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환자들이?”
도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요?”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뇌출혈 환자 정동진과 배 속이 망가진 아이에 대한 건을 아는 사람은 몇 명 없었기 때문이다.
도수가 고개를 돌리자.
매디 보웬이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저었다.
“…난 모르는 일이야.”
도수는 다시 강미소를 보며 말했다.
“환자들을 진정시켜야 합니다.”
이 선박에 탄 환자들은 대부분 수술이 필요한 환자들. 그들 모두를 혼자 수술하고 치료할 수는 없었다. 손이 열 개라도 부족한 일이다.
강미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알죠. 그런데 워낙 완강해서.”
“오성병원 의료진들은 뭐하고 있습니까?”
“그 사람들은 어쩔 줄 모르고 있어요.”
“강석현 팀장은?”
“그 사람도 마찬가지고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넋이 나갔어요.”
도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상황을 정리하려면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인물의 도움이 필요했다.
배나 현장에서 그런 힘을 가진 사람은 단 한 명뿐.
“제가 얘기하죠.”
도수는 임옥순을 찾아갔다.
그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초호화 객실 안에서 이 모든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요.”
철컥.
도수는 들어서자마자 알 수 있었다.
임옥순이 자신이 찾아올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을.
그렇지 않았다면 태연하게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진 않았을 터였다.
탁자 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잔도 두 잔이었다.
“앉아요.”
그녀의 말에 도수가 자리에 앉았다.
그를 빤히 응시한 임옥순이 물었다.
“활약상은 잘 들었어요. 여긴 무슨 일로?”
“이 배의 많은 환자들이 저한테 치료받길 원한다고 들었습니다.”
“저 같아도 그럴 거예요. 수술을 앞둔 환자라면 더더욱. 무슨 수를 써서든 실력이 검증된 의사한테 몸을 맡기고 싶겠죠.”
“이대로 두고 보실 생각이신지.”
임옥순이 커피를 호로록 마셨다.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좋을까요.”
질문이 아니었다.
도수가 대답하지 않자 임옥순이 말을 이었다.
“환자들은 목숨이 위태롭지 않은 이상 이도수 센터장에게 치료받으려고 할 거예요. 하지만 센터장 몸은 하나고 모두를 케어하진 못하겠죠?”
“그렇습니다.”
“반대로 우리 병원 의료팀은 환자들을 설득하려 들지 않을 거예요. 이미 환자들이 이도수 센터장을 선택했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했을 테니. 그래서 내 힘을 빌리러 온 것 같은데… 헛걸음했어요.”
“오성병원 의료팀입니다.”
“그래요. 하지만 잘 생각해 봐요. 우리 병원 의료팀은 자신들에게 치료받길 원치 않는 환자들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뿐이죠.”
“의사란 사람들이 그깟 자존심 때문에 환자를 방치한다고요?”
“어떻게 생각하든 현실이 그러니 나는 뭐라고 할 권한이 없습니다. 오성병원 의료팀 모두 근무 외 시간에 봉사를 온 사람들이에요. 그래도 꼭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내가 아닌 현장 책임자에게 가봐야 되는 것 아닌가요?”
현장 책임자는 해양구조대 소속 이민우다. 그는 책임자란 타이틀을 달고는 있지만, 임옥순 말처럼 자원 온 오성병원 의료팀한테 이래라 저래라 할 권한은 없었다.
여기서 문제는 오성병원 의료팀이 현재 가장 많은 의료진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
빠른 상황 수습을 위해선 그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정말 임 여사도 권한이 없는 건가?’
잠깐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답은 바로 나왔다.
‘그럴 리 없지.’
임옥순 여사는 이 야밤에도 오성병원과 오성해운 양쪽 인력과 자산을 한 시간 내로 집합시켰을 만큼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였다.
즉, 여전히 열쇠는 임옥순이 쥐고 있다는 뜻.
그렇게 판단한 도수는 그녀가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을 내놨다.
“제게 오성병원 의료팀을 지휘할 권한을 주십시오.”
뜻밖의 요청에 흥미가 동한 임옥순이 물었다.
“이거야 원. 나한테 힘 써달라는 것도 아니고, 우리 병원 인력을 뜻대로 움직일 힘을 달라고요?”
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도 그랬지만, 저는 제가 환자들을 치료하든 오성병원에서 치료하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환자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치료하는 것. 하나예요.”
“사람 참 한결같다고 해야 하나…….”
말끝을 흐린 임옥순이 눈을 사납게 뜨고 물었다.
“정부의 파견 요청을 받지도 못한 천하대병원 센터장한테 우리 병원 인력을 좌지우지할 권한을 달라? 센터장 뜻은 알겠지만 요구가 지나쳐요.”
“못 주신단 말씀은 안 하시네요.”
바꿔 말해 요구를 들어줄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그녀 말처럼 정부가 초대한 건 인천 내에 위치한 병원과 아로대학병원 인력들까지.
천하대병원에서 도수가 날아온 건 그의 독단적인 판단과 선택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 타 병원 의료팀까지 지휘하게 해달라는 부탁은 터무니없었다.
그러나 도수 역시 환자 치료에 관련해선 물러서지 않았다.
“저는 부탁을 드린 겁니다. 만약 희생자가 생기고 이 사실이 알려지면 모든 책임은 오성병원 책임자에게 돌아가겠죠.”
“…다시 말하지만 오성병원에서 나온 의료팀 책임자는 내가 아니에요.”
“여사님이 직접 나오셨으니 모두가 여사님을 책임자로 볼 겁니다.”
“협박인가요?”
“걱정입니다.”
피식.
입꼬리를 비튼 임옥순이 말했다.
“좋아요, 반대로 얘기해 보죠. 누가 책임자가 되든 책임자가 되는 순간 모든 책임을 떠안게 될 거예요. 희생자가 생기면 이도수 센터장이 뒤집어쓰겠죠. 아닌가요?”
“맞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무덤을 파겠다? 무덤 파는 일을 무슨 부탁까지 해요?”
“저는 그러라고 있는 사람입니다.”
임옥순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본 도수가 말을 이었다.
“저는 칼을 다루는 사람입니다. 살인자와 잡는 각도만 다르지 사람 몸을 가르고 들어가고, 장기를 떼어내고 혈관을 발라내는 건 같습니다. 그로 인해 사람이 죽을 수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만한 책임이 두려웠다면 이 일을 하지도 않았겠죠.”
거친 표현.
그래서일까?
임옥순은 더 마음에 박혔다.
“정말이지. 대담하기론 센터장이 내가 아는 사람 중 으뜸이에요.”
“그래서 주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미리 말씀 드리는데 친해져서 좋을 거 없어요.”
가벼운 농담을 던진 거지만.
임옥순은 마냥 농담으로 듣지 않았다.
“하긴, 항상 어려운 부탁만 하고. 그러면서 병원에선 쫓아내고… 센터장 말도 틀린 말은 아니네요.”
빙그레 웃은 그녀가 덧붙였다.
“뭐, 어쨌든. 내 평생 죽었다 깨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하는데 왜 센터장만 만나면 마음이 약해지는지 모르겠어요.”
“승낙으로 듣겠습니다.”
막무가내다.
임옥순은 이마를 문질렀다.
“음. 부탁으로 듣고 나도 부탁 하나만 하죠.”
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십시오.”
“부상당한 승객 중에 정동진 기자 알죠?”
“이름이나 직업으론 모릅니다.”
“센터장이 구한 뇌출혈 환자.”
“네.”
“그 환자가 진짜 뇌출혈이 맞다고 해도, 오성병원 의료팀과의 일은 함구해 줬으면 해요.”
오성그룹의 명예가 걸린 일이다.
도수가 그 부분에 대해 나불거린다면 오성병원이 곤란해질 터였다.
수십억을 들여 의료팀을 싣고 대형 선박을 끌고 여기까지 온 보람이 없어지는 것이다.
아니, 안 한만 못한 일이 되는 셈이다.
도수가 대답했다.
“원래 어디 가서 얘기할 생각 없었습니다.”
그런 것 따위 중요치 않다.
신경 쓸 겨를도 없는 일이었다.
마음이 통했는지 임옥순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아요. 센터장이 요구한 지휘권, 믿고 넘겨주죠.”
“감사합니다. 그럼 전 환자들을 봐야 해서.”
목례한 도수가 일어나기 무섭게.
임옥순이 덧붙였다.
“센터장도 두려운 게 있나요?”
그녀를 빤히 응시한 도수가 나유하에게 했던 것과 같은 대답을 했다.
“항상 두렵습니다.”
“아깐 안 두렵다면서요?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도 이 엄청난 사태의 책임자로 몰려서 누명 쓰고 비난받을 수도 있는데 그게 무섭지 않다면서요?”
도수는 대답하는 대신 다리를 걷어붙였다. 언제 다쳤는지 큰 상처가 벌어져 있었다.
임옥순이 화들짝 놀랐다.
“뭐 하는 거예요? 어서 치료 안 받고…….”
“이런 상처를 입는 것도, 여사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마음의 상처를 받는 일도 두렵지 않아요. 저는 이런 상처에 에이즈나 비형 간염 환자의 피를 뒤집어쓰면서 일합니다. 그러면서도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건 더 큰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에요.”
“더 큰 두려움……?”
“환자를 잃을 수 있다는 공포. 그게 저를 미치게 합니다.”
“…….”
그 한마디에.
임옥순은 기에서 눌리고 말았다.
오성병원 병원장이나 천하대병원 이사장조차 그녀 앞에서 기를 못 펴건만, 한 외과의의 신념에 그처럼 드높은 자존심이 한 번 접힌 것이다.
그녀가 충격을 받은 사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도수는 객실을 나섰다.
밖에는 천하대병원 의료팀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요?”
강미소가 대표로 묻자.
도수가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부터 우린 현장을 책임지고 환자를 분류합니다. 현장에 있는 의료진들은 소속 상관없이 전공 분야별로 나누세요. 그리고 자신 있는 수술 위주로 수술이 필요한 환자를 맡습니다. 레지던트, 인턴들은 나머지 환자들을 케어합니다.”
“해냈군.”
김광석은 자기도 모르게 어깨가 올라갔다. 그 역시 수많은 현장을 드나들던 중증외상센터의 행동대장. 이런 경우를 숱하게 경험했지만 매번 절망을 안고 돌아와야 했다. 그가 아무리 다른 데 신경 안 쓰고 뛰어들어 환자를 살리고 싶어도 여러 이해관계에 갇혀 시간 낭비를 하는 동안 환자는 죽어갔다.
이번 역시 오성병원에 맡기로 한 환자들이 도수에게 치료받길 희망하면서 오성병원과의 알력다툼이 생길 뻔했다.
그런데 도수는 단번에 해결해 버린 것이다.
그때, 아사다 류타로가 목소리를 냈다.
“하나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전 여기 사람들의 과감성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구조대고 시민들이고 의사들이고 할 것 없이 다들 미쳤어요.”
좋은 쪽으로 얘기한 걸 알기에, 의료팀원들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아사다 류타로는 걱정이 앞섰다.
“우린 선한 일을 한다고 했지만 달리 말하면 규칙을 깬 겁니다. 무질서한 행동을 한 거고요. 이게 내 스타일이긴 하지만…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전 일본인이니 책임을 물지 않겠지만 이 일을 주도한 책임자들은 처벌을 받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공무원인 구조대장이나 멋대로 수술을 해버린 도수는 재판대에 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진 계속 결과가 좋아서 아무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어떤 징계나 불이익이 돌아올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출동을 막았던 사람들이나 반대했던 사람들은 자신의 실책을 숨기기 위해 어떤 모략을 꾸밀지 몰랐다.
다들 예상하지 못했지만 도수는 의외로 거기까지 염두하고 있었다. 다만 움직일 수밖에 없기에 움직였던 것뿐.
그가 말했다.
“처벌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
너무 간단한 대답에 아사다 류타로가 눈을 부릅떴다.
“처벌이 아무렇지도 않다고요?”
“그러려면 지금도 처벌받아야 돼요.”
도수는 텅 빈 혈액 가방을 툭툭 건드렸다.
“오형 피를 밖으로 가져 나오는 것 자체가 규정 위반입니다. 그것만 해도 문제 삼으면 문제가 되는데 출동도 병원장 허가만 받고 독단적으로 했어요. 그냥 했습니까? 미군까지 동원했죠. 출항하지 말라는데 어선 빌려서 출항하고 다친 사람들 배 위에서 수술하고… 또 뭐 있죠?”
피식 웃은 강미소가 말했다.
“저도 폭행죄로 잡혀가겠는데요? 저 아까 물에서 어떤 남자 끌어낼 때 머리끄덩이 잡아당겨서 머리카락이 한 뭉텅이 뽑혔거든요. 안 그래도 탈모가 심하신 분이셨는데 제가 나머지 머리카락마저… 후, 지금 생각하니 죄송하네.”
그녀의 재치 있는 대답에 장내가 웃음바다가 되어버렸다.
처음 의문을 재기했던 아사다 류타로 역시 피식 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하긴… 저도 어떤 여자승무원 치맛자락을 찢었습니다.”
그 순간 강미소가 정색했다.
“그건 좀 심했네.”
“이건 충분히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을 것 같군.”
김광석도 한마디 거드는 게 아닌가?
평소 고고한 성품인 그까지 나서자 아사다 류타로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장난기가 돈 도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나라가 워낙 성범죄에 민감한 나라라서. 정말 그러셨다면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
아사다 류타로는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그게, 정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제가 일부러 찢었겠습니까? 그 여자가 물에서 허우적대고 몸부림치는 바람에…….”
피식 웃은 도수가 말했다.
“진짜 성범죄에 민감했으면 좋겠네요.”
“……?”
아사다 류타로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강미소가 등을 두드렸다.
“괜찮다는 뜻이에요. 뭐 하면 한 번 들어갔다 나오면 되죠, 뭐.”
김광석이 말했다.
“짓궂긴.”
“어라, 교수님 혼자 쏙 빠지시기예요?”
그렇게 상황이 일단락되자.
도수는 웃음기를 거두고 본론으로 돌아왔다.
“자, 빨리빨리 움직입시다.”
그렇다.
이제 행동할 때였다.
의료팀이 의료 물품을 정리하고 오성병원 의료팀에게 협조 요청을 마쳤을 때즈음, 마침내 모두가 기다리던 방송이 흘러나왔다.
-잠시 후 홀릭호가 선착장에 정박합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