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배 안은 아비규환(阿鼻叫喚)이었다.
벌써 배가 칠십 도쯤 기운 시점.
한 시간 사십 분 만에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박지영 승무원은 객실을 향해 내달렸다.
머리 위에서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현 상황은 실제 상황입니다. 승객 여러분들께선 구명조끼를 착용한 후 갑판으로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구명조끼를 착용한 후 갑판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어선 두 척이 이리로 향하고 있다는 무전을 받은 상황.
두 척의 어선에 탈 수 있는 사람은 기껏해야 이백 명이 안 된다.
그것도 낑겨 탔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개 승무원에 불과한 박지영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방송만으론 부족했기에.
그녀는 직접 뛰어드는 쪽을 택했다.
철컥!
문을 열자 물이 차오르는 가운데 비명을 지르고 있는 승객 네 명이 보였다.
“피하세요!”
그녀가 외쳤으나 돌아오는 건 비명뿐이었다.
“나 죽기 싫어!”
“물 계속 들어와!”
“으, 차가워. 씨발.”
풍덩!
물에 뛰어든 박지영은 무릎까지 차올라서 질척거리는 바닷물을 헤치며 승객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더 크게, 다시 한번 외쳤다.
“나가세요!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돼요!”
“아!”
“승무원이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구조대가 오고 있어요! 지금 바로 나가셔야 해요!”
그제야 패닉에 빠졌던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서 바닷물을 헤치며 복도로 나갔다.
몸무게가 가벼워서 이리저리 휩쓸리는 소녀를 부축해서 복도로 나간 박지영이 그녀의 구명조끼를 단단하게 조여주며 말했다.
“먼저 가요.”
“언니는요?”
“승객들이 남아 있어요. 승무원은 마지막이에요.”
“아…….”
공포에 의해 떨리는 눈빛.
소녀가 쉽게 발을 떼지 못하자.
그녀가 미소를 보이며 덧붙였다.
“괜찮아요. 먼저 나가도 돼요.”
“…….”
소녀가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미안해요, 언니.”
“미안하긴.”
머리를 헝클어뜨린 박지영은 다른 객실로 향했다. 뒤에서 그녀를 쳐다보는 소녀의 눈길이 느껴졌으나 뒤돌아보지 못했다. 뒤돌아보는 순간,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정차웅은 이제 열다섯 살이었다.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몸이 덜덜 떨려왔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서려 있던 장난기는 싹 달아나 있었다.
배가 크게 기울면서 심각성을 인지한 것이다.
그는 함께 있던 또래 여자아이를 바라봤다.
구명조끼가 부족해서 맨몸으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아마 자신보다 더 두려울 것이다.
물은 차고 있지, 의지할 데는 없지, 수영도 못한다고 했다.
‘그래, 난 어떻게든…….’
그래도 물에 뜰 수는 있지 않은가?
수영도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옛날에 배운 적이 있었다.
그렇게 끊임없이 자신을 독려하며, 정차웅은 구명조끼를 벗기 시작했다.
“…뭐 해?”
엄마 친구 딸.
소위 엄친 딸.
그리 친하지도 않은 녀석과 함께 이런 상황에 처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부모님들과 식당에서 밥을 먹다 먼저 빠져나와서 방에 와 있던 게 이렇게 후회될 수가 없었다.
“너 입어.”
정차웅이 구명조끼를 내밀자.
여자아이가 물었다.
“넌?”
“난 수영 배운 적 있어. 엄마, 아빠들도 오실 거고.”
의연한 척했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다.
“…….”
망설이는 여자아이의 품에 구명조끼를 떠밀 듯 안겨준 정찬웅이 말했다.
“괜찮아.”
안 괜찮다.
정말 괜찮아졌으면.
이 지옥 같은 상황이 끝나길 바랄 따름이었다.
***
“빨리 빠져나가요!”
남윤철은 승객들을 지나 보내고 있었다.
이쪽은 이미 가슴까지 물이 찬 상태.
배가 기울면서 승객들은 위쪽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우르르르르!
“빨리!”
남윤철이 물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버둥거리는 팔목을 끌어 올렸다.
“사, 살려주세요! 어푸! 어푸!”
“몸에 힘 빼요! 갑시다!”
그는 바닷물이 차서 시야가 혼잡한 가운데에서도 소년의 등을 반대편으로 떠밀었다.
남윤철의 도움으로 무사히 난간을 잡고 몸을 지탱한 소년이 뒤를 돌아봤을 땐, 아무도 없었다.
“아저씨……?”
그러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 순간, 깜빡거리던 불빛조차 점멸됐다.
***
“지금 사람들 구하러 가야 돼. 길게 통화 못 해. 끊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양대홍 선장은 눈가를 비비며 다시 시야를 확인했다.
한 사람이 물살에 떠밀려 나오고 있었다.
방금 아이를 구하고 물에 빠진 남윤철이었다.
“이런 젠장!”
조타실을 나선 그는 얼른 구조용 튜브를 향해 달려갔다. 사람들이 대피하는 방향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곧 바닷물이 채울 튜브 앞에 도착한 그는 무겁고 커다란 고무 튜브를 풀어서 바다로 던졌다.
그리곤 크게 외쳤다.
“이거 잡아요!”
바닷물이 순식간에 무릎에서 허벅지까지 차올랐다. 중심이 흔들리는 절체절명의 순간.
의식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인간의 강한 의지가 의식을 깨운 걸까?
남윤철이 튜브를 잡고 매달렸다.
“기다려요! 당길게, 꽉 잡고 있어!”
남윤철은 한 손으로 쇠기둥을 잡은 채 튜브가 연결된 밧줄을 당겼다. 거친 밧줄에 손바닥이 다 벗겨졌으나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는 것.
그게 이 배를 책임진 선장으로서의 역할이었다.
***
수십 명의 승객들을 먼저 내보낸 최혜정은 물속에서 몸을 끌어 올렸다.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의식도 가물가물했다.
“으…….”
딱딱.
이빨을 부딪치면서도.
그녀는 힘겹게 남윤철을 끌어 올리고 있는 양대홍 선장을 발견했다.
그는 무척 힘에 부쳐 보였다.
그에 반해 바닷물은 급속도로 빠르게 차오르고 있었다.
이대로 있으면 두 사람 다 바닷물에 쓸려갈 것이다.
“후우, 후우…….”
심호흡을 하며 멀어지는 의식을 붙잡은 그녀는 까마득한 내리막길을 향해 몸을 날렸다. 마치 무서운 미끄럼틀을 타듯 몸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퍼억!
“욱!”
쇠기둥에 부딪힌 그녀는 신음을 흘렸다.
배에서 느껴진 끔찍한 통증이 정신을 일깨웠다.
양대홍 선장이 고개를 돌리자.
눈이 마주친 그녀가 말했다.
“도… 울게요!”
몸을 일으킬 힘도 없는 그녀가 밧줄을 잡고 힘을 주었다.
스스슥.
마침내 남윤철이 매달린 튜브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양대홍 선장도 더 큰 힘을 냈다.
“하나! 둘! 조금만 더! 헛, 둘……!”
남윤철 역시 발이 닿은 시점부턴 힘차게 바닥을 박찼고, 두 사람은 간신히 기둥에 몸을 걸칠 수 있었다.
기진맥진한 최혜정이 말했다.
“하아, 하아… 구조대가 오긴 할까요?”
“온다 해도…….”
양대홍은 완전히 기울어진 선체를 올려다봤다. 사람을 구하고 보니 허망하게도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온몸에 힘이 빠진 그.
“우린 갑판까지 못 갈 것 같습니다.”
그게 현실이었다.
특히 한눈에 봐도 부상이 심한 최혜정이나 남윤철을 데리고 갑판까지 가는 건 무리였다.
양대홍 선장은 여기까지 오기 전 가족들과 못 다한 통화를 하기 위해 주머니를 뒤적거렸지만 핸드폰은 보이지 않았다. 최혜정이나 남윤철 역시 머리부터 발끝까지 쫄딱 젖었으므로 연락할 방도가 없을 터.
“…한마디라도 더 할 걸 그랬나.”
중얼거린 양대홍이 눈을 질끈 감았다. 왜 마지막 순간에 그가 태운 승객들의 얼굴이 뇌리를 스치는 걸까?
모든 걸 단념한 세 사람.
남윤철이 입을 뗐다.
“그래도 통성명이나 합시다. 전 남윤철입니다.”
“…최혜정이에요.”
“양대홍입니다.”
그 외에 어떤 소개도 필요 없었다.
그들이 지금 한자리에 있고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게 됐다는 것.
그것만이 중요할 따름이다.
그들이 몸을 지탱하고 있는 쇠기둥이 가라앉기 시작하는 그 순간.
불현 듯, 확성기를 타고 외침이 들려왔다.
“그쪽으로 갑니다!”
모퉁이를 돌아 나타난 허름한 어선 위에는 우비를 걸친 누군가가 서 있었다.
그가 누군지는 중요치 않았다.
살길이 보인다는 것.
양대홍이 두 팔을 휘저으며 크게 외쳤다.
“살려주세요!”
***
우비의 남자는 도수였다.
장비를 착용한 그는 당장이라도 구조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향해 뛰어들 것처럼 한 발을 난간에 걸치고 있었다.
뒤에서 장비가 제대로 조여졌는지 확인해 준 이민우가 말했다.
“진짜 선생님 말이 맞군요.”
그는 적잖이 놀랐다.
위급한 상황에서 구조대보다 더 날카롭고 이성적인 판단을 했던 것이다.
그들은 처음, 갑판에 서 있는 인원들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두 척 모두 그리로 향하고 있는데.
도수가 불현듯 제안했다.
갑판 위의 인원이 백 명도 안 되어 보인다고. 그들에게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 한 척은 뒤로 돌아가 위험 지대에 있는 사람들부터 구하자고.
그리하여 뒤로 돌아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지금도 배가 거의 가득 찰 정도로 많은 승객들을 실은 상태였다. 그 와중에 만난 것이 기둥에 몸을 지탱하고 있는 세 사람이었다.
도수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합리적인 구조 작전을 수행하지 못했을 터.
감탄은 감탄이고, 이민우가 구조대장으로서 말했다.
“…직접 안 가셔도 됩니다. 선생님까지 위험해질 수 있어요.”
“저 여자 승객 보여요?”
최혜정을 말하는 것이다.
이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데요?”
“부상이 심합니다.”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일단 출혈.”
도수는 최혜정의 허벅지를 가리켰다. 이민우가 다시 보니 원래 빨간 바지가 아니라 흰 바지에 피가 스민 형색이었다.
“아…….”
도수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샤아아아아아아.
과연 닿을까?
하지만 거리완 상관없이 인체에 한해 투시력이 발휘됐고.
웅크리고 있는 그녀의 배 속이 보였다.
“갈비뼈도 부러진 것 같습니다.”
“그걸 어떻게……?”
이민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늑골이 부러지면 숨 쉬기도 힘들다.
그에 비해 최혜정은 비교적 양호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수는 그 짐작을 전면 부정했다.
“신경은 다른 데 가 있고 체온은 떨어졌고 의식도 멀어져서 통증을 그대로 못 느끼고 있는 것뿐입니다.”
굳이 어떻게 그녀의 상태를 상세하게 파악했는지까진 설명을 달지 않았다.
이민우도 그러려니 했다.
“체온이나 의식도 문제겠군요.”
“네. 보기완 다르게 위중한 상태예요. 더 악화되면 안 됩니다. 제가 가서 응급조치를 할 테니 이송만 맡아주세요.”
점점 거리가 가까워지자.
우려했던 대로 최혜정의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위협하고 있었다.
무리하게 움직이다 그대로 찌르고 들어가면 폐동맥까지 찔릴 수 있는 상태.
이건 투시력이 없는 구조대만의 힘으론 안전한 구출이 힘든 상황이다.
도수는 확성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가죠.”
그의 손에는 확성기 대신 의료 가방이 들렸다. 승객 오백십이 명. 가능하면 전원 다 구하고 싶었다. 이미 물에 빠진 사람도 있을 테고 큰 부상을 입은 채 물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도 있을 터였다.
그들을 맡는 건 도수의 몫이 아니었다. 그는 난간에서 뛰어내리기 전 고개를 돌렸다.
구조대원들이 배에 줄을 매단 채 입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툭, 툭.
도수의 어깨를 두드린 이민우가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최정예 대원들입니다.”
끄덕.
도수는 코앞의 대상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각자 맡은 바 역할을 끝까지 수행한다면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얼굴을 얼얼하게 만드는 세찬 눈보라를 맞으며, 그는 날씨에 모순되게도 실낱같은 희망만을 직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