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저렉션-105화 (105/152)

# 105

병실을 나서기 무섭게, 강석현이 질문을 던졌다.

“뭡니까?”

도수가 그를 쳐다보자.

강석현이 이어 물었다.

“환자를 한번 봐달라고 모셨더니 빼 가다니요. 이게 무슨 짓입니까? 천하대병원 의사들은 다 이렇게 무례해요?”

“별로 내 환자 네 환자 따지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도수가 차분하게 덧붙였다.

“제가 최초 진단을 내렸고 그 환자를 오성병원에서 데려간 거죠.”

“동의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저를 다시 부르셨지 않습니까.”

도수가 막힘없이 대답했다.

“발견, 진단, 치료. 이 세 가지가 막힘없이 이뤄져야 합니다. 이차 병원에서 진단을 하고 치료가 원활하지 않아도 삼 차 병원으로 보내죠. 그런 상황에서 삼 차 병원에 따지는 이 차 병원이 있습니까?”

“지금 우리 오성병원을 이 차 병원이라고 폄하하는 겁니까?”

강석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오성병원은 천하대병원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삼 차 병원이었다.

그런 곳을 이 차 병원에 빗댄 것은 자존심에 큰 상처였다.

그러나 도수에게 중요한 건 자존심 싸움이 아니었다.

“그럴 리가요. 화를 내실 상황이 아니라는 얘길 한 겁니다.”

“화를 내지 말라고요?”

“진단도, 치료도 안 돼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환자를 치료할 자신이 있는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게 환자를 위한 길 아닙니까?”

“지금 감사라도 하라는 겁니까?”

“감사 인사 들을 생각 없습니다.”

도수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환자를 위한 길을 막아서진 마십시오.”

“후…….”

한숨을 길게 내쉬며 화를 다스린 강석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래서, 어떤 진단을 했습니까? 이번에도 뇌출혈이 확실합니까?”

환자를 만나서 고작 한다는 일이 사담을 나누는 정도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아무 결론도 나지 않아야 정상이다.

그러나 도수는 결론을 냈다.

“뇌출혈입니다.”

“나 참, 황당한 인사로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강석현.

비록 도수가 대학을 나오지도, 정규 코스를 밟지도 않았지만 만약 정규 코스를 밟았다면 직급을 떠나 한참 후배였다.

학계에선 서로 소속이 달라도 이러한 질서가 통용된다.

결국 강석현은 센터장 대 센터장의 입장을 버리고 선배로서 고자세를 취한 것이다.

“이 선생 명성은 모르지 않아. 그러니 이렇게 대우를 해줬던 거고. 아무리 그래도 환자를 두고 황당무계한 소리를 하는 건 용서할 수 없다.”

“저랑 감정 소모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환자 보호자한테도 설명해야 할 테니 도착하는 대로 검사를 해보세요. 제 말이 틀렸다면 환자는 오성병원에 인계하겠습니다.”

“뇌출혈이면?”

“천하대에서 치료받게 하시죠.”

강석현은 다시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말투를 바꿔가며 하대까지 했는데 발끈하긴 커녕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것도 묘하고, 뇌출혈을 일말의 의심도 없이 확신하는 것도 의문 투성이였다.

‘정말 확신하는 건가?’

그렇지 않은 이상 이렇게 당당하게 나올 수 있을까?

강석현은 조금 더 신중하게 대처했다.

“…뇌출혈이 맞다면 더더욱 빨리 수술을 해야 할 텐데. 이렇게 두 손 놓고 있어도 되는 건가? 뇌압이 올라가다가 다른 혈관이라도 터져 버리면? 그땐 어쩔 셈이야.”

“현재는 출혈이 멎은 시점입니다. 시간이 없어요. 아시다시피 배 안에서 뇌 수술을 하는 건 위험합니다. 시간이 있다면 수술을 강행하지 말아야 해요.”

“천하태평이구만!”

하지만 도수는 이미 듣지 않고 있었다. 간호사가 들어간 병실 문틈 사이로 누워 있는 어린아이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누던 대화의 맥락을 벗어나는 질문을 던졌다.

“왜 저 아이가 아직도 저러고 있습니까?”

“뭐?”

“이쪽으로.”

도수는 성큼성큼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강석현은 자기도 모르게 뒤따라갔다.

“뭔데 그러…….”

“이 아이.”

도수는 겉옷을 들춰 부풀 대로 부푼 배를 보여주었다.

“뼈가 부러지고 장기가 깨졌습니다. 배 부푼 걸 좀 보세요. 복강 내 출혈이 심한 상태고, 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수술이라도 하라는 건가?”

“당연히!”

자기도 모르게 언성을 높인 도수가 이글이글 불타는 눈빛으로 목소리를 착 깔았다.

“응급수술 들어갔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 선생 말처럼 배 속이 엉망이 된 환자야. 뼈가 부러지고 장기가 깨졌는데 움직이는 배 안에서 수술을 하라고?”

“더 위험한 수술도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뭐?”

“방금 전 뇌출혈 환자에 대해선 뇌수술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씀하셨어요. 배 안에서.”

“그야 이 선생이 너무 확신하니까! 그렇게 자신 있으면 한번 해보라고…….”

“지금 하겠습니다.”

“……!”

강석현이 눈을 부릅떴고.

그를 쳐다본 도수가 말했다.

“자신 있으면 하라면서요. 이 아이, 지금 제가 수술하죠.”

“내가 이 선생을 부른 건 뇌출혈 환자 때문이야.”

“뇌출혈 환자만 특별한 겁니까?”

“뇌출혈 환자가 더 중태라는 뜻이다. 그걸 알면서도 뇌출혈 환자보다 이 환자를 먼저 수술하겠다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합니까?”

“뭐를?”

“어딜 다쳤든 손상 부위나 정도에 따라 환자의 중증도는 다릅니다. 그걸 아실 텐데요.”

“하!”

강석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선생을 철석같이 믿는 뇌출혈 환자가 들으면 얼마나 실망스러울까. 자네 마음대로 해. 그리고 자네 선택에 대한 책임도 자네가 지고.”

“그러죠.”

한숨을 내쉰 강석현은 병실 문을 열고 나갔다.

그 자리에 도수만 남자, 화장실 문을 열고 한 여성이 나왔다.

아이의 어머니 같았다.

“제가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감사해요, 선생님…….”

아이 엄마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난리통에 잃어버렸던 아들을 다시 봤을 땐,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 분 전에 정형외과 선생이 보고 갔지만 아이는 십 분째 고통스러운지 끙끙 앓고 땀을 뻘뻘 흘리며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의사들은 곧 육지에 도착하니, 그때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던 아이 어머니에게는 도수가 단비와도 같을 수밖에.

“선생님.”

“예.”

“우리 아들, 괜찮은 거죠……?”

“많이 다쳤습니다.”

“끄윽. 끅…….”

아이 어머니가 흐느끼는 것을 보며.

도수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수술을 할 겁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네, 제발 그래주세요. 이렇게 흔들리는 배 안에서 수술이나 가능할지…….”

어선에 비하면 크게 흔들리진 않고 있었지만 그래도 진동이 아예 없을 수는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극도의 정교함을 요하는 써전에게는 치명적이다.

즉, 다른 사람이라면 큰 수술은 불가능할 터.

그러나 도수는 이미 움직이는 헬리콥터 안에서 개복을 하고 대동맥을 연결한 경험이 있었다.

비록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더 큰 수술이 되겠으나.

반대로 헬리콥터보다 흔들림이 심하진 않았다.

“아드님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저도 제가 아는 모든 의술을 다해 아드님을 치료해 보겠습니다. 곧 수술 들어갈 테니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인 도수가 병실을 나서서 무전기를 켰다.

“여긴 천하대 의료팀 이도수. 응답하라, 오버.”

-들린다. 자알 들린다. 그쪽 상황은 어떤가, 오버?

강미소였다.

은근히 도수에게 반말을 하는 걸 즐기는 것 같았다.

하긴, 얼마만의 반말이란 말인가?

천하대에 와서 위치가 뒤바뀐 뒤로는 한 번도 못 써봤다.

하지만 도수는 그 시절의 향취를 음미할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가용 가능한 혈액이랑 의료인력 전부 이쪽으로 보내달라, 오버. 특히 김 교수님은 반드시 모셔 와야 한다.”

-안 그래도 이쪽은 마무리 작업 중이다… 상황이 그렇게 안 좋은가, 오버?

“그렇다.”

치직.

잠시 후.

강미소의 대답이 들려왔다.

-알겠다, 오버. 의료팀 즉시 파견하겠다.

그것으로 무전이 끝났다.

“하.”

진이 빠졌다.

구조 작전으로 인해 체력이 다 빠져 있었다.

거기다 수십 명의 환자를 보고 오성그룹 선박으로 넘어온 후에는 투시력까지 몇 번 썼다.

그야말로 기진맥진.

이런 상황에서 또 한 번 큰 수술을 해야 한다.

배가 육지에 도착하기까지 한 시간 남짓.

그 시간이면 아이는 못 버틸 것이다.

결국 그 전에 아이를 말려 죽이는 문제의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뜻.

‘할 수 있는 데까지 한다.’

그래서 김광석을 부른 것이다.

중증외상 수술이라면 김광석 또한 도수에 크게 뒤지지 않으니까.

‘2차 수술이 필요할지도.’

거기까지 염두하고 있는 그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또 보네요.”

도수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나유하가 홍조를 띤 채 서 있었다.

“길게 인사 나눌 시간은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 좀 바빠서.”

“저도 지금은 타이밍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

“제가 도울 일이… 없겠죠?”

도수는 그렇다고 대답하려다.

번뜩 생각난 부분이 있었다.

“이 배, 잠시 멈출 수 있겠습니까?”

“배를 멈추라고요?”

고개를 끄덕인 도수가 말했다.

“환자 분류 할 때 누가 어떤 상태인지 전부 체크했습니다. 지금 당장 수술이 급한 환자는 아이 한 명뿐이에요. 배를 멈춰도 다른 환자들은 살지만, 배를 멈추지 않으면 아이의 수술이 극도로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그럼 당연히 배를 멈춰야죠.”

“제가 부탁해도 안 먹힐 겁니다. 일단 배가 멈추는 순간 지금도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환자들이 불만을 얘기하겠죠. 아이의 사정을 일일이 다 설명해도 개중에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환자들이나 보호자들이 있을 겁니다. 아이의 상태를 내 몸처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리고 환자들이 힘들어하면 오성그룹 의료팀이나 직원들은 혹시 생길지 모르는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배를 멈추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저한테 부탁하는 거군요.”

“네. 임 여사님 손녀분의 이야기라면 들을 테니까. 어차피 사고가 난다 해도 모든 책임은 이 배를 움직인 임 여사님이 지셔야 할 테니까요.”

“아니죠.”

나유하가 미미하게 웃었다.

“가장 큰 책임은 환자를 수술하겠다고 결정해서 배까지 멈춘 집도의 몫이겠죠.”

“저 빼고요.”

피식 웃는 도수.

마주 웃은 두 사람 가운데.

나유하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약속할게요. 배를 멈추겠다고. 하지만 오래 멈추진 못할 거예요. 왠지 할머니가 아시면 저를 도와줄 것 같지는 않거든요.”

임옥순은 통이 크고 마음이 넓은 여자였지만 사업가 기질이 남다른 인물이기도 했다. 따라서 절대 손해 볼 행동은 하지 않는단 철칙이 있었다. 만약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이익으로 충분히 상쇄할 수 있는 손해만을 감수한다.

이런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유하의 얘길 들은 도수는 자신이 갖고 있던 무전기를 내밀었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의 몇 분. 그거면 됩니다.”

고개를 끄덕인 나유하가 눈을 빛냈다.

그 정도라면 할머니를 속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배가 멈춘 것을 느끼고 선장한테 연락하기까지, 최소 몇 분 정도는 소요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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