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투입
도수는 그 즉시 장비를 받아서 착용했다.
바람막이부터 무전기까지 아로대나 천하대에서 쓰던 장비와는 비교가 안 됐다.
‘부럽네.’
위급한 상황에선 이런 장비 하나하나가 제 역할을 하느냐 못 하느냐에 구조팀과 의료팀, 환자의 목숨이 모두 달려 있었다.
그가 장비를 입고 있자.
바쁘게 움직이던 이하연이 지나가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 가세요?”
말투에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마찬가지로 초조한 표정의 그녀를 본 도수가 입을 열었다.
“출동 나가려고요.”
“저… 우리 관할도 아닌데, 안 나가시면 안 돼요?”
“걱정은 고맙지만, 환자 있는 곳에 의사가 가는 겁니다. 환자는 환자. 인종도 국적도 없어요.”
“아…….”
이하연은 잠시 고민하다 어렵사리 말을 건넸다.
“이런 말, 재수 없게 들리시겠지만… 비행기에서 악몽을 꿨어요. 꿈자리가 많이 찝찝해요, 센터장님.”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악몽 같긴 하죠.”
“그게 아니라…….”
이하연이 말을 잇지 못하자, 장비를 마저 입은 도수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불안하고 초조해서 그래요. 저도 전쟁터에 있을 때 매일 밤 악몽을 꾸곤 했습니다.”
“그거랑 느낌이 달라요.”
이하연은 표현할 말을 찾았다.
“뭔가 불안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 다 불안하겠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어요.”
“여자의 촉은 무시 못 한다던데.”
“그러니까요.”
“음.”
도수는 진짜 신경이 쓰였다. 비행이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 미룰 수 있으면 미루고 싶었다.
하지만.
“선택권이 있었다면 안 갔을 겁니다.”
“일본 의사들이 대신 가는데 왜…….”
“그들도 의사지만 저도 의사니까요. 그리고 우리가 다 간다고 해도 환자 모두를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해야죠.”
느낌이 안 좋은 날에도, 누군가 악몽을 꾼 날에도 비행기 기장은 비행을 하고 트럭 운전수는 운전을 한다.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대다수가 그렇다.
도수는 지금 자신이 맡은 소임이 그들이 하는 일보다 위급하다고 느꼈다. 모든 일이 중요하지만 이건 ‘시간’과 ‘사람 목숨’을 맞바꾸는 일이다. 더 급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도수는 미룰 수 없었다.
그 환자가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도수가 살리고 치료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이하연은 그 같은 마음을 표정에서부터 읽었다.
‘역시…….’
마음을 돌릴 수 없을 것 같아서 더 불안했건만.
역시 도수는 마음을 돌리지 않고 있었다.
이유야 어쨌든, 이럴수록 악몽에 대한 꺼림칙함은 더해만 갔다.
“제가 대신 갈게요.”
그녀의 용감한 판단에도.
도수는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남으세요. 지시하는 겁니다.”
“…따를 수 없다면요?”
“이곳에서 내보낼 겁니다.”
“왜 못 가게 하시는 거예요?”
“여기 분들을 도와서 빨리빨리 환자를 분류해 줄 사람이 필요해요. 그리고 혹시라도 응급 환자를 싣고 오게 되면 백업을 해줘야 하는데, 그러려면 손발 맞는 백업 인력이 병원에 남아야 합니다.”
물론 내심에는 현장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팀원들부터 앞세워 보낼 순 없다는 팀장으로서의 판단도 있었지만, 백업 인력을 위해서라는 합리적인 이유도 있었다.
천하대나 아로대에는 출동팀을 백업해 줄 의료진이 있었으나 이곳에는 마땅치 않은 것이다.
안 그래도 일본 대학병원 의료진과 손발을 맞추기 위해선 어느 정도 불협화음은 각오해야 할 터. 막상 응급 환자가 실려 오면 그렇게 실랑이 벌일 틈이 없으니 백업 인원들이 사전 조율까지 해줘야 한다.
이를 납득한 이하연은 마지못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더 이상 설득하지 못하자 도수는 아사다 류타로를 보았다.
“우리 팀원들 좀 돌봐주십시오. 의료 활동 하는 데에 문제없도록.”
“물론입니다.”
줄곧 눈치로 상황을 파악하던 아사다 류타로는 도수의 행동에 감동을 받았는지 대뜸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눈이 마주쳤다.
도수는 그의 진심을 읽을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인데요.”
의사가 환자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아사다 류타로의 관점에선 당연치 못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못 할 일이죠. 정말 용감하십니다.”
짧게 미소 지은 도수는 아사다 류타로의 어깨를 두드리곤 밖으로 나갔다.
타타타타타타타!
헬리콥터에서 환자를 내린 구조대원들과 의료팀이 쉴 틈 없이 다시 헬기에 오르고 있었다.
도수는 그중 가장 가까운 헬리콥터에 가서 외쳤다.
“합류하겠습니다!”
영어를 알아들은 의료진이 도수의 행색을 살피더니 안쪽으로 손짓했다.
“갑시다!”
고개를 끄덕인 도수가 헬리콥터에 올라탔다.
그리고 잠시 후.
헬기들이 한 대, 두 대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훨씬 더 체계적이다.’
일본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런 생각이 계속 들고 있었다.
재난에 신속한 대응을 하는 것은 물론, 목숨이 달린 일에 너도나도 발 벗고 나선다. 한국에서 선박 사고가 났을 당시 헬리콥터들이든 배든 선착장에서 꼼짝도 안 하던 것과는 천양지차였다.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인정할 부분은 인정해야만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
하나라도 더 배워가자고 다짐한 도수가 맞은편에서 구조장비를 체크하고 있는 의료팀 인원에게 물었다.
“현장 상황은 어떻습니까?”
“우리 몰골을 보세요! 아주 치열합니다!”
그들의 모습은 선박에서 구출 작전을 하던 의료팀들과 다를 바 없었다.
대답한 의료팀 인원의 옆에 앉은 남자가 말했다.
“아주 위험합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요!”
“전부 응급의학과를 전공한 분들이십니까?”
도수가 묻자 맞은편의 의료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상황이 급박하니 일단 가고 보는 거죠! 응급의학과 전공이십니까?”
“전 이것저것 전공하고 있습니다!”
“이것저것이요?”
“예! 중증외상, 심장, 뇌, 혈관… 한두 개가 아닙니다!”
“대단하시군요!”
혀를 내두른 의료팀 인원이 물었다.
“실력은 어떻습니까?”
“쓸 만합니다!”
“아직 젊은 의사인 것 같은데, 현장에 도착하면 최대한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가망이 없는 환자는 과감하게 포기하고 그 시간에 한 명의 생존자라도 더 구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도수는 순순히 대답했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보다 훨씬 더 많은 응급 상황을 겪었을 그였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누군지, 어떤 경험들을 해왔는지 설명하진 않았다.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대화가 있었다.
“재난 지역에 어떤 양상의 환자들이 있는지, 또 그들을 무슨 기준으로 분류해서 어떤 응급처치를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
도수는 비행하는 짧은 시간 동안 어떤 방식으로 구조 작전이 진행되는지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다행히 그가 생각했던 것과 큰 차이는 없었다.
그사이.
헬리콥터는 쓰나미가 뒤덮은 마을의 상공으로 진입했다.
“……!”
도수는 눈을 부릅떴다.
라크리마에서도 끔찍한 광경을 많이 봐왔지만 쓰나미는 또 다른 종류의 충격을 선사했다.
라크리마에서 본 장면은 인간이 인간을 대량 학살 하는 장면이다.
직관적으로 악마를 보았다.
반면 자연의 습격으로 인한 대량 학살은 공포를 넘어 장엄하기까지 했다.
“어디로 내려앉습니까?”
헬리콥터가 착륙할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반대편에 앉은 의료진이 대답했다.
“착륙은 못 합니다!”
“이런.”
구출에 시간 제약이 걸린다는 뜻.
도수가 물었다.
“인근 육지에 착륙한 후에 보트로 진입하면 안 되는 겁니까?”
“우린 이런 재난을 여러 차례 겪어왔습니다! 한 번이 끝이라고 장담할 수 없어요! 두 번, 세 번 후폭풍이 들이닥칠 수 있습니다!”
“아……!”
도수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2차, 3차로 대형 파도가 들이닥칠 경우 물 위에 떠 있는 모든 것들이 몰살당할 것이다.
그들이 이런 대화를 나누는 와중 헬리콥터가 상공에 멈추었다.
제법 높은 건물의 옥상이었을 곳이 지금은 바닷물에 잠겨 간신히 고개만 내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위태롭게 난간에 매달려 구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함께 헬기에 타있던 구조대원이 말했다.
“구출 개시하겠습니다!”
구조대원들은 장비를 착용하고 밧줄을 내렸다. 그리곤 레펠을 타고 내려가 아래 있는 인원들을 구출하기 시작했다.
“위급한 환자를 먼저 올릴 겁니다! 우린 구조대원들이 데려온 사람들이 살아서 병원까지 도착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면 됩니다!”
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펠을 탈 수 있다고 해서 구조대원들을 재끼고 자신이 나설 생각은 없었다.
잠시 후, 들것에 단단히 고정된 환자 한 명이 구조대원과 함께 올라왔다.
다행히 골절을 제외하면 큰 이상이 보이지 않는 환자였다.
즉시 환자 곁에 붙은 의료진이 응급처치를 시작하자.
구조대원이 말했다.
“큰일입니다!”
고글을 올린 그의 표정은 사색이었다.
불길한 느낌을 받은 의료진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사실 더 급한 환자가 있는데 이송이 힘들 것 같습니다!”
“이송이 힘들다고요?”
“예! 출혈이 너무 심해서… 움직일 때마다 상처가 벌어집니다!”
“이런……!”
의료진은 눈알을 굴렸다.
내려가서 어떻게든 지혈이라도 하면 병원까지 살길이 열릴지도 몰랐지만 일반인이 단번에 밧줄을 타고 내려가는 건 무리였다.
“혹시 보조해 줄 수 있습니까? 내려가겠습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구조대원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바람이 많이 부는데 제가 보조한다 해도 중심을 잃고 추락할 위험이 있습니다! 한 명이 당황해서 몸부림치면 보조하는 대원까지 함께 추락할 수도 있고요!”
“이런 젠장!”
의료진은 골절 환자의 환부를 고정시키며 욕설을 내뱉었다.
모두가 절망에 빠진 그때.
결국 도수가 나섰다.
“제가 가겠습니다!”
그는 어느새 레펠을 위한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다.
눈을 크게 뜬 구조대원이 물었다.
“방금 못 들으셨습니까? 너무 위험합니다!”
“전 레펠 교육을 받은 응급의학과 소속 의사입니다!”
도수의 말을 들은 의료진들이 화색을 띠었다.
그러나 구조대원은 아니었다.
“교육을 받은 것과 실전은 다릅니다! 특히 이런 바람 부는 날에는…….”
도수가 현장 경험이 없다고 여긴 것이다. 그가 어떠한 상황에서 레펠을 타왔는지 알게 된다면 구조대원도 한 수 접어줄 터였다.
그러나 도수는 구차한 설명 대신 밧줄을 단단히 잡으며 외쳤다.
“안 가시면 혼자 가도 되겠습니까?”
“이런… 정말 위험합니다!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몰라요! 그러다 사고라도 나면 제가 책임질 수 없단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아래 있는 환자가 더 위험해요! 안 그렇습니까?”
“…….”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목숨 걸고 온 겁니다! 환자를 구하기 위해서요! 그럼 구해야죠! 안 갈 겁니까?”
도수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대원이 바짝 붙었다.
“대신 몸에 힘을 푸시고 저한테 의지하십시오.”
“그러죠.”
도수가 순순히 대답했고.
구조대원은 도수를 껴안은 형태로 밧줄을 잡았다.
“갑니다. 하강!”
탓!
헬기를 박찬 두 사람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쉬이이이이이익!
한데 문득.
구조대원은 그 짧은 순간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조하는 게 아니라 딸려가는 느낌이 들 정도로 도수는 능숙했다.
‘뭐지?’
의사가 아닌 웬만한 해양구조대 레펠대원들의 실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의사가……!’
그러나 너무 순식간이라 묻고 대답할 여유까진 없었다.
제법 바람이 불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게 옥상 바닥에 착지한 도수가 즉시 장비를 풀며 환자에게 다가갔다.
누가 출혈이 심환 환자인지는, 굳이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러 명의 사람들이 바짝 붙어서 급한 대로 겉옷을 벗어 덧대고 있었으니까.
“의사입니다!”
도수의 말에 그들이 화색을 표했다.
“의사가 왔어! 살았어!”
“조금만 힘내요!”
사람들의 격려 속에.
미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여자의 안색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시간이 많지 않을 것 같은데.’
도수가 사람들을 헤치고 그녀 앞에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그리곤 천천히 지혈이 전혀 안 되고 있는 젖은 겉옷을 치웠다.
질질.
피가 흐르고 있었다.
구조대원 말처럼 움직이는 자체가 힘들 만큼 상처가 깊었다.
샤아아아아아아.
투시력을 쓰자.
총에 맞은 것처럼 뻥 뚫린 상처들이 보였다.
나사였다.
난간에서 튕겨 나갔는지, 나사 두 개가 옆구리와 겨드랑이 아래쪽을 뚫어버린 것이다.
심지어 한 개의 나사는 아직 몸속에 박혀 있었다.
끔찍한 상황이었지만 총상(銃傷)과 흡사한 이런 상처는 도수의 전문 분야.
그가 가방에서 의료 도구들과 입에 물릴 재갈을 꺼내며 말했다.
“좀 아플 겁니다. 다른 분들은 환자분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꽉 잡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