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일본에서
며칠 후.
도수는 아사다 류타로, 그리고 강미소, 이하연, 나유하와 함께 인천공항에서 출발했다.
남자 둘, 여자 셋.
그마저도 한 명은 동일본 대학 소속이다.
도수가 이렇게 여자들 사이에 둘러싸인 것은 결코 의도한 게 아니었다.
그는 사인만 했고, 근무표를 짠 것은 김광석 교수.
김광석에 말에 의하면 도수를 가장 잘 보조해 줄 수 있는, 호흡을 가장 많이 맞춰본 수술 보조 강미소. 그리고 수술실 경험이 가장 많은 간호사 이하연. 마지막으로 임옥순 여사의 특별한 부탁에 의해 일본으로 가게 된 나유하를 자연스럽게 포함시킨 것이다.
근무표와 함께 연수 명단을 건넨 김광석은 짧게 덧붙였다.
“아직 동일본에 쓰나미가 들이닥친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어떤 비상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니 일 차 파견팀은 최정예로 구성하는 게 맞습니다.”
라고.
그럼에도 김광석을 비롯한 교수급 인력이 함께 가지 않는 것은 이 차 파견팀의 팀장 역할을 수행할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한 명은 병원에 쭉 남아 파견된 사람들의 빈자리를 채우고, 돌아온 사람들에게 그간의 병원 상황을 인수인계해야 하고.
이렇게 결정된 일 차 파견팀은 정작 팀 구성에 신경 쓸 새도 없이 비행기에 타자마자 정신없이 잤다. 그동안 충분히 잠을 못 잤기에 완전히 곯아떨어진 것이다.
언제 환자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병원에선 무의식중에 긴장을 하곤 하는데 비행기에 타니 긴장이 탁 풀어진 까닭이다.
그들이 잠든 사이.
나리타국제공항까진 약 두 시간이 걸렸다.
두 시간 뒤, 네 사람은 일본에 있었다.
“벌써 도착했나 봐요.”
이하연이 강미소를 흔들어 깨우며 말했다.
눈을 뜬 강미소가 길게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아우, 아직 피곤한데. 센터장님은요?”
“절 깨우신 게 센터장님이에요.”
이하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 와중에도 도수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다소 잠이 덜 깬 표정으로 창문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다.
“역시 철벽.”
강미소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편, 두 사람이 깨기 전부터 창문밖을 예의주시하던 도수는 여간 심각한 얼굴이 아니었다.
“쉽지 않겠군요.”
그 말에 아사다 류타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은 재난에 익숙한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가 이렇게 될 정도면 어마어마한 재앙이 들이닥쳤다는 뜻이지요.”
그는 침착하려 하고 있었지만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당연히, 한국에서 터진 사고 수습에 나섰을 때보다 훨씬 격앙된 모습이었다.
도수는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서 우리가 온 겁니다.”
“감사합니다.”
아사다 류타로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유일하게 잠들지 않고 창밖을 주시하고 있던 나유하가 입을 열었다.
“정말 괜찮을까요?”
다른 인원들도 마찬가지로 그녀도 처음이었다. 집과 건물이 도미노처럼 쓰러진 참혹한 광경을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은.
그러나 다른 인원들과 다른 점은.
끔찍한 상황을 숱하게 맞닥뜨렸던 의사가 아닌, 소녀 감성 충만한 여고생이란 점이다.
더구나 곱게 자란 재벌가 외동딸의 인생에 이런 장면이 끼어드는 것을 상상이나 해봤겠는가?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보던 상황을 직접 마주한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고 핼쑥하게 질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도수가 말했다.
“도착하면, 서로 챙겨줄 수 없을 만큼 바빠질 겁니다.”
“…….”
나유하는 자존심이 상했다.
도수의 한마디는 ‘방해가 되지 말라’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전 일본어에 능통해요. 저도 도울게요.”
“일본어 할 줄 알아요?”
“오 개 국어 하는데요.”
“……!”
도수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나유하는 콧대가 올라갔다.
“굳이 티 안 낸 것뿐이에요. 어차피 여기 아사다 선생님이랑 다른 분들 모두 영어로 대화하니까.”
제 이 외국어로 일본어를 선택했다던 강미소만 간간이 일어를 쓸 뿐, 모두 영어를 썼다.
강미소 또한 그리 능통한 편이 아니었기에 나유하의 존재는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그럼 우리 팀 통역을 맡아주십시오.”
“좋아요.”
흔쾌히 승낙한 나유하는 천천히 하강하는 비행기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서워.’
문득 두려움이 치밀었다.
처음 일본행을 결정했을 때의 모험심은 직접 맞닥뜨린 공포 뒤에 가려졌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도수의 얼굴을 본 그녀는 왠지 담담한 표정의 도수도 비슷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동질감을 받았다.
그저 그는 내색하지 않는 것뿐이다.
속마음이 들키는 순간 두려움을 인정하는 게 될까 봐.
진짜 공포심을 느끼고 망설이게 될까봐 그것을 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지지 않을 거야.’
이를 꽉 깨무는 나유하.
그녀는 왜 할머니가 일본행을 말리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할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중요한 존재일수록 더 강해지길 바라고 더 밖으로 내돌리는.
이건 가족이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
비행기가 착륙하고.
입국 수속까지 마친 뒤 아사다 류타로가 일행을 보며 말했다.
“밖에 차량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후아, 벌써부터 실감이 나는데요.”
강미소였다.
미처 비행기에서 창밖을 보지 못했던 그녀는 이제야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녀 말처럼, 니카타 국제공항에는 많은 경찰과 구조대 인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들에게 눈길을 준 아사다 류타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평소보다 많은 비상 인력이 와 있군요.”
“…….”
일행이 말이 없자.
도수가 나섰다.
“가시죠.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공항 밖으로 나갔다.
대형세단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사다 류타로가 보조석에 타며 말했다.
“타시죠. 병원까지 모시겠습니다.”
나머지 일행은 서로 자리를 좁혀서 탔다.
부르릉.
차량은 고급 세단임을 증명하듯 부드럽게 출발했다.
아사다 류타로가 운전기사에게 물었다.
“일본 상황은 어떻습니까?”
“처음에는 쓰나미였습니다. 인근 마을이 물에 잠기면서 실종자가 발생했죠. 문제는 그 직후에 지진이 터졌단 겁니다. 지지층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에서 일어난 지진이라 내진 설계가 잘 된 건물들도 속절없이 무너지면서 피해가 컸습니다.”
“…….”
끔찍한 상황이었다.
아사다 류타로가 이를 악무는 순간.
운전기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전례 없는 대재앙입니다. 재난 대응을 전문으로 하는 NPO(Non Profit Organization: 국가와 시장을 제외한 제3의 비영리단체)는 물론 전국의 일반 기업들과 병원들에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지만… 그럼에도 수습이 힘들 정도로 사상자가 많은 상태입니다.”
“그런 것 같군요.”
아사다 류타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쩍쩍 갈라진 도로, 기울어진 신호등만 봐도 지진의 여파를 짐작할 수 있었다.
“비행기를 운행하는 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운행을 재개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비행기가 쓰러질 정도였으니까요.”
운을 뗀 운전기사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쪽 사정은 그나마 나은 편입니다. 지진과 쓰나미가 동시에 들이닥친 곳은 모든 교통과 시설이 마비 상태입니다. 구조대나 의료팀도 위험을 무릅쓰고 접근해야 하는 지경이에요.”
“음.”
신음을 흘린 아사다 류타로가 말했다.
“최대한 빨리 가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운전기사가 속도를 올렸다.
그같은 대화를 나유하의 입을 통해 모두 전달받은 천하대 의료팀의 얼굴도 굳어져 있었다.
“상황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데요.”
이하연이 말했고.
도수가 맞장구를 쳤다.
“우리가 보는 건 뉴스에 나오는 헤드라인 한, 두 줄과 멀리서 찍은 영상 정도니까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강미소가 속삭였다.
“이 모습을 실제로 봐도 일본이 재난에 시달리는 걸 잘 됐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혼잣말이었으나 팀원들에게는 들렸다.
“…….”
그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스쳐 지나가는 광경들을 보고 짐작하건대, 이 모습을 직접 본다면 아무리 일본에 깊은 한을 품은 사람이라도 ‘잘됐다’는 말은 하지 못할 것이다.
재난이 할퀴고 간 자리.
곳곳에 줄 쳐진 노란색 폴리스라인과 그곳에서 구조작전을 펼치고 있는 구조 인력들. 구조되자마자 들것에 실려 움직이는 피해자들. 접근 금지 표시가 붙은 표지판들과 건물이나 집집마다 깨진 유리창. 벽이건 바닥이건 할 것 없이 온갖 곳에 쩍쩍 갈라진 금이 보였고. 오죽하면 고가 다리도 크게 기울어 있었다. 언제든 무너질 것처럼. 그래서인지 그 앞에 크레인이 이 상황을 수습하고 있다.
“세기말 같네요.”
강미소가 말했다.
그녀 말처럼 회색빛 하늘과 강풍이 부는 날씨에 더불어 주위 광경은 더욱 음침한 분위기를 풍겨대고 있었다.
그야말로 아포칼립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것이다.
모두가 할 말을 잃은 사이.
그들이 탄 차는 동일본병원에 도착했다.
일본 최대, 최고의 병원이라던 동일본병원도 재난의 손찌검에선 안전하지 못했다.
“병원 건물도 다시 보수해야겠군요.”
아사다 류타로가 말했고.
일행들은 혹시 건물이 무너지진 않을까 불안한 표정으로 들어가야 했다.
이렇게 불안정한 모습임에도.
병원 안은 북적이고 있었다.
재난에 휘말린 환자들이 밀물처럼 들어와 병원을 포화 상태로 만들고 있었고, 의료진들도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시장바닥 같은 실내를 한 차례 훑은 아사다 류타로는 가까이에 있는 늙은 의사에게 갔다.
“저 왔습니다.”
머리가 하얗게 샌 의사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로 도끼눈을 떴다.
“뭘 하다 이제 돌아와?”
“죄송합니다.”
아사다 류타로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한 발 옆으로 비켜서며 일행들을 보여주었다.
“…그래도 이렇게 든든한 지원군을 데려왔다구요.”
그를 한 번 쏘아본 노인이 표정을 풀고 도수에게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동일본병원 병원장 사카구치 소이치로입니다.”
“이도수입니다.”
“이사장께서 말씀하신 그분이로군요.”
사카구치 소이치로가 눈을 빛냈다.
그것도 잠시.
그는 감동을 전하듯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이렇게 먼 곳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사다 선생님께서도 한국에서 있었던 사고 수습 때 도움을 많이 주셨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연수를 오신 건데 보시다시피 상황이 이러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씁쓸한 미소를 짓는 사카구치 소이치로.
도수는 그가 기다리고 있을 한마디를 꺼냈다.
“상황을 보니 인사는 나중으로 미루는 편이 좋겠습니다. 저희도 바로 환자들을 보겠습니다.”
“그래주시겠습니까?”
“예. 원활하게 진료를 볼 수 있도록 이 부분에 대해 다른 분들에게도 전달해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사카구치 소이치로의 대답을 들은 도수는 손을 놓고 팀원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팀원들이 여행 가방을 내려놓고 즉시 행동에 나섰다.
이런 상황을 예측한 듯 불평 한마디 없이 움직이는 팀원들을 보던 사카구치 소이치로가 고개를 숙였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살짝 목례한 도수.
그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내려앉는 헬기들로 향한 것이다.
타타타타타타타타타!
한 기의 헬기가 아니었다.
무려 다섯 기나 됐다.
그의 시선을 좇은 사카구치 소이치로가 말했다.
“…또 환자들이 들어왔나 봅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도수가 묻자.
말뜻을 알아챈 사카구치 소이치로가 대답했다.
“피해가 막심한 인근 지역으로 직접 들어가서 대피소에 물자를 내리고, 응급 환자들부터 구출해 오고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도수.
그가 말했다.
“저희 팀은 환자 분류만 돕고, 저는 저쪽으로 투입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직접 출동하신다구요?”
“네.”
“위험한 일입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도와주려 하시는 겁니까?”
“효율적으로 사상자들을 구출하려는 것뿐입니다.”
“효율적으로요?”
“예. 환자 분류는 저희 팀원들이 충분히 거들 수 있고, 제가 이쪽에 남으면 할 일은 환자들을 검사하고 진단하고 수술하는 건데 기존 병원 시스템과 충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돌아가는 체계도 모르고 누가 어느 과인지 구성원들에 대한 이해도도 낮으니까요.”
“아…….”
“일단 그걸 파악할 때까진 출동 인력에 쪽에 포함시켜 주십시오.”
도수의 시선은 비바람과 헬기 너머에 있었다.
두려움보다 현장에서 발생한 환자를 구하려는 열망이 더 큰 것이다.
아니, 오직 그것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일리 있는 내용이었기에 사카구치 소이치로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조치할 터이니 부디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는 그.
도수 역시 짧게 목례했다.
“바로 움직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