 그 난관을 적절한 유머와 담력으로 넘어선 지금은, 그 누구도 도수와 함께할 메디컬 라이프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크흠!”
지나가며 흘깃거리는 간호사들을 의식한 아사다 류타로는 헛기침을 뱉으며 걸음을 옮겼다.
벌써부터 걸음에 흥이 실렸다.
***
호텔로 돌아간 도수는 귀국을 하루 앞두고 팀원들과 마주앉았다.
“생각보다 일정이 많이 꼬였네요.”
나유하가 말했다.
쓰나미 때문에 연수 일정을 앞당기면서 정작 연수 과정을 소화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수는 이 부분을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그래도 일본의 여러 가지 의료 시스템을 직접 눈으로 보고 배울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건 그래요.”
강미소였다.
“솔직히 놀랐어요. 재난경보가 터지자마자 너나할 것 없이 전국에서 의료진들이 모여드는 걸 보고 부러웠다고 할까…….”
“저도요.”
이하연도 동조했다.
“선진화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구나 싶었어요. 그런데도 대학병원 내의 시스템은 한국과 별 차이가 없어서 아쉬운 점도 있지만, 우리가 바로 적용하긴 좋은 것 같아요.”
“당장은 힘들 겁니다.”
“그렇겠죠. 특히 재난시 대응은 국가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어야만 하는 거니까.”
이하연은 못내 아쉬운지 입맛을 다셨지만 강미소는 좀 더 발전적인 의미로 해석했다.
“뭐, 그래도 어디 공식 석상이나 학회에서 일본의 시스템과 비교해 얘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성과라고 봐요. 우리나라 사람들 일본한테 지는 건 끔찍하게 싫어하니까.”
“지면 안 되죠.”
빙그레 웃은 도수가 말을 이었다.
“이렇게 여러분을 한자리에 모은 것은 돌아가기 전날 식사라도 한 끼 하자는 의미도 있지만, 향후 우리 팀이 움직일 방향을 말씀드리기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다들 바짝 집중했다.
도수가 움직일 땐 언제나 가시밭길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길을 놔두고 비범한 길을 간다. 그럼에도 지쳐서 떨어져 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이내 팀원들을 차례로 훑은 도수가 말을 이었다.
“병원에 돌아가면 평소처럼 생활하게 될 겁니다. 환자를 받거나 출동 나가고, 환자가 들어오면 수술하고, 건강해질 때까지 돌보겠죠.”
여기까진 평범하다.
그러나 역시, 도수는 생각지도 못한 본론을 꺼냈다.
“하지만 저는 또 다시 자리를 비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왜요?”
“어디 가시는데요?”
당장이라도 따라갈 기세.
나유하는 병원 소속이 아니었기에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 고생을 하고도 다들 도수를 따르고 싶어했다.
조금쯤 가슴에 울림을 느낀 도수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제 환자 중에 엄승진 환자라고 있습니다.”
“심장 수술 받은 환자요?”
“CIA인가 FBI인가 그 사람 맞죠?”
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러고 보니 그 환자 어느 정도 회복한 것 같던데 왜 퇴원을 안 시키시는지…….”
간호사로서 환자들을 퇴원할 때까지 케어하는 이하연이 묻자 도수가 답했다.
“겉으론 괜찮아 보이겠지만 여전히 위험 요소가 남아 있습니다. 그 환자를 완치시키기 위해선 문제를 추적해야 돼요. 아직 뭐가 문제인지 정확히 모르는 상황입니다.”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어떻게 추적을 해요?”
강미소의 물음에 도수가 말했다.
“윤곽 정도는 나온 상태입니다. 정확한 문제점을 파악하려면 미국에 가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미국이요?”
다들 동시에 물었다.
일본에서 돌아가자마자 또 미국에 간다니.
뭐 이렇게 바쁜 의사가 있나 싶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기에, 금방 침착해진 강미소가 모두를 대표해서 질문했다.
“미국 어디로 가세요? 정확히 어떤 일을 하실 생각이신지도 말씀해 주세요.”
“엘 파소로 갑니다. 미국과 맥시코의 국경 인근에 있는 병원이에요. 그곳에 유능한 병리학 박사가 있습니다. 엄승진 환자의 예후를 보고하고 그에 대한 연구를 의뢰할 참입니다.”
“그럼 의뢰만 하고 오시는 건가요?”
“그건 가봐야 확실해질 것 같고요.”
도수가 말을 이었다.
“아직은 엄승진 환자의 문제점을 확실히 파악할 수 있을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도 알 수 없는 실정입니다.”
“그런 거면 직접 가실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메일도 있고 전화도 있고.”
“엘 파소 병원과 우리 병원은 협력 관계죠. 메일이나 전화로 요청하는 것보단 환자를 직접 겪은 제가 가서 돕는 편이 빠른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미국에 엄승진 환자와 굉장히 비슷한 케이스의 환자가 있습니다. 엄승진 환자와 같은 증상으로 같은 약을 복용했던 환자죠. 그 환자를 치료해 주기로 환자 보호자와 약속을 했습니다. 이 환자를 치료하면서 완치법에 대한 또 다른 정보를 얻을 수도 있을 거예요.”
도수는 일부러 B&W에 대한 내용을 제외시켰다.
그러나 누구도 B&W에 대해 묻진 않았다.
그들이 궁금한 것은 도수지 B&W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음… 팀원들은 선발 안 하시나요?”
강미소가 묻자 도수가 답했다.
“그 부분은 이사장님과 상의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환자 건으로 진행하는 부분이니까요.”
“알겠어요. 얘기 되시면 말씀해 주세요.”
그때, 나유하가 대뜸 물었다.
“TV에서 인터뷰를 봤어요. 확장성 심근병증 환자들한테 천하대로 문의하면 직접 수술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그렇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엘 파소로 가시면 차질이 생기는 것 아닌가요?”
“확장성 심근병증 환자는 미국에 더 많습니다. 게다가…….”
결국 B&W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도수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기존 확장성 심근병중 환자들 중 B&W의 심장성형제를 복용한 환자들도 다수 있을 겁니다. 엄승진 환자의 심장에 생긴 문제. 그 원인을 확실히 찾아내지 못한다면 심장성형술을 한다 하더라도 1차적인 치료에 머물뿐이에요. 엘 파소로 향하는 것은 다른 확장성 심근병증 환자들에 대한 치료 목적도 포함된 것입니다.”
“아…….”
나유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뭔가 아쉬운지, 한마디를 덧붙였다.
“혹시 지난번처럼 제 도움이 필요한 게 있으시면… 그러니까, 뭐 혹시라도 그런 일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그녀는 부끄러운지 얼굴이 빨개져서 괜히 다른 곳을 쳐다봤다.
그러면서도 할 말은 다 한다.
피식 웃은 도수가 대답했다.
“그러죠.”
그는 거절하지 않았다.
B&W란 대기업을 상대하는 일이다.
문제의 약에 대해서도 철저한 울타리를 쳐뒀을 터.
앞길이 잘 안 보이는 상황이었기에 의지할 등대가 하나라도 더 있으면 반가울 따름이다. 언제 도움을 청할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다.
잠시 무거워진 분위기를 전환하듯 이하연이 불쑥 물었다.
“그런데 총리님께는 말씀드렸어요? 그냥 가신다고.”
피식.
다들 웃음이 새나왔다.
한 나라 총리의 초대를 거절할 수 있는 의사는 도수밖에 없을 테니까.
고개를 끄덕인 도수가 말했다.
“밥 먹고 싶으면 한국 한번 오시라고 했습니다.”
“푸흐흐.”
“헐.”
“뭐라고요?”
세 여자의 반응을 즐긴 도수가 고개를 저었다.
“…그랬을 리가 없잖아요. 제가 아무리 막무가내라도 생각은 있다고요. 그쪽에서 그러더군요. 나중에 한국 갈 일 있으면 밥 한 끼 하자고.”
“엥? 센터장님은 뭐라고 하셨던 건데요?”
“환자 관련해서 급히 서둘러야 한다고 했죠, 뭐.”
“아…….”
“의외로 너무 평범한 대답에 실망하실까 봐 농담 좀 한 겁니다.”
“하하하.”
어색한 웃음을 짓는 여자들.
그녀들은 자기도 모르게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정도 전할 소식을 모두 전하고 장내 분위기도 정리되자.
도수는 창밖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일본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밤인데 저녁은 나가서 먹는 걸로 하죠.”
재난이 덮친 마당에 희희낙락하며 술을 마시거나 할 수는 없었지만, 다들 밥 정도는 제대로 된 일식을 즐기고 싶었다. 그동안 동일본병원에서 먹고 자고 하며 환자들을 보느라 정작 한국과 전혀 다르지 않은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음식도 인스턴트나 컵라면으로 대충 때웠고.
도수는 B&W나 심장성형제와 관련해 복잡한 와중에도 팀원들의 이러한 마음이 신경쓰였다.
‘…나도 많이 변했어.’
도수 스스로도 느껴질 만큼 많은 변화였다. 이는 사는 지역이나 환경이 바뀌어서가 아닌, 믿음직한 팀원들을 만난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