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의혹
열 시까진 아직 네 시간이 더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응급실에서의 네 시간은 사십 분처럼 짧았다.
그사이 헬기가 두 번이나 떴다.
환자가 밀려들어 올수록 의료진들도 빠르게 지쳐갔다.
그래서 미리미리 예정된 수술을 이른 시간으로 당긴다고 당긴 건데, 그래도 녹초가 다 돼서 들어가게 생겼다.
‘인원을 더 뽑아야 할 텐데.’
도수는 충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애초에 지원자도 없는 마당에 누굴 뽑을 수 있단 말인가?
“후.”
아침부터 줄기차게 들이닥치는 환자들.
가벼운 배탈이나 몸살을 앓는 환자부터 골절이나 절단 등 아침부터 변을 당한 환자들도 있었다.
그중에서 덜 중요한 환자는 없다.
당장 수술이 필요한 환자도 긴급하지만, 별게 아닌 줄 알았던 증상으로부터 거대한 뿌리가 발견될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도수는 단 한 명의 환자도 가볍게 지나치지 않았다.
그러나 가끔은, 정말 나이롱환자도 존재했다.
“아프다고! 아파죽겠다고! 진통제 달라고! 아주 센 걸로!”
고래고래 악을 쓰는 사십 대 남자 환자.
“그렇게 막 처방을 내드릴 순 없습니다.”
도수가 말했다.
“검사 결과도 이상이 없으시고 진통제도 듣질 않으니…….”
“그래서 뭐? 그냥 참으라고? 아고고, 나 죽네! 더 센 걸로 주면 되잖아! 진통제 줘, 진통제!”
양옆으로 데굴데굴 구르는 환자.
도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샤아아아아아아아.
투시력을 발휘한 결과.
이번에도 환자의 몸속은 큰 문제가 없었다.
그래도 언제나 ‘만약’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를 그냥 저렇게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
도수는 투시력을 키웠다.
샤아아아아아아아.
그 순간.
두근!
심장이 크게 뛰었다.
“헉.”
도수는 자기도 모르게 가슴을 부여잡으며 휘청거렸다.
“뭐야? 왜 이래?”
환자의 당황한 표정이 보였으나.
도수는 그조차 신경 쓸 겨를이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두근! 두근!
심박수가 달라진 게 아니다.
심장이 평소보다 훨씬 큰 폭으로 박동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이고, 지금껏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런 젠장. 왜 이러는 거야?’
도수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속으로 물었다. 그러나 대답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당장 심장마비가 와서 쓰러져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상태.
도수는 입을 벙긋거렸지만 뭐라 말이 안 나왔다.
“여기요!”
오히려 환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병원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파 죽겠다던 환자는 어디 가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환자만 남아 있었다.
‘역시.’
도수는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걸 확인했다.
환자는 나이롱이 맞았다.
하지만 도수는 진짜 환자가 될 판이었다.
‘왜 이런 거지? 투시력을 무리하게 써서?’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근래 몇 번이나 무리해서 투시력을 사용했으니까.
그 후폭풍이 닥친 거라면 받아들일 테지만 왜 하필 지금이란 말인가?
열 시에는 정동진 환자의 뇌출혈 수술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동진 환자의 바람대로 언론인들을 불러서 진행하는 수술인 것은 둘째 치고, 아무나 다 할 수 없는 수술이라는 점이 꼭 도수가 필요한 이유였다.
“안 돼.”
어?
말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심장에서 느껴지던 부담도 점차 완화되어 가고 있었다.
스으으으으.
두근, 두근, 두근.
정상적으로 돌아온 심장박동.
때마침 우르르 달려온 의료진들이 물었다.
“괜찮으세요?”
“센터장님, 갑자기 왜 그러세요?”
“무슨 일입니까?”
듣고 있던 도수가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별일 아니에요.”
“별일 아니긴요. 너무 무리하셔서 그렇습니다.”
“맞아요. 좀 쉬다 수술 들어가시죠. 아니면 뇌수술이니 그 수술은 신경외과로 넘기시거나…….”
“아뇨.”
도수가 고개를 저었다.
“진짜 괜찮아요.”
문제는.
다시 투시력을 쓰기가 두려워진다는 점이다.
무심코 멀쩡히 돌아다니는 나이롱환자에게 고개를 돌린 순간.
“아!”
투시력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상태란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놀란 점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전과는 다른 세상이 보이고 있었다.
예전에는 해부학 책이나 실습장에서 자주 보던 인형과 흡사하게 상대방 몸속을 투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단순히 그런 투시력이 아니었다.
‘능력이 달라졌어.’
핸드폰으로 치면 스마트폰이 처음 나왔을 때의 혁신, 컴퓨터 게임으로 치면 쓰리디 게임이 처음 나왔을 때의 충격만큼이나 보이는 것들이 변했다.
근육, 혈관, 장기들은 더 선명해졌으며.
환자의 혈관 속에 흐르는 피에 섞인 이물질까지 햇빛에 반사된 강물이 반짝이듯 색색깔로 반짝이고 있었다.
뭐가 어떤 이물질인지 한눈에 알아볼 순 없었지만 혈액이 정순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도수는 몰려든 의료진들을 보며 말했다.
“환자분 소변검사랑 혈액검사 해주세요.”
환자가 눈을 부릅떴다.
“소변검사나 혈액검사는 왜? 난 건강검진을 받으러 온 게 아니야! 엑스레이나 씨티상에도 아무 문제없다고…….”
“그 검사들에서 문제가 안 나왔는데 통증이 계속된다. 그럼 할 수 있는 검사들을 더 해봐야죠. 필요한 검사들이니 꼭 받으세요.”
몸속을 꼼꼼히 살펴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통증을 호소하며 센 진통제를 달라고 떼를 쓴다. 그러다가도 의료진들을 부를 땐 또 멀쩡했다. 정황뿐이지만 종합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하나였다.
‘마약 중독.’
아마도.
맞을 것이다.
역시나 남자는 소변검사와 혈액검사를 회피했다.
“됐어! 이거 놔요. 나 퇴원하게…….”
그가 황급히 자리를 피하려 하자.
도수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처방이라도 받고 가세요. 계속 아프실 순 없으니.”
그제야 한숨을 내쉰 남자가 활짝 웃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별말씀을.”
가볍게 대답한 도수는 처치실을 나가서 의료진을 붙잡고 말했다.
“오브이 삼이구(OV329: 마약 중독 치료제의 일종) 주세요.”
“센터장님 설마.”
“경찰도 부르시고요.”
“알겠습니다.”
의료진이 알아듣자.
도수는 투시력을 통해 방금 봤던 것들을 떠올렸다.
‘그동안 무리해서 투시력을 사용했다. 그런데 투시력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이 더 구체적으로 변했어.’
투시력을 사용하는 방법은 집중력을 극한까지 끌어 올리는 것.
집중력이 일정 범위 안에 들어서면 투시력이 발휘된다.
즉, 투시력의 지속 시간은 체력에서 나오고, 투시력의 강도나 정확도는 집중력에서 나온다는 뜻인데.
‘집중력을 향상시키면 지금보다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게 되는 건가?’
그런 의문이 들었다.
어디까지 볼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집중력을 키워야 한다.
투시력은 외과의에게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투시력이 늘어난다면 써전으로서의 역량도 향상된다. 그럼 더 많은 환자를 살릴 수 있다.
문제는.
‘일반적인 방법으론 안 돼.’
도수는 단정 지었다.
수술을 반복해도 쉽게 늘지 않는 집중력이다.
수술보다 더 집중할 만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결국 투시력을 더 개발하려면 지금처럼 끊임없는 수술을 해서 집중력 스탯을 쌓아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마약 중독 환자가 있는 처치실을 빤히 응시하던 도수는 문득 엘리베이터로 시선을 옮겨갔다.
‘어쩌면.’
못 보던 걸 볼 수 있게 됐으니, CIA 엄승진 환자의 심장이 녹아내린 이유를 밝힐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혈액검사에서도 밝혀지지 않은 걸 도수의 투시력이 밝혀낼 수 있다고 확신하진 못하지만, 기대를 걸어보는 것이다.
“저 잠깐 병동 좀 올라갔다 올게요.”
“센터장님, 곧 수술 들어가셔야 하는데요.”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
병동에 가서 엄승진을 만난 도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뭔가 발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한층 강력해진 투시력으로도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었다.
망연자실한 채 서 있는데, 엄승진이 말을 걸었다.
“선생님.”
“네.”
“지난번에… 복용했던 약에 관해 물어보셨죠?”
“생각 난 게 있으십니까?”
“후…….”
왜인지, 엄승진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밀로 해주신다고 약속해 주시면 얘기하겠습니다.”
“어디 가서 말할 데도 없습니다.”
엄승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렵사리 입을 뗐다.
“사실… 전 마약을 복용하고 있습니다.”
“마약이요?”
바로 전에도 마약 중독자를 만났는데 이번엔 원래 치료하던 환자가 마약 중독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연일까?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엄승진이 얘기를 계속했다.
“아마 양성 반응이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저도 그걸 알고 손을 댔던 거니까요.”
“어떤 마약이죠?”
“일단 통증 완화 효과가 뛰어납니다. 그냥 진통제 수준이 아니라 언제 아팠냐는 듯 괜찮아져요. 그렇지 않고 제 심장이 멀쩡했더라면 약을 하진 않았을 겁니다.”
도수가 듣고 싶은 것은 변명이 아니었다.
“어떻게 구한 겁니까?”
“멕시코에서 마약을 밀반입하는 놈들을 잡았을 때 빼돌린 겁니다. 그 후에도 계속 조금씩 빼돌려서 복용을 했고요.”
“…….”
“누구한테 얘기하실 겁니까?”
“아뇨.”
도수가 고개를 저었다.
“얘기 안 합니다.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까?”
“지금은 없습니다.”
한숨 쉰 엄승진이 말을 이었다.
“이렇게 오래 있다 돌아가게 될 줄 몰랐으니까요. 미국에 있습니다.”
“목숨이 달린 일인데, 왜 처음부터 얘기하지 않은 거죠?”
“그것 때문에 심장에 문제가 생겼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자체적으로 성분을 의뢰해서 결과를 받아봤을 때도 그런 부작용에 대한 건 없었습니다.”
CIA이니 충분히 성분 의뢰를 했을 것이다.
의뢰 결과는 의심할 필요가 없다.
최고의 정보기관에서 분석한 결과니까.
그 말인즉 그들도 밝혀내지 못한 걸 도수 역시 밝혀낼 수 없다는 의미기도 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말 심장이 녹은 게 마약 때문이라면 상황이 심각하다.
어머니의 심장이 녹은 이유는 미완성된 B&W의 심장성형제를 복용했기 때문.
그런데 여기서 엄승진의 심장이 녹은 이유가 마약 때문이라면 의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B&W와 마약제조업체 간의 결탁.
‘일이 복잡해지는군.’
미간을 찌푸린 도수가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정말 그 외에 복용한 약물은 없었습니까?”
“특별한 약은 없었습니다.”
“심장 관련된 약은요?”
“약이나 있나요.”
“…….”
도수는 일단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선 다시 얘기하기로 하죠.”
비록 강화된 투시력으로도 엄승진이 심장이 녹은 원인을 찾아내진 못했으나.
엄승진의 진실 고백을 통해 심장이 녹는 현상을 만드는 주범에 한발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수술이 끝날 때까진 신경 쓰지 말자.’
병동을 나선 도수는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바로 수술실로 향했다. 지금쯤이면 뇌출혈 환자 정동진이 수술대 위에 누워있을 것이다. 참관실에는 기자들이 모여들었을 테고.
촤아아아아아!
손을 꼼꼼히 닦고 물기까지 제거한 도수는 수술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러자.
강미소, 이하연을 비롯한 신경외과 레지던트 한 명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은 도수가 이하연이 장갑을 씌워주는 사이, 참관실로 눈길을 돌렸다.
카메라 대신 펜을 든 기자들이 수술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외에도 병원 간부들이 참관하는 상황이었다.
왜 기자 한 명한테 이런 관심이 쏟아지는 걸까?
오성병원에서 정동진 기자 한 명을 데려가기 위해 수십 명의 환자를 떠맡으려 했던 것부터가 수상했다.
하지만 도수는 고개를 저어 생각을 떨쳐냈다. 그가 누군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는 뇌출혈 환자다.
그리고 도수가 치료해야 할 대상이었다.
환자 곁에 선 도수는 투시력을 발휘했다.
샤아아아아아아아아.
더 선명해진 투시력이 머릿속을 비추고 있었다.
“칼.”
이제, 다시 싸움을 치를 순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