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저렉션-104화 (104/152)

# 104

어선에 들어선 도수는 의료팀과 재회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핏기 없는 얼굴, 바들바들 떨리는 몸, 속옷까지 홀딱 젖은 몰골.

도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꼴이 말이 아니네요.”

“…사돈 남말 아니에요?”

강미소는 짐짓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입 밖으로 나온 농담과는 달리 눈물을 글썽였다.

도수는 미소를 보였다.

“모두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두 사람이 웃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

비에 젖은 생쥐 몰골이든 뭐든 살아 있음에 웃을 수 있었다.

그 미소를 본 강미소는 순간 울컥했다.

“센터장님은 왜 안 무사하세요?”

도수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의 상태가 가장 안 좋았다. 깨진 이마, 다 터진 입술. 눈에 보이진 않지만 팔꿈치나 등에도 멍이 들었을 것이다.

그를 빤히 응시하던 강미소가 거즈를 한 뭉텅이 들고 다가왔다.

“좀 봐요.”

그 순간.

허름한 어선과 어울리지 않는 금발의 미녀가 끼어들었다.

“잠깐.”

“외국인?”

강미소는 이 와중에도 상대를 스캔했다.

작은 얼굴에 새하얀 피부, 에메랄드 빛깔로 신비하게 빛나는 눈동자, 압도적인 볼륨감이 어우러져서 저도 모르게 기가 죽었다.

자기도 모르게 아래를 내려다본 그녀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누구신지…….”

금발의 미녀.

매디 보웬이 대답했다.

“타임즈의 매디 보웬 기자예요.”

“뉴욕타임즈?”

“네.”

생긋 웃은 그녀가 말을 이었다.

“닥터 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진에 담고 싶어요. 여러분이 구조하는 모습을 고스란히 담은 것처럼.”

강미소가 도수를 보며 눈으로 의사를 묻자.

도수가 대답했다.

“편한 대로 하세요.”

“두 분 다 그대로 있어요.”

매디 보웬은 사진기를 들고 셔터를 몇 차례 눌렀다.

찰칵, 찰칵, 찰칵.

그녀가 사진기를 내리며 말했다.

“닥터 리는 찍었고… 배에 남아서 모든 순간을 카메라에 담고 싶은데.”

도수가 한쪽에 있는 이민우를 가리켰다.

“현장책임자한테 허락받으시면 됩니다.”

“고마워.”

다시 한번 미소를 보인 그녀가 이민우에게로 갔다.

매디 보웬의 뒷모습에서 눈을 뗀 도수가 넋 놓고 있는 강미소의 거즈를 가로채며 말했다.

“가죠. 이러고 있을 시간 없습니다.”

“아, 예…….”

얼른 따라붙은 강미소가 매디 보웬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물었다.

“근데 누구예요?”

“들었잖아요? 기자라고.”

“외모는 실사판 엘프인데 추진력은 코뿔소 같네요.”

이 생지옥에 자진해서 뛰어들 생각을 하다니.

그러나 매디 보웬의 과거를 알았다면 그런 말은 못하리라.

피식 웃은 도수가 말했다.

“야생마 같은 여자죠.”

이후, 천하대 의료팀을 비롯한 각 병원 의료팀은 쉬지도 못하고 환자를 봤다.

사이사이 응급처치를 해가며 오성그룹 선박에 보낼 환자들을 분류하는 것이다.

정신없이 환자를 보고 있는 그때.

오성병원 의료팀 쪽에서 한 사람이 도수에게 다가왔다

“이도수 센터장님?”

“네, 제가 이도수입니다. 무슨 일로……?”

“반갑습니다. 오성병원 응급센터장 강석현입니다. 지금부터 오성그룹 선박으로 분류하신 응급환자들은 저희 오성병원에서 전담하겠습니다.”

상의하는 것이 아니었다.

통보하는 거다.

근처에 있던 양진명 교수가 그 얘길 들었는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우리 환자 너희 환자 분리할 것 없이 힘을 합치는 편이 환자들을 위한 길입니다.”

“성함이?”

“양진명입니다. 아로대학병원 중증외상센터를 맡고 있습니다.”

“양진명 교수님.”

오성병원 의료팀을 책임지고 있는 강석현이 말을 이었다.

“두 분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김광석 교수님까지 쟁쟁한 분들이시죠. 하지만 담당할 환자를 명확히 하는 편이 더 빠른 작업을 위해 능률적이라는 판단입니다.”

“아니, 그런 판단은 어디서…….”

그 순간.

도수가 말을 잘랐다.

“알겠습니다.”

“……!”

눈을 부릅뜬 양진명이 물었다.

“그냥 받아들일 생각인가?”

도수는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실랑이하고 있을 시간 없습니다. 수술이 필요한 환자들을 따로 분류하곤 있지만 사실상 구출된 모든 인원들이 골든아워에 접어든 상태예요.”

“…….”

양진명이 불편한 표정으로 한발 물러서자.

도수가 강석현 센터장에게 말했다.

“오성그룹 선박으로 옮기는 환자들은 당장 수술이 필요한 환자들입니다.”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강석현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 도수가 대답했다.

“그러시죠.”

그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다음 환자에게 향했다. 그가 눈앞의 환자에게 집중하고 있을 무렵.

바로 뒤에서 응급처치를 마친 김광석이 말을 걸어왔다.

“괜찮겠나?”

“꼭 제가 수술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시간에 쫓기는 환자는 오성그룹 선박으로 옮겨질 환자들만이 아니었다.

오백십이 명.

이곳에 있는 의료진들만으로 커버하기에는 손이 열 개라도 부족한 환자 수였다.

김광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한마디 덧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조차 특혜 문제를 보게 되는군…….”

오성병원에서 자진해 중태에 빠진 환자들을 맡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 중 중요한 환자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환자’라고 함은 특별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환자를 뜻한다.

그 환자 한 명만 빼가기 어렵다고 판단이 서자 오성그룹 선박으로 이송하는 모든 응급환자들을 요구한 셈이다.

도수도 이 같은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실랑이를 벌여봐야 시간만 까먹고 그럴듯한 결론은 도출할 수 없을 터였다.

이번 사건에서 오성그룹의 역할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우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죠.”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김광석이 다시 손을 놀렸다.

***

몇 분이 지났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정말 정신없이 시간이 갔다.

그렇게 한참을 환자 보는 데 집중하고 있을 무렵.

오성그룹 선박에서 나타난 구명정 한 척이 이쪽으로 건너왔다.

구명정에서 내린 남자는 강석현이 데리고 왔던 의료팀 인원 중 한 명이었다.

“오성병원 응급센터 소속 레지던트 김명승입니다. 이도수 센터장님 어디에 계십니까?”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추위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표정 자체가 심하게 불안하고 초조해 보였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이민우는 그를 데리고 도수에게로 갔다.

막 환자의 상처를 봉합한 도수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이민우가 입을 떼기도 전에, 김명승이 그새를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센터장님. 저희 센터장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

표정만 봐도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장갑을 벗은 도수가 김광석에게 말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여긴 걱정 말고.”

출혈로 혈압이 떨어지고 있는 환자들은 대부분 처치가 끝난 상황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도수가 김명승에게 말했다.

“가시죠.”

그들은 구명정을 타고 오성그룹 선박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김명승이 상황 설명을 해주었다.

“삼십 대 남자 환자입니다. 센터장님께서 뇌출혈이 의심된다는 소견을 냈던 환자인데 기억하십니까?”

갑판 난간에서 발견하고 마지막으로 구출했던 환자를 말하는 것이다.

“‘의심된다’가 아닙니다.”

“예?”

레지던트가 알아듣지 못하자 도수가 덧붙였다.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란 말입니다.”

“…….”

레지던트는 선뜻 못 믿는 눈치였다.

검사도 없이 뇌출혈 소견을 낼 수 있는 건 도수뿐이었으니까.

도수가 물었다.

“그래서, 증상은요?”

“제가 나오는 시점에는 경련이 있었습니다.”

뇌출혈 환자한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증상이다.

이송 중 특별한 문제가 생겼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일단 가보죠.”

“실례지만 질문 하나 드려도?”

도수가 쳐다보자 김명승이 물었다.

“무슨 근거로 뇌출혈이란 진단을 하셨던 겁니까?”

그는 레지던트.

도수는 엄연히 센터장이다.

아무리 서로 다른 병원 소속이라 해도, 일개 레지던트가 센터장의 진단에 어떠한 근거 없이 토를 다는 것은 굉장히 무례한 언사였다.

그러나 도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사람이 다치거나 아프면 작든 크든 몸에 어떤 상호작용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세심한 의사는 그 같은 증상들로 환자의 상태를 알아채죠.”

“하지만 몇 가지 증상만으로 뇌출혈이라고 확신하는 건 섣부르지 않을까요?”

“병원에 도착하는 대로 검사를 해보면 알 일입니다. 직접 봐야 확실해지겠지만 지금 당장 응급수술이 필요한 환자는 아니에요.”

“다른 수술도 아니고, 배에서 뇌수술을 할 수 있을 리가…….”

그건 도수가 봐도 조금 위험한 판단이었다.

해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하죠.”

“큰일이네요. 저희 센터장님께선 센터장님이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으실 거라고 하셨는데.”

도수는 쓴웃음을 삼켰다.

정확히 환자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파악도 못 하면서 문제 해결을 기대한다고?

아니.

책임 전가를 시키려는 것이다.

그는 오성병원 의료팀이 응급환자들을 떠맡은 이유가 그 남자란 것을 직감했다.

“뭐, 해결할 수 있을지 없을지. 두고 보자고요.”

그걸 끝으로 도수는 입을 닫아버렸다.

레지던트도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처음 도수를 부르러 왔을 때보다 훨씬 표정이 차분해져 있었다.

작은 차이였지만 도수는 그 원인을 알 수 있었고, 모른 척했다.

눈앞의 레지던트나 선박 안의 오성병원 응급센터장 생각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최초 진단을 한 도수가 지원 요청을 오케이하고 오성그룹 선박에 탑승하기만 한다면 남자가 잘못됐을 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울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여기서 도수에게 든 감정은 분노도 실망도 아닌 의문이었다.

‘도대체 누구기에 오성에서 눈치를 보는 거지?’

그저 그게 궁금할 따름이었다.

***

거대한 선박.

이곳에는 간이 수술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언제 이런 준비를 다하고 온 것인지, 놀라움에 놀라움을 더한다.

오성의 저력은 도수의 기대치를 한참 넘어섰다.

간이 수술실을 지나 특실 앞에 다다르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응급센터장 강석현이 말을 걸었다.

“어서 오십시오.”

“대충 들었습니다. 경련을 일으켰다고.”

“맞아요. 이 센터장이 환자분을 뇌출혈이라고 진단했기에 이렇게 모신 겁니다.”

강석현은 레지던트처럼 ‘어떻게 진단했느냐’고 묻지 않았다.

“다행히 지금은 좀 안정을 찾은 상태십니다. 원인도 파악하셨으니 치료에도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죠.”

도수는 특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갑판 위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남자가 누워서 그를 쳐다봤다.

“이도수입니다.”

“선생님이…….”

남자가 말을 이었다.

“제 목숨을 구해주신 분이로군요.”

목이 메는지 발음은 어눌했고 눈시울까지 붉히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본 도수가 말했다.

“좋은 데 계시네요. 왜 갑판 위 난간에 그렇게 계셨던 겁니까?”

도수는 파악하라던 환자 상태는 파악하지 않고 사적인 질문이나 던졌다.

그 모습에 뒤에 서 있던 강석현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함부로 끼어들지 못했다.

‘뭐 하는 거지?’

그러든 말든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사람들을 피신할 수 있게 도왔습니다. 아무래도 다 큰 남자가 힘도 세고 도망칠 때도 여러모로 유리하니까요.”

“많이 구하셨나요?”

“꽤 많이 구했습니다. 몇 명인지는 기억 안 나지만 제법 많은 사람들이 피신했을 겁니다.”

뿌듯한 얼굴을 한 그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리고는 나지막이 물었다.

“몇 사람이나 죽었습니까……?”

“한 명도요.”

“예?”

“환자분 같은 분들 덕분에 모두가 살았습니다.”

“……!”

남자는 무어라 말하지 못했다.

그러더니 왈칵 눈물을 터뜨렸다.

“…젠장. 하! 하느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도수가 말했다.

“많이 다치신 걸 들으셨을 텐데 그것에 관해선 안 물어보시는군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남자는 눈물 범벅 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전부 다 살았다잖아요? 이 일보다 중요한 일이 어딨습니까. 감사할 따름입니다. 감사해요.”

그가 도수의 손을 붙잡았다.

“선생님도 많이 다치고 지치신 것 같습니다. 큰 빚을 졌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도수는 자세를 낮춰서 눈높이를 맞추며 미소지었다.

“앞으로 더 큰 빚을 지게 되실 텐데, 너무 벅차면 안 갚으셔도 됩니다.”

“그게 무슨……?”

도수는 이미 한참 전부터 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어느새 투시력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남자의 뇌 속을 살폈다.

전처럼 출혈도 심하지 않고 출혈 위치도 나쁘지 않았다. 거기다 하나 더. 그의 의협심을 하늘이 도왔는지 더 이상의 출혈이 발생하지 않았다.

반대로 말하면 빠른 시간 내에 수술을 하기보다 어느 정도 피가 굳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술을 하는 편이 효과적이었다.

지금 당장 머리를 열고 수술할 경우 석션으로 피를 빼내는 과정에서 뇌에 부담이 가거나, 피가 다른 곳까지 흘러 들어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일반적인 수술법에 비해 더욱 정교한 고차원의 수술을 할 수 있는 도수에 국한된 판단이었다.

“저한테 수술을 받겠다고 하세요.”

그래야 환자에 대한 권한을 가질 수 있고, 환자를 자신의 방식대로 치료할 수 있었다.

지금 상태에서 환자의 상태를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것은 도수.

앞으로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것도 도수였다.

도수는 스스로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고.

환자 또한 아무런 설명 없이도 그를 믿었다.

“그럼요. 제 목숨을 살려주셨는데… 제가 믿을 건 선생님뿐입니다.”

그는 도수의 어깨 너머, 지금 돌아가는 상황에 혼란을 겪고 있는 강석현을 향해 말했다.

“들으셨다시피 저는 이 선생님한테 치료를 받고 싶습니다. 여사님께는 제가 잘 말씀드릴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

환자의 상태조차 불분명한 지금 강석현은 이 상황을 반겨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