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인간의 길
‘또 다시 발목을 잡는 건가?’
남자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이도수.
B&W에서 사업을 진행시킬 때마다 매번 교묘하게 들려오는 이름이다.
“일단 알겠다. 위에 보고하고 나중에 통화하지.”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남자는 회사 전화 대신 개인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잠시 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기하게.
“한국의 닥터 리가 또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타임즈에서 기사를 실을 예정이랍니다.”
-일본에서의 활동을 얘기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서둘러야겠군.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더니, 반골 기질이 역력한 자야.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뉴라이프 프로젝트는 계속 진행해. 대신 심장성형제 관련된 것들은 잠시 보류하도록.
“보류합니까?”
-일단… 당분간만. 닥터 리 문제를 처리한 후에 진행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뚝.
전화가 끊겼다.
핸드폰을 책상 위에 던지듯 내려놓은 남자는 뉴욕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창밖을 응시했다.
‘쉬운 일이 하나도 없군.’
그렇다 해도.
결국 모든 일은 B&W의 뜻대로 진행될 것이다.
그가 속한 B&W는 세계 전역에 거미줄을 펼쳐두고 있었다. 그 거미줄에 걸려든 먹이들 모두 상상을 초월하는 권력자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이도수 또한 부수고 지나갈 암초에 지나지 않을 터였다.
***
며칠 후.
세계 언론사들이 B&W를 겨냥한 보도 경쟁을 시작했다.
B&W에선 굳이 기사를 막으려 하지 않았다.
현재 보도되고 있는 어떤 정보도 B&W를 법망에 잡아둘 만큼 위협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책임질 누군가는 필요했다.
사약을 기다리는 장수의 심정으로 TV를 보고 있던 마이크 휴잇은 B&W의 사장 대리인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마이크 휴잇을 탓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간략하게 말했다.
-책임을 져주셔야겠습니다.
“본사에서 책임을 지겠다면, 저도 죗값을 달게 받을 생각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자발적으로 죗값을 받고 회사에 누를 끼친 일을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기회를 잡지 않으시겠다면 본사에선 강제집행에 들어갈 겁니다.
억지로 책임을 떠넘기겠다는 뜻.
이 정도는 마이크 휴잇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기에 큰 반향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하시죠.”
-알겠습니다. 그럼.
상대가 전화를 끊었다.
마이크 휴잇은 겉옷을 걸치고 도수가 머물고 있는 호텔로 움직였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띵동.
벨을 누르자 도수가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방 안에는 매디 보웬이 도착해 있었다.
새로운 손님, 마이크 휴잇을 포함한 세 사람이 둘러앉자.
마이크 휴잇이 입을 열었다.
“본사에선 이 문제를 온전히 제 책임으로 뒤집어씌우려 하고 있습니다.”
“그럼 막아야…….”
“아뇨.”
마이크 휴잇은 고개를 저었다.
“각오하고 있던 일입니다. B&W에서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것도, 대신 책임질 사람을 내세워서 법적인 제재를 만회하려 할 것도.”
“…….”
매디 보웬이나 도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마이크 휴잇이 불쌍해서가 아니다. 쓰나미 피해자들을 고립시키고 검증되지 않은 신약을 시험한 장본인이 마이크 휴잇이다. 당연히 책임을 져야 했다. 그러나 책임질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더 큰 책임 소지가 있는 것은 B&W 본사다.
두 사람을 응시한 마이크 휴잇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부턴 B&W에서도 적극적으로 움직일 겁니다. 두 분을 방해물로 인지하고 표적으로 삼겠죠.”
“각오했던 부분이에요.”
“싸울 무기는 충분합니까?”
“아뇨.”
매디 보웬이 고개를 저었다.
“세계 최대의 기업 중 하나예요. 언론인으로서의 사명감 때문이지, 싸움이 될 거라 생각하고 뛰어든 게 아닙니다. 아직 시원한 해결책을 찾진 못했지만 최선을 다해 봐야죠.”
그녀가 도수를 봤다.
“그치?”
도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의사로서 외면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B&W에서 어떻게 나올진 모르겠지만 몇 가지 생각해 둔 대책도 있고요.”
피식, 웃은 마이크 휴잇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미국에 친구가 있습니다.”
“친구요?”
“예. B&W의 성분 분석을 도와줄 겁니다.”
“성분 분석?”
매디 보웬이 눈을 치떴다.
“성분 분석 결과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알고 있는데요. B&W의 심장성형제에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닥터 리한테 듣고 처음 아셨다면서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친구라면 밝혀내 줄 수 있을 겁니다. 이쪽 계통에선 따라갈 사람이 없는 녀석이니까.”
마이크 휴잇은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명함을 받아 읽은 도수는 눈에 익은 병원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엘 파소.”
“그렇습니다. 원래 B&W에서 근무했던 친구입니다. 제게 심장성형제 개발 소식과 시험 판매 대상 선정 소식을 알려준 것도 그 친구죠. 지금은 모종의 이유로 좌천된 후 엘 파소 병원에서 병리학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병리학 박사라.”
“B&W측으로부터 신약 개발에 참여해 달라고 러브콜을 받았을 정도니까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직접 참여하진 못했지만 실력이 있는 친구예요. B&W의 약품에 문제가 있다면 부작용을 밝히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겁니다.”
고개를 끄덕인 도수가 매디 보웬에게 명함을 넘겼다.
매디 보웬이 명함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감사해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얼마 전까지 저 또한 한통속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고개를 돌려 도수를 본 마이크 휴잇이 절박한 어조로 덧붙였다.
“제 딸아이만은, 부탁드립니다.”
“꼭 완치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도수의 대답을 들은 마이크 휴잇의 얼굴이 활짝 폈다. 그만큼 도수를 믿는다는 반증이었다. 서로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도수의 실력과 의사로서의 사명감을 똑똑히 봤던 그였다.
그가 물었다.
“이제 어떡하실 생각이십니까? 어느 정도 계획을 들어보면 제가 도움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 같아서요. B&W에 대해선 이 중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매디 보웬과 도수가 동시에 대답했다.
“전 기자의 역할에 충실해야죠.”
“의사로서 할 일을 할 겁니다.”
마이크 휴잇이 다시 한번 미소지었다.
“든든합니다. 두 분 같은 분이 계시니 B&W에 문제가 있다면 반드시 밝혀질 겁니다.”
***
호텔에서 이틀을 머문 도수는 동일본병원으로 돌아갔다.
그를 발견한 팀원들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았다.
“센터장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기사는 뭐고?”
이미 여기저기서 도수의 인터뷰를 보도했기에 그들은 진즉 소식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리 격한 반응이라니.
도수는 새삼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평소 성격대로 내색하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천천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보다 병원으로 이송된 환자들은 어떻게 됐어요?”
“누가 응급처치를 하고 수술을 해놨던지 손댈 게 별로 없던데요.”
미소 지은 강미소가 이어 물었다.
“대체 그런 열악한 상황에서 어떻게 수술을 할 수 있는 거예요? 볼 때마다 신기하다니까.”
“없으면 없는 대로 해야지, 환자들의 상태가 악화되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
도수는 당연한 듯 대답했고.
실제로도 너무 여러번 그런 행동을 봐왔기에 새삼스럽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평범한 의사들의 사고방식으로 고려해 보면 결코 아무렇지 않은 일이 아니었다.
강미소가 그 점을 짚고 넘어갔다.
“겸손도 그 정도면 병이에요. 저희도 그런 상황이 있으면 센터장님처럼 나서라고 하시는 말씀인 건 알겠는데… 센터장님이니까 그렇게 강직한 결단을 내리실 수 있는 거라고요.”
나유하와 이하연도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옆에.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아사다 류타로가 같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피식 웃은 도수가 말하자.
아사다 류타로가 대답했다.
“저는 강 선생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어멋.”
“깜짝이야!”
아사다 류타로가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제가 그리 존재감이 없는 편은 아닌데.”
‘알고 보면 나도 엄청나게 유명한 써전입니다’라고 항의하는 듯한 목소리.
살짝 삐친 것 같다.
어깨를 으쓱인 도수가 체면을 살려주었다.
“저랑 오랜만에 재회해서 그렇죠, 뭐.”
“제가 끼면 안 될 자리에 낀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아사다 류타로가 난색을 표하자.
강미소가 어깨로 툭 밀며 말했다.
“선생님도 우리 팀원이잖아요? 같이 생사고락을 넘기셨으면서 새삼스럽게.”
“하하하하! 그렇게 말해주신다면야.”
아사다 류타로가 코끝을 슥 문질렀다.
비록 다른 언어를 쓰고 영어로 대화를 하고 있었으나 마음만은 한 가족처럼 통하는 사이.
그게 바로 함께 고비를 넘나들던 사람들끼리 느끼는 전우애였다.
애정 어린 눈으로 팀원들을 일일이 일별한 아사다 류타로가 입을 뗐다.
“닥터 리가 반가워서도 있지만, 실은 겸사겸사 중요한 소식을 전하러 왔습니다.”
“어떤 소식이요?”
빙그레 웃은 아사다 류타로가 개봉 박두를 외치듯 말했다.
“일본 총리께서 여러분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 특히 닥터 리를요.”
“와아!”
“진짜요?”
모두가 화색을 띠었지만.
도수는 난처한 표정을 했다.
“환자만 보고 바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요.”
할 일이 많았다.
천하대병원의 환자들도 언제까지고 다른 사람 손에 맡길 수 없었고.
더군다나 그중에는 언제 어떻게 되도 이상하지 않은 중증환자들도 더러 있었다.
“그래도 총리님이 부르신 건데…….”
“밥이라도 한 끼 하고 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러니까요.”
세 여자는 아쉬운 반응이었지만.
도수는 난처해하면서도 자기 생각을 고수했다.
“총리님 측에는 제가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식사 자리에 참석할 수 있으니 저만 먼저 돌아가는 쪽으로 하죠.”
“에이, 센터장님 안 계시면 그게 무슨 의미예요?”
“그러니까. 총리님이 우리 모두 초대하신 것도 센터장님 봐서 꺼낸 얘기일 텐데.”
“그건 아닐 겁니다.”
미소 띤 도수가 말을 이었다.
“여기 계신 분들 모두 쓰나미 이후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잖아요. 저랑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 정도 대우는 받아도 돼요.”
그 말에 아사다 류타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저도 아쉽긴 하네요. 센터장님은 먼저 돌아가셔야 한다니. 또 무슨 바쁜 일이 있으신지 궁금하기도 하고. 센터장님과 함께한 시간이 의료인으로서의 제 인생 중 가장 보람차고 기억에 남는 시간이었거든요. 그다지 즐거운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이들이 피식 웃었다.
분명 즐거운 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끔찍한 사건 사고들이 겹쳤으니까.
그러나 한편으론 모두가 공감할 수 있었다.
모두 같은 보람을 느꼈고, 잊지 못할 경험들을 아로새긴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감회에 빠진 이들을 둘러본 아사다 류타로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전… 이도수 센터장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엥?”
“뭐라고요?”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된단 말인가?
아사다 류타로는 동일본대학병원 소속.
그러나 지난번에도 그랬듯 아사다 류타로는 그다지 말을 잘 듣는 편이 아니었다. 동일본대학병원 내에서도 별종. 유일하게 자유분방한 인권을 보장받는 인물이었다. 물론 그 역시 동일본대학병원에서 없어선 안 될 실력을 갖췄기 때문이지만.
도수도 벙찐 표정을 짓고 있는데.
멋대로 결정한 아사다 류타로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전 인생에서 같은 시간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사는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앞으로의 시간들을 보람으로 채울 수 있다면 기꺼이 모든 걸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차피 아사다 류타로가 합류한다면 의사면허 때문에라도 파견 형식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 부분은 당사자가 알아서 할 일.
도수는 그의 행동이 뜻밖이긴 했으나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실력 있는 의사가 한 명이라도 더 함께해 주면 전혀 나쁠 게 없었으므로.
더더욱 심장성형을 앞둔 상황에서 흉부외과 파트의 권위자가 도와준다면 두 손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