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여난(女亂)
번쩍.
눈을 뜬 도수는 연구실에 있는 간이침대에서 일어나 트레이닝복을 입고 병원을 나섰다.
“후…….”
새하얀 입김이 퍼져 나갔다.
분명 잠이 든 건 아직 어두운 새벽이었는데, 해가 뜨기도 전 파란 새벽하늘을 보며 일어났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찾는 환자가 뜸한 시간.
다시 말해 지금 이 시간만이 도수의 유일한 개인 시간이었던 것이다.
‘아직도 체력이 한참 달린다.’
현재 투시력은 하루에 두세 건의 큰 수술을 할 정도. 환자 상태나 수술 과정에 따라 편차가 있긴 했지만 평균적으로 그 정도 수술을 하고 나면 체력이 바닥이 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진단’ 목적의 투시력은 횟수 제한이 사실상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이번 홀릭호 침몰 사고 같은 사건이 또 일어나지 말라는 보장이 없으니, 꾸준히 체력을 늘리는 활동이 필요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운동을 장기간 쉬게 되면 체력이 떨어지고, 투시력의 사용 횟수나 시간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잠을 줄이는 수밖에.’
결국 결론은 이것이다.
한 명의 환자라도 더 받고 싶으면 억지로 짬을 내서라도 운동을 하는 방법밖에 없다.
휘이이이이.
세찬 바람에 몸이 으슬으슬하게 떨려왔다.
일견 춥고 배고프고 졸린 거지꼴이지만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면 정신을 일깨워 주는 날씨기도 했다.
아침부터 축축 처지는 여름에 비하면 겨울이 차라리 나았다.
“가자.”
짝!
뺨을 소리나게 때린 도수는 달리기 시작했다.
타타탓!
체력을 키우려는 목적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속력을 냈다.
“후우, 후.”
숨을 고르며 뛰는 도수.
틈날 때마다 항상 이런 식으로 체력을 키웠기 때문에 이젠 숨 쉬는 것도 여느 육상 선수 못지않았다.
드넓은 천하대병원 부지를 한 바퀴 돌 무렵.
반대편에서 한 사람이 뛰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놀랍게도 그녀는 강미소였다.
“어? 센터장님!”
강미소가 천천히 멈춰 섰다.
도수 역시 그녀 앞에 멈춰서 물었다.
“새벽부터 웬일이에요?”
“요즘 통 운동을 못 한 것 같아서.”
코끝을 문지른 그녀가 되물었다.
“그런데 센터장님은요? 들어가신 지 얼마 안 되셨잖아요.”
그것도 집이 아닌 연구실로 들어갔다.
어깨를 으쓱인 도수가 말했다.
“체력 관리를 좀 해야 될 것 같아서요.”
“에이, 센터장님은 체력 좋으신건데.”
“…그런가?”
“그렇죠. 다른 교수님들은 하루에 수술 한두 건만 잡혀도 한숨을 쉬시는데 센터장님은 그런 수술을 몇 건씩 하시잖아요. 잠도 못 주무시면서.”
강미소가 보기에 그렇더라도.
도수가 부족하다고 느끼면 부족한 것이다.
“뭐, 체력은 좋을수록 좋죠.”
“무리하시다 쓰러지실까 봐 그러죠.”
“그러는 강미소 선생도 늦게 들어간 걸로 아는데?”
“전 센터장님과 다르죠.”
“뭐가요?”
“큰 수술은 보조만 하지 직접 집도하지 않잖아요. 센터장님처럼 여러번 수술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
“센터장님은 아직 어리시니까 그런 생각 안 하시겠지만 전 슬슬 연애도 하고 시집도 가야죠. 남자 만나려면 꾸준히 몸매 관리도 해야 하는 거고.”
항상 진흙탕에 파묻혀 보다 보니 신경 쓸 겨를이 없었지만, 그녀는 화장기 없이도 충분히 아름다운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관리를 해주지 않으면 그런 천부적인 미모도 시들기 마련.
“하긴.”
도수가 수긍하자.
강미소가 눈을 흘겼다.
“그 반응 뭐예요?”
“운동 열심히 하라는 겁니다.”
“제 몸매가 평소에 마음에 안 드셨어요?”
“무슨.”
“그럼 제 혼삿길 걱정해 주시는 거예요?”
“일하다 먼저 퍼지면 안 되니까 얘기하는 겁니다.”
“에휴…….”
한숨을 내쉰 강미소가 말을 이었다.
“하긴, 일만 아는 센터장님한테 기대한 제가 바보죠.”
도수가 피식 웃었다.
“다 알고 왔으면서.”
사람 만날 시간도, 연애할 시간도 없다는 것을 미리 알고 동참한 것이다.
그러고도 아직까지 남아 있는 걸 보면.
강미소의 불평불만은 진심 어린 생각이 아니었다.
역시, 그녀가 말했다.
“그래도 전 아직 환자 보는 게 더 좋아요.”
“그 마음 최대한 오래 가길 바랍니다.”
“매정하셔라.”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웃었다.
그리고는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강미소는 도수의 등을 보게 됐다. 점점 거리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질 수 없지.’
강미소는 속력을 올렸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뭐 하나 남한테 지는 걸 못 참던 그녀다. 그래서 항상 시험을 보면 전교 일등만 했고, 체육대회 때 개인 종목을 겨루면 우승까지 거머쥐었다. 거기다 얼굴까지 예쁘고 집도 중산층 의사 집안이니 모든 남학생들에게 우상시 됐다. 그럼에도 그녀가 제대로 된 연애 한번 해보지 못한 건 최고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남들이 놀 때 공부하고 쉴 때 운동을 했다.
그렇게 전국 상위권에서 놀던 그녀는 당시 이슈가 됐던 아로대학병원 김광석 교수에게 큰 영감을 받았고, 천하대를 마다하고 아로대학병원 중증외상센터에 자원했다. 그랬던 그녀가 천하대에서 근무하게 될 줄은 그녀 역시 상상도 못 했던 미래다.
‘네 등을 보고 여기까지 왔지만… 결국은 너와 대등한 위치에 설 거야!’
도수와 같은 써전이 되는 것이야말로 모든 외과의들의 꿈일 것이다.
강미소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녀가 오버페이스로 쫓아오자 도수는 속력을 더 올렸다. 지는 걸 싫어하기로는 그 역시 누구 못지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퍼억!
“꺅!”
뒤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내리막길에서 무리하게 내달리던 강미소가 발이 엉켜 앞으로 고꾸라진 것이다.
도수는 뛰던 속도를 줄이며 멈췄다.
“괜찮아요?”
오르막을 올라간 그가 묻자, 앉아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강미소가 도수를 쳐다봤다.
“아뇨. 못 움직이겠는데.”
도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기가 지나치면 다칠 수밖에 없어요.”
손을 내미는 그.
강미소는 그 손을 맞잡고 일어나다가 비틀거리며 다시 주저앉았다.
“오기 부린 결과가 안 좋네요. 전 이대로 좀 앉아 있다가 뒤따라갈게요.”
무릎이 찢어지는 바람에 미끈한 다리 위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빤히 보던 도수는 말없이 투시력을 썼다.
샤아아아아.
뼈와 근육이 눈에 들어왔지만 크게 손상된 지점은 보이지 않았다.
큰 부상은 아니란 뜻이다.
조금 쉬면 괜찮아질 테지만, 이 추운 날씨에 아스팔트 바닥에 한참을 앉아 있게 하기는 좀 그랬다.
어차피 운동하는 거.
도수는 방식을 바꾸었다.
“업혀요.”
그가 등을 보이고 쪼그려 앉았다.
뛰는 것도 운동이지만 업고 걷는 것도 어느 정도 근력운동이 될 터였다.
강미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요?”
원래 그녀 성격 같으면 거부했겠지만, 상대가 상대다 보니 호기심이 샘솟았다.
“제가 알던 센터장님보다 너무 자비로우신데.”
“…빨리 안 업히면 그냥 갑니다.”
“헤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강미소가 냉큼 등에 올라탔다.
도수는 그녀를 업었다.
조금 과장해서 깃털처럼 가벼웠다.
“대단하네요.”
도수가 걸으며 말하자.
강미소가 물었다.
“대단히 무겁다고요?”
“그 반댑니다.”
미소 지은 도수가 말을 이었다.
“이렇게 업어보니 오십 킬로도 안 되는 것 같은데 백 킬로가 넘는 환자들을 실은 스트레쳐카를 밀고, 옮기고, 눕히고 다 하잖아요.”
“제가 보기보다 힘이 좀 세거든요.”
이렇게 가벼운 여자가 세봤자다.
하긴, 이 병원에서 그녀만 이런 고생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간호사들도 욕창 방지를 한답시고 매일 같이 무거운 장기입원 환자들을 낑낑대며 돌려 눕히는 등 별별 고생을 다 한다.
그렇다고 남녀 분업을 실시할 수도 없는 노릇.
중증외상센터에선 여자도, 남자도, 젊은이나 노인도 차이가 없었다.
그저 의료인과 환자가 있을 뿐.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두 사람은 병원 건물 앞에 도착했다.
도수가 강미소를 업은 채 응급실 문으로 들어가자, 환자인 줄 알고 반사적으로 다가왔던 간호사 이하연이 눈을 치떴다.
“아……! 두 분이 왜 같이…….”
“그렇게 됐습니다.”
도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처치실로 들어갔다. 그리곤 강미소의 허락도 없이 그녀를 눕히고 무릎을 소독했다.
“앗, 따거.”
“몇 바늘만 꿰매면 될 것 같습니다.”
“그냥 약 바르면 안 될까요? 흉질까 봐.”
“그게 더 티 날걸요.”
“…….”
강미소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도수가 수술한 환자들을 통해 그의 솜씨가 얼마나 깔끔한지 수없이 봐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제가 날카로운 건 다 무서워해서요. 공포증 수준으로요.”
“상처 부위 보지 말고 얘기해요.”
간단히 대답한 도수가 마취 후 상처를 봉합했다.
슥, 스윽.
그가 손길을 움직이는 사이.
강미소는 날카로운 주삿바늘이 들어오는 것도, 바늘이 살을 꿰는 느낌도 크게 받지 못했다. 어? 하는 사이에 어느새 꿰매는 중이었던 것이다.
항상 환자들을 수술하는 것만 봐왔지, 직접 환자가 된 그녀.
신선한 기분이 들었다.
사소한 처치만으로도 새삼 도수의 실력을 체감한 그녀는 놀란 눈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순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처치실 난방이 좀 과한가?’
하도 연애를 안 해서 연애 세포가 화석이 되다시피 한 그녀이기에 정확한 이유를 자각하진 못했다.
‘그나저나…….’
도수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저 멀리서 볼 때와.
지금처럼 서로 숨길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유심히 들여다볼 기회가 주어졌을 땐 새삼 받는 느낌이 달랐다.
‘진짜 잘생기셨었네.’
간호사들이 왜 그렇게 수군거렸던 건지 깨달았다.
그 이유를 이제야 깨달은 강미소도 강미소지만.
그녀가 유난히 지금 이런 감흥을 받은 데에는 단순히 외모 외에도 어떠한 감동이 포함돼 있었다.
도수같이 대단한 써전이 직접 자신의 무릎을 꿰매주는 것도.
가운이 아닌 츄리닝을 입은 채 한껏 집중하고 있는 모습도 가슴을 뛰게 했던 것이다.
강미소가 자기도 모르게 ‘이 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황당한 생각을 하는 찰나.
도수가 손을 떼며 말했다.
“다 됐어요.”
그 말에 화들짝 놀란 강미소가 무릎을 보았다.
‘진짜네.’
안 그래도 이런 쪽에 겁이 많은 그녀 입장에선 치료가 끝났으면 좋아야 하는데.
왜 이렇게 아쉬운 걸까?
두려움도, 고통도 못 느끼는 사이 정말 봉합이 끝나 있었다. 방금 꿰맸는데도 겉보기 끔찍하긴 커녕 신기할 정도로 깔끔한 솜씨였다.
“역시.”
강미소가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피식 웃은 도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전 또 수술이 잡혀 있어서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천천히 나와요.”
그가 몸을 돌려 나가려는 순간.
강미소가 입을 뗐다.
“수술은…….”
도수가 고개를 돌리자.
망설이던 그녀가 물었다
“수술은 누구랑 들어가실 생각이세요?”
“강 선생이랑 들어갑니다.”
강미소는 자기도 모르게 좋아서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입가를 씰룩이는 그녀에게서 눈을 뗀 도수는 처치실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뒤에 남은 강미소는 자신의 무릎을 다시 바라봤다.
“…정말 깔끔하네.”
도수의 성격만큼이나.
외모만큼이나 깔끔한 솜씨.
두근, 두근.
다시 가슴이 뛴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미쳤나 봐.”
중얼거린 강미소는 자신이 받고 있는 느낌이 일시적인 착각이라 느꼈다. 딱히 이상형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애초에 연하는 남자로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던 그녀이기 때문이다.
설렘보단 기대.
호감보단 동경.
그게 바로 도수를 바라볼 때 드는 감정의 정체라고, 그녀 스스로 생각했다.
***
간호사 이하연은 전부터 도수에게 호감이 있었다. 아니, 내심 한편으론 이 병원에서 근무하는 대부분의 간호사들이 도수에게 호감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도수는 그들 모두가 꿈꾸는 일들을 척척 해냈으니까.
그에게 악감정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모두가 그에게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생각하는 거고.
강미소를 업고 들어온 도수를 맞닥뜨린 느낌은 또 달랐다.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그녀에게 옆에 있던 동료 간호사가 말을 붙였다.
“강 선생이랑 센터장님, 둘이 뭐 있는 거 아니야?”
정작 도수는 별생각이 없었겠지만 소문이 천리마보다 빠른 게 또 병원이란 곳이다.
그러나 이하연은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뭐가 있긴 뭐가 있어. 그냥 같이 운동하신 것 같던데.”
“그러니까. 왜 둘이 같이 운동을 하냐고. 그것도 그 새벽에.”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어라? 왜 이렇게 민감해? 혹시 너…….”
이하연은 아차 싶었지만.
깊은 속내를 들킬 새 없이, 스테이션으로 다가온 소문의 주인공 이도수가 난입했다.
“이 간호사님.”
“…네?”
괜히 얼굴이 새빨갛게 익는 이하연.
그런 그녀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도수가 환자 차트를 확인하며 말했다.
“이따 열 시 수술 들어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