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저렉션-122화 (122/152)

# 122

마이크 휴잇

쏴아아아아아.

쏴아아아아아아.

도수는 해변에 있었다.

아름다운 해변이었다.

“여긴…….”

따사로운 햇볕.

몸이 노곤하게 녹았다.

얼마만의 휴식인가?

“쉴 틈이 없긴 했지.”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었다.

에메랄드빛 바다를 마주 보는 백사장.

그곳에 파라솔과 누울 곳, 칵테일 한 잔이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훌렁.

옷을 벗어 던진 도수는 그곳에 가서 누웠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수영이고 뭐고 눈을 좀 붙이고 싶었다.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는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환자 생각을 지우고 수술 생각을 날려 버렸다.

그가 가진 열정과 사명감이 식어서?

아니.

이미 이 공간에 들어왔을 때부터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모든 상황들이 꿈이란 것을.

꿈속에서나마 편히 휴식을 취하리라.

다시 깨어나면 움직여야 할 테니.

***

번쩍.

도수는 눈을 떴다.

꿈에서 쉬었을 뿐인데 피로가 제법 풀려 있었다.

온몸이 지뿌둥한 가운데 정신은 맑은 현상.

아파서 잠만 자다 보면 이런 현상을 겪는다.

도수 역시 오랜만에 깊은 수면을 취해서 정신이 개운한 것일 테지만 왠지 꿈의 영향이 있는 듯싶기도 했다.

“저기.”

도수가 부르자.

서양인 간호사가 고개를 돌렸다.

“아……! 벌써 깨셨어요?”

그녀 역시 B&W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도수가 대답했다.

“네.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을까요?”

일어나자마자 상황 파악부터 하려고 든다.

눈을 반짝인 간호사가 다가와서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상당히 비극적인 상황이라.”

“예상은 하고 있으니 편히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우린 고립됐어요.”

“그건 들었어요.”

“지금 이틀째 비상식량으로 버티고 있지만 그마저도 거의 다 떨어졌고요.”

“…….”

“면역력이 떨어진 환자들의 상태도 점점 악화돼서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몇 명 정도 있습니까?”

“처음에는 백이십사 명. 지금은 육십칠 명이요.”

절반으로 줄었다.

한숨을 내쉰 도수가 물었다.

“구조대가 올 때까지 예상시간은요?”

“한참 넘겼죠. 이미 어디가 육지인지 어디가 바다인지 알 수 없는 지경이 됐어요. 이 넓은 곳에서 우릴 찾기란 쉽지 않을 거예요.”

“…….”

“두 번째 쓰나미가 덮친 후로는 더 그렇게 됐고요.”

“문제가 크군요.”

“그렇죠. 환자들 건강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심리 상태예요.”

그 순간.

도수는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간호사는 지나치게 침착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가 말한 환자들의 상태와 너무 다른 표정과 말투라 이질적이기까지 했다.

“간호사님은 괜찮으신 것 같네요.”

아주 잠깐 흠칫한 간호사가 금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게 제 직업이니까요. 저까지 흔들리면 다른 환자들이 얼마나 불안하겠어요?”

맞는 말이지만.

단순히 사명감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그녀는 나름 심리 변화를 감추려 시도했지만, 이미 감정을 읽는 것이 습관이 된 도수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훌륭한 의사란 환자의 건강 상태 이외에 환자나 보호자의 감정 변화도 감지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수는 모른 척하고 물었다.

“저를 구해준 분을 뵙고 싶은데요.”

“아! 안 그래도 깨어나시는 대로 얘기해 달라고 지시를 받았어요. 지금 호출할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녀가 도수를 구한 남자를 호출했고, 머잖아 그가 막사 문을 열고 들어왔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억양을 보니 미국인이다.

“좋습니다.”

상체를 일으킨 도수가 짧게 덧붙였다.

“이상할 정도로요.”

“하하하. 다행입니다. 전 B&W 소속 마이크 휴잇입니다.”

그 역시 지나치게 태연했다.

죽음의 위기에 처한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나 내색하지 않은 도수가 대답했다.

“이도수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B&W와는 인연이 깊으신 것으로.”

“인연이라고 해야 할까요.”

“악연이라고 하고 싶진 않군요.”

빙그레 웃은 그가 덧붙였다.

“이전에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이젠 좋은 인연이 된 것 아니겠습니까?”

마이크 휴잇은 돌려 말하고 있었다.

B&W가 네 생명의 은인이 아니냐고.

물론 도수는 굳이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이 남자가 아니었더라면 자신은 죽었을지 살았을지 알 수 없을 테니까.

“큰 빚을 졌습니다.”

“닥터 리라도 같은 일을 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의사니까요.”

“그렇죠. 전 의사입니다.”

‘의사’는 사람을 구하는 데 대가를 바라지 않아야 한다. 그 말을 돌려서 한 것인데 마이크 휴잇은 의외로 순순히 받아들였다.

해서 도수가 물었다.

“아무래도 이상해서요.”

“뭐가 말입니까?”

“제 부상 정도에 비해 지나치게 몸이 편합니다.”

“기쁜 일 아니겠습니까?”

“많은 환자들을 수술하다 보니 기적을 믿게 됐습니다. 그렇다고 픽션을 믿는 건 아니죠. 오히려 경계하는 편입니다.”

의사라면 그래야 한다.

환자가 일으키는 기적을 믿되 함부로 속단하면 안 된다.

현실을 똑바로 보고 부질없는 기대감에 흔들려선 안 된다.

그런데 지금 도수가 느끼는 통증은 그에게 비현실적인 경계심을 유발하고 있었다.

강한 의심이 깃든 도수의 표정을 빤히 응시하던 마이크 휴잇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보통이 아니신 분이라고 듣긴 했습니다만, 검사를 받아보기도 전에 스스로의 상태를 파악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검사도 없이 약을 쓰신 것 자체가 의심할 만한 부분이라고 보여집니다만.”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마이크 휴잇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지금 닥터 리는 B&W의 신약을 복용한 상태십니다.”

“신약?”

설마.

도수는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떠봤다.

“마약 성분이 들어있는 약물이 아닌 이상 이렇게까지 통증을 완화시킬 순 없다고 생각되는군요.”

그러나 간호사완 달리 마이크 휴잇은 표정에 변화를 드러내지 않았다. 차라리 간호사를 먼저 떠보고 그를 부를 걸 그랬나, 약간의 미련이 남았다.

그 속내를 모르는 마이크 휴잇이 말했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그러니 B&W의 새로운 신약이 신통한 것이지요. 마약 성분 없이도 그만한 효과를 낼 수 있으니까요. 심지어 빠른 회복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빠른 회복이라.”

중얼거린 도수가 물었다.

“부작용은요?”

“시판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미 실험적인 단계에선 검증이 끝난 상태예요.”

이렇게 말하면 더 파고들 수 없다.

어쨌든 그 덕분에 목숨을 구했는데 명확한 증거도 없이 부작용을 따지고 들어봐야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을 테니.

“…….”

도수는 말없이 자신의 몸을 관찰했다.

아무리 온 신경을 집중해도 이상한 점을 느낄 순 없었다.

그래서 더 가슴이 철렁했다.

‘역시… 심장성형제거나, 심장성형제의 성분이 들어간 신약이다.’

그렇지 않은 다음에야 이런 비상식적인 효험을 보일 순 없다.

심장성형제를 복용한 엄승진이 말하길, 심장성형제에 들어가는 마약으로 추정되는 약물을 복용하고 한동안 아무런 증상을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대신 더 큰 부작용이 생겼지만.

이를 증명할 수단이 없는 상황이었다.

‘빌어먹을.’

도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자꾸 B&W와 연관되는 길로 이끌리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찜찜해서라도 B&W의 비밀을 밝혀내지 않으면 편히 발 뻗고 잘 수 없게 됐다.

비록 당장 심장이 녹아내리진 않겠지만 언제고 심장에 손상을 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성분이라면 몸에 좋을 리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마약 성분이라면 강한 중독성을 동반할 터.

최악의 경우 진통 효과를 줄이기 위해 마약을 복용하는 기간 동안 만성이 돼서 끊지 못하게 될지도 몰랐다.

마약 성분이 들어간 약물이 무서운 점은 복용 후 일정 기간이 지날시 중독성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찾게 되고, 무서운 부작용을 겪게 된다는 것이었으니까.

‘이러면 진흙탕 싸움이 될 수밖에 없는데.’

물론 이점은 있었다.

긍정적인 상황이라고 보긴 어려웠지만 남의 몸을 통해서가 아닌 자신이 직접 B&W의 약물 반응을 관찰할 수 있을 터였다.

이런 생각을 하던 도수는 속내를 감추고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리고 냉철한 판단하에 대답했다.

“불안하긴 하지만 믿어보죠.”

“감사합니다.”

마이크 휴잇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움직이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도수가 몸을 일으켰다.

역시, 이상할 정도로 컨디션이 괜찮았다.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 말에 마이크 휴잇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그럼 저와 함께 환자들을 보러 가시죠.”

“아, 한 가지 궁금한 점.”

도수의 말에 막사를 나가려던 마이크 휴잇이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를 보며 도수가 물었다.

“환자들도 신약을 복용했습니까?”

“…….”

잠시 그를 응시하던 마이크 휴잇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죽을 사람을 살리진 못했습니다. 부상이 심한 사람들도 여전히 힘들어하고 있고요. 그 환자들을 함께 봐주셨으면 합니다.”

“…….”

“최고지 않습니까.”

도수의 수술 실력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당사자만 완전히 실감하지 못하고 있을 뿐, 그는 이미 의학계의 슈퍼스타였다.

본의 아니게 칭찬을 들은 도수가 걸음을 떼며 대답했다.

“…그러죠.”

***

밖으로 나가자 참혹한 광경이 펼쳐졌다.

방금 전 막사 안의 평화와는 상반되는 현장이었다.

대부분이 쓰나미에 휩쓸리는 과정에서 다친 부상자들인지 외상이 심했다.

한 환자 앞에 도달해서 고개를 돌린 마이크 휴잇이 물었다.

“어떻습니까?”

도수는 우두커니 서서 환자에게 투시력을 사용했다.

샤아아아아아아아아.

그의 몸속이 한눈에 들어오고.

도수가 짧게 대답했다.

“응급 수술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환자 말고도 응급 수술이 필요한 환자들이 다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기에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응급 수술이 필요한 순서로 줄을 세우면, 이 환자가 첫 번째라는 점이었다.

즉 마이크 휴잇이 잘 본 셈이다.

“알겠습니다. 즉시 수술 준비하도록 지시하죠.”

도수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그를 봤다.

단지 가만히 서서 쳐다보는 것만으로 진단을 내렸는데 아무 의심도 품지 않다니.

이상해도 한참 이상하다.

마이크 휴잇이 그 시선을 느꼈는지 눈치껏 대답했다.

“닥터 리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죠. 검사 없이도 기가 막히게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시는 걸로… 제가 아직 완쾌되지도 않은 닥터 리를 여기로 모신 건, 마땅한 검사 기계도 없는 곳에서 환자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수술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도수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B&W도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매디 보웬의 말이 정확했다.

도수가 B&W를 의식하는 것처럼, B&W 역시 그를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는 뜻.

어쩌면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B&W가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지 않아.’

B&W에서 정말 심장성형제로 장난을 쳤다면, 그야말로 배수의 진을 치고 있는 괴물이나 다름없다. 그 이상 무슨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다는 의미.

B&W의 시선을 대신하는 대리인으로서 마이크 휴잇이 말했다.

“저도 수술에 참가해도 되겠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도수가 물었다.

“전공이?”

“저 역시 외상외과입니다. 그러니 재난 지역에 구호팀장으로 온 것이지요.”

구호팀장이었나.

고개를 끄덕인 도수가 말했다.

“어시스트를 서주십시오.”

아마 팀장급이라면 실력은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설령 도수의 실력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B&W에 어떤 내용을 보고한다 하더라도 개의치 않았다. 찝찝한 기분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당장 중요한 일은 환자를 살리는 것.

도수는 이런 때일수록 복잡한 생각을 버리고 본분에 충실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물론입니다.”

마이크 휴잇은 무슨 생각인지 알기 힘든 표정 그대로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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