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
배 안에서
도수의 예측은 시작부터 틀어졌다.
그의 태도에 불만을 느낀 강석현이 임옥순 여사에게 쪼르르 달려갔던 것이다.
-여사님. 강석현 선생입니다.
배 안에서까지 비서에게 인터폰으로 보고를 받은 임옥순이 대답했다.
“들어오시라고 해요.”
곧 강석현이 들이닥쳤다.
“여사님.”
“강 선생.”
“송구하지만 안 좋은 소식입니다.”
“뭐죠?”
“정동진 기자가 이도수 선생에게 치료를 받겠다고 합니다.”
“정동진 기자가 탔다는 걸 알자마자 우리 선박으로 데려왔어요. 일이 왜 이렇게 되죠?”
“그게…….”
강석현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증상을 확신한 것이 도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얘기하기가 창피한 것이다. 그러나 검사를 해보지도 않은 상황에서 도수 말만 믿고 ‘뇌출혈’을 장담할 수도 없는 노릇.
강석현이 대답했다.
“정동진 기자의 최초 발견자가 이도수 선생이지 않습니까?”
“그런데요.”
“이도수 선생 말로는 정동진 기자가 뇌출혈이라고 합니다.”
“이도수 선생 말로는?”
임옥순의 눈매가 찌푸려지자.
강석현은 간담이 서늘했다. 남들은 모르는 큰 야망을 품고 있는 그에게 임옥순은 동아줄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번 기회를 날릴 수 없다.’
그가 말했다.
“뇌출혈을 확신하긴 이른 상황입니다. 이도수 선생의 속단이 무모한 겁니다. 여사님도 아시겠지만 충분한 검사 없이 증상만으로 환자를 판별하는 건 도박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임옥순 여사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그 도박이 내 목숨을 살렸어요. 안 그래요?”
“…그건.”
“됐고, 그래서 정동진 기자가 뭐라고 하던가요?”
“애초에 이도수 선생이 자길 구했으니 그에게 치료를 받겠다고…….”
“우리 오성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뜻이군요.”
“…….”
“그 말인즉슨 강 선생이 환자에게 신뢰를 못 줬다는 거고.”
“그, 그렇지 않습니다! 환자가 너무 완강했을 뿐입니다. 전 자존심을 버리고 이 선생을 우리 배로 부르면서까지 환자에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건 그거대로 문제 같은데. 우리 오성병원의 강석현 선생은 천하대의 이도수 선생보다 실력이 없다는 말로 들리네요.”
“그게…….”
“선생은 지금 오성 이름을 걸고 여기 와 있는 겁니다.”
“…죄송합니다.”
범 같은 여인인 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강석현은 절로 위축이 됐다.
임옥순은 그런 그를 보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니 내가 이도수를 탐내지.’
도수는 오성병원 이사장도 꼼짝 못 하는 임옥순을 상대로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환자를 위해 병실을 비워달라고 당당히 요구했다. 이번에 선박을 요청한 것만 봐도 두 사람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가만히 강석현을 응시하던 임옥순이 입을 열었다.
“그래, 그래서 정동진 환자를 천하대병원 의료팀에 빼앗겼단 말을 하러 온 건가요?”
“아직… 검사 결과가 뇌출혈로 안 나오면 이도수 선생이 실수를 한 게 됩니다. 그때가 되면 환자는 우리 병원에서 치료를…….”
“하.”
헛웃음을 터뜨려 말을 자른 임옥순이 날카롭게 물었다.
“그때까지 정동진 환자 상태가 어떨지 감이라도 옵니까?”
“예?”
“만약 의식이 없으면? 이미 정동진 기자는 이도수 선생한테 치료를 받겠다고 했어요. 그럼 결국 천하대병원에 입원하게 되겠죠.”
“아!”
“아? 차라리 그러면 다행이지, 혹 정동진 기자가 수술을 받아 잘되거나 최악의 경우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쩔 셈이죠? 검사받기 전까지 아무 것도 못 했던 우리 병원의 입장이 뭐가 되느냔 말입니다.”
“……!”
“아, 죄송하단 말은 하지 마세요.”
강석현은 감히 입을 열 수조차 없었다. 그가 멍청하게 서있자 임옥순이 다시 물었다.
“제가 들을 얘기가 더 남았습니까?”
“그…….”
강석현은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돼서 미리 고자질하려 했던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기억을 되짚던 그가 간신히 대답했다.
“마, 맞습니다. 여사님 말씀처럼 정동진 환자가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는 마당에… 정말 이도수 선생 말처럼 뇌출혈이라고 하면 빠른 조치가 필요한 상황에 복강 내 출혈이 있는 다른 환자를 수술하겠다고 합니다. 우리 병원에서 담당하고 있는 환자를, 멋대로요.”
“근거는?”
임옥순이 짤막하게 묻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줄줄 말했다.
“정작 뇌출혈이 의심되는 정동진 기자는 괜찮다며 그대로 두고 아이의 수술을 서둘렀습니다. 지금 여기가 태평양도 아니고, 제 생각엔 아이보단 발작까지 겪었던 정동진 기자 상태가 더 우려되는데 말이죠.”
“모두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네요. 그렇죠?”
“그렇습니다!”
강석현은 이제야 임옥순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준다고 착각했지만.
다음 임옥순의 입에서 나온 대사는 예상과 달랐다.
“이유는 파악했나요?”
“그게… 워낙 비상식적인 판단인지라.”
“그러니까 자기 환자를 뺏기는 겁니다.”
“예?”
강석현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아무리 임옥순이라도 의사를 상대로 해도 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다.
그럼에도 그녀가 임옥순이기에, 강석현은 반발하지 못했다.
그가 어떤 기분이던 임옥순은 개의치 않고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일침을 날렸다.
“다른 의사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면 ‘왜 그랬을까’ 먼저 고민해 보고 나한테 찾아왔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도수 선생이 실력 없는 의사예요? 그는 한국에 와서 수술한 모든 환자를 살려서 수술방을 내보냈어요. 정작 나만 해도 오성병원에서 어쩌지 못했던 걸 이도수 선생이 치료해 줬죠. 그런 사람이 비상식적인 판단을 했다면 어째서 그랬는지부터 알아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동안은 운이 좋아서…….”
“운이 좋은 건 한 번이에요. 행운이 반복되면 그건 실력인 겁니다.”
임옥순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도수 선생이 하겠다는 아이 수술, 적극 지원해요. 정동진 기자도 앞일이 불투명한데 아이까지 잘못되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아…….”
고개를 꾸벅 숙인 강석현이 몸을 돌리려는 순간.
임옥순이 날카롭게 물었다.
“대답은?”
다시 바로 선 강석현이 대답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임옥순이 말했다.
“나가봐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방을 나선 강석현은 멍한 표정이었다. 강하게 주장해서 이도수를 내쫓으려던 계획은 무참히 박살났고 오히려 영혼까지 털려서 방을 나온 것이다.
“적극 지원 하라고?”
강석현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나더러 그 자식 들러리를 서라는 겁니까?”
임옥순이 들으라는 듯 허공에다 물은 그는 휴대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고객님께서 통화 중이셔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잠시 후 다시 걸어주시기…….
전화를 끊은 강석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병원장한테 직통으로 전화를 넣어서 일을 해결해 보려 했는데, 전화는 또 왜 안 받는단 말인가?
***
그사이.
병원장과 통화를 하고 있는 것은 임옥순이었다.
“모든 환경을 다 만들어주고 영웅이 되라는데 자기 밥그릇 하나 못 챙기는 작자를 내게 보낸 거예요?”
-죄송합니다, 부회장님. 너무 갑작스럽게 파견팀을 구성하느라 미처 똑바로 정리하지 못했습니다.
“그 말이 진실이길 바라요. 정말 강 선생을 우리 병원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고 보낸 거면 너무 허망할 것 같으니까.”
-물론입니다.
“내가 의료재단과 병원사업에 비중을 두고 있다는 걸 잊지 마시고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 호감을 절망으로 바꾸지 말라는 뜻이에요.”
-예… 알겠습니다.
병원장은 잠에서 막 깬 목소리인데도 깍듯했다. 대한민국 넘버 원, 오성병원에서 인생의 절반인 이십 년 이상을 근무했고, 병원장까지 오른 인물이기에 더 그랬다. 이제 오성병원이 아니면 그에게는 정년까지 지금과 같은 부귀영화를 누릴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임옥순은 그 모든 걸 무너뜨릴 힘을 가진 여자였다.
“강 선생은 어쩔 셈이죠?”
-본원의 위신을 깎아 먹은 책임을 지게 하겠습니다.
“병원장 판단에 맡깁니다.”
-감사합니다.
뚝.
전화를 끊은 임옥순은 병원장이 취할 행동을 알고 있었다.
비록 그녀에게 내색하진 못해도 이 밤에 전화를 받고 단단히 승질이 났을 것이다.
그 불길은 강석현을 덮칠 테고.
강석현은 곧 지방으로 가거나, 해외로 나가거나, 자진해서 오성병원을 떠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다신 삼 차 병원 전문의나, 삼 차 병원을 끼고 있는 학교의 교수로 부임하진 못하겠지.
이래서 사회가 무섭고, 의사 사회는 더 무서웠다.
엘리트집단은 그만의 결속력을 가지기 마련.
한마디로 한 가지 행동이 인생 전반에 걸친 파국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학병원에 남는 이상 대학부터 정년까지 이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야말로 말 한 마디로 강석현의 인생을 바꾼 임옥순은 책상을 톡톡 두드리다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대표님.
비서가 답하자.
그녀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원에 자리 하나 빌 거야. 장소는 근사한 곳으로. 이도수 선생한테는 티 내지 말고 약속 한번 잡아봐요.”
***
도수는 막간을 이용해 나유하와 함께 갑판 위로 나갔다.
세찬 바람이 슬슬 그치기 시작한 눈발을 싣고 불어닥쳤다.
여전히 파도는 높았다.
도수는 자기 일을 하러 왔지만, 나유하는 그를 따라온 것이다.
“궁금한 게 있어요.”
그녀가 입술을 떼자.
도수가 고개를 돌렸다.
“얘기해요.”
“선생님은 항상 확신하는 것 같아요.”
“확신?”
“선생님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든. 환자에 대해서든.”
도수는 그녀가 말하는 ‘확신’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항상 무섭습니다.”
“무섭다고요?”
“네. 제가 이러다 봉변을 당하진 않을지, 수술 하기 전에는 환자를 잃진 않을지 두렵죠.”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차분하고 거침없어요?”
나유하가 가장 궁금한 게 그것이었다.
도수는 꿈에도 모르겠지만, 그를 만난 후 나유하의 행동은 조금씩 변화를 겪고 있었다.
언제나 확고한 그를 보며 늘 마음속에 가둬놨던 대담한 행동들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 할머니한테 대들다니.
오늘만 해도 평소에는 꿈도 못 꾸는 일을 해냈지 않은가?
이런 이유로 질문을 받은 도수가 대답했다.
“해야만 하는 일이니까.”
“예?”
“제가 무섭다고 책임을 회피하면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될 겁니다. 전 제 두려움보다 그게 더 두려워요.”
“아…….”
“의사는 절대 피해선 안 됩니다. 축구의 골키퍼처럼 마지막에 서 있는 사람. 그게 제가 서 있는 자리니까요.”
“…….”
도수를 빤히 응시하던 나유하는 바다로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피하면 안 된다…….”
그녀는 항상 도망쳐 왔다.
‘무엇으로부터?’
자기 스스로에게 물었으나 이미 대답을 알고 있었다.
‘내 늘 자신으로부터… 도망쳤어.’
할머니에게는 할머니 닮은 손녀가 되기 위해.
경영진들에게는 나이답지 않게 성숙하고 대담한 여자아이가 되기 위해.
한집에 사는 부모님한테는 뭐든 혼자서도 척척 잘하는 딸이 되기 위해.
그리고 남들한테는 행복한 재벌 3세로 보이기 위해 애써야 했다.
오직 도수에게만 본심을 말했다.
도수라면, 누구에게도 잘 보이려 할 것 같지 않았기에. 혹은 자신과 어울려도 부족하지 않은 ‘수준’의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허울 없이 다가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이런 삶이 아니야.’
인생을 주변의 뜻대로 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주변 사람을 비슷한 부류로 사귀고 ‘수준별’로 판단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기 자신의 미래를 이미 길이 정해진 내비게이션처럼 설계하기 싫었다.
도수처럼 자기 자신의 모든 걸 내던질 일을 찾고, 각양각색의 사람을 만나고, 남의 눈치 안 보고 거침없이 나아가고 싶었다.
동경.
그런 감정을 담은 나유하가 그를 부르려 했을 때.
그는 이미 다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잘 왔습니다.”
구명정에서 천하대병원 의료팀원들이 내리고 있었다. 그중에는 금발의 여기자도 한 명 섞여 있었다.
바로 매디 보웬이었다.
“닥터 리.”
악수를 나눈 도수가 말했다.
“기자님 얼굴 보니 더 긴장되네요. 꼭 수술 성공해야겠어요.”
“안 그러면 망신을 줄 테니 각오해요.”
빙그레.
서로 웃는 두 사람.
그사이 김광석이 다가와서 물었다.
“환자는?”
도수는 그를 보고 표정을 굳혔다.
“안 좋습니다. 배 속이 엉망이에요.”
“중증 외상이군.”
“당장 수술해야 합니다. 지금도 많이 지체됐어요.”
김광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아서 피도 충분히 챙겨 왔다. 어서 가지.”
그들은 다 같이 객실로 움직였다.
갑판 위를 떠나기 전, 도수는 살짝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나유하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끄덕.
살짝 목례한 도수는 문 너머로 사라졌다.
뒤에 남은 나유하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바다를 바라봤다.
“…부럽네.”
복합적인 의미가 담긴 한마디.
여러 사람의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전무후무한 움직이는 배 위에서의 대수술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