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서쪽에서 발생한 사고
택시를 탄 도수가 핸드폰을 귀에 붙인 채 말했다.
“천하대병원이요.”
“알겠습니다, 손님.”
부르릉.
택시가 출발하자.
도수가 수화기에 대고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서해에서 인천으로 들어오던 배 한 척이 침몰 중이라고 합니다.
서해?
천하대병원이 있는 곳은 서울이다.
그렇다면.
“지원 요청이 들어온 겁니까?”
-그렇습니다. 한데 상황이 정말 안 좋습니다. 눈이 내리는 데다 안개도 자욱하고 바람도 많이 불어서…….
말을 잇지 못하는 이시원.
천하대병원 중증외상센터는 아로대학병원 중증외상센터와 더불어 국내에 둘뿐인 권역센터다. 그러니 헬기가 배정된 것이고.
즉, 필요한 경우 서울뿐 아니라 경기권까지 손길을 뻗을 수 있다는 의미다.
도수가 말했다.
“일단 출동 준비 서둘러 주세요.”
헬기로 가면 오래 걸릴 거리는 아니다.
이시원이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상 악화 때문에 기장들이고 항공청이고 비행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부원장님도 돌아가는 상황을 좀 더 지켜보자고 하시고요. 센터장님을 호출하라고 한 건 김광석 교수님이십니다.
김광석 교수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이사장과 직통으로 대화를 나눌 적임자가 필요한 것이다.
도수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일단 준비해 주세요.”
-예……!
전화를 끊은 도수는 즉시 이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고 이사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식 들었다.
“지금 어디세요?”
-들어가는 길이다. 너는?
“저도 들어가고 있습니다. 병원에서 연락 온 바로는 출동이 힘들다고 하거든요.”
-이런 악천후에 헬기를 띄우는 건 위험하다.
“지금 배가 가라앉고 있다잖아요?”
-…….
“이 날씨에 구조가 늦어지면 다 죽을 겁니다.”
부상자도 많겠지만 꼭 부상을 당하지 않았어도 배가 완전히 침몰하면 물에 빠진 사람들의 체온은 계속 떨어질 것이다.
이는 이사장도 알고 있는 부분이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항공청에서 막는 걸 어떻게 하란 말이냐. 나도 안타깝다. 부원장이 조금만 빨리 대처했어도 몇 대는 떴을 텐데…….
어조에서 안타까움이 묻어났으나 지난 일을 후회해 봐야 소용없다.
도수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방법을 찾아보죠.”
-어떻게?
“그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알겠다.
다시 전화를 끊을 때쯤.
택시는 병원 앞에 도착해 있었다.
택시비를 계산한 도수가 차에서 내려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응급실로 걸어 들어가며 말했다.
“이도수입니다.”
-이렇게 빨리 다시 연락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매디 보웬이었다.
도수가 물었다.
“뉴스 보셨죠?”
-물론. 넌?
“전 아직 못 봤습니다만 대략적인 상황은 압니다.”
-안 그래도 현장으로 가고 있던 참이야.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을까요?”
-부탁? 사고와 관련된 거겠지?
“네.”
부스럭거리던 매디 보웬이 물었다.
-무슨 부탁인데?
“미군에 헬기 요청을 하고 싶습니다.”
-이런.
매디 보웬이 곤혹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그건 내 소관이 아니야. 아는 사람 통해서 요청해 보긴 하겠지만 너무 기대하진 말고.
“알겠습니다.”
도수가 전화를 끊었다.
그 주위로 김광석, 강미소가 다가와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김광석이었다.
“방법을 찾은 거냐?”
“아뇨. 확실치 않습니다.”
“…빨리 가야 할 텐데.”
강미소 역시 손톱을 뜯으며 말했다.
“승객만 오백 명이 넘는다고 했어요. 이대로 있으면 대형 참사로 이어질 거예요.”
“이시원 선생은요?”
도수가 묻자 그녀가 대답했다.
“인턴 둘 데리고 출동 준비 하고 있어요. 조근현 교수님도 여기저기 알아보신다고 전화 돌리고 계시고…….”
“아사다 선생은요?”
“모르겠어요. 아까 환자 보러 가셨는데.”
그 순간.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양반은 못 되는지 아사다 류타로가 달려왔다.
“어쩌면 방법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화색을 띠고 있었다.
뜻밖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도수가 물었다.
“무슨 방법이요?”
“엄승진 환자가 깨어났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희소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냥 기뻐할 수 없는 상황.
아사다 류타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엄승진 환자는 CIA고요……! TV를 보다 저한테 상황을 묻고는 바로 어딘가로 연락을 취하더라고요. 헬기가 출동할 수 있도록 힘 써보겠다면서…….”
도수의 눈이 반짝였다.
엄승진이 나섰다면 한국보단 미국 측에 연락을 했을 것이다.
대사관일 확률이 높았다.
대사관은 다시 주한미군에 연락을 할 테고.
매디 보웬에 이어 엄승진까지 힘을 쓴다면, 어쩌면 좋은 소식을 만들 수 있을지 몰랐다.
“갑시다.”
도수는 아사다 류타로를 대동하고 엄승진을 찾아갔다. 엄승진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도수를 본 그가 대뜸 말했다.
“기다려 보십시오. 대사님께 연락을 해서 상황의 심각성을 알렸습니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여 보인 도수가 물었다.
“몸은 좀 어떠신지.”
“선생님 덕분에 아주 좋습니다.”
“아직 완치된 건 아닙니다.”
도수의 말에 엄승진이 흠칫했다.
“뭐가 더 남았습니까?”
“…가슴을 열고 수술을 했지만 뭐가 환자분의 심장을 녹였는지 밝혀내질 못했습니다. 비대해진 심장을 절제하는 수술을 성공한 후에도 심장이 녹아내린 것처럼, 원인을 찾지 못하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엄승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수도 있겠군요.”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진 마세요. 최선을 다해 원인을 찾아낼 겁니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지난번에는… 감정이 격해져서 무례를 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잠시 뜸을 들이던 도수가 덧붙였다.
“환자분 입장에선 답답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참… 희한하군요. 대사관에는 제가 그 배에 타고 있다고 얘기했는데.”
“예?”
“아직 제가 한국에 온 행적은 CIA밖에 모르는 상태입니다. 대사관에선 제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뜻이죠. 그래서 거짓말을 좀 했습니다. 그래야 움직여 줄 것 같아서.”
“아아.”
“…그런데 진짜 저 사람들처럼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군요.”
“일단 수술은 성공했으니까 시간을 번 셈입니다. 바로 문제가 생기진 않을 거예요.”
그렇게 안심시킨 도수는 고개를 돌려 TV를 보았다. 뉴스에선 끊임없이 속보를 내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구조대도, 의료팀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니 실용적인 정보는 전무했다.
“시간만 가는군.”
김광석이 초조하게 말했고.
도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이도수입니다.”
-역시 안 됐어.
도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유는요?”
-군사 목적이 아닌 구조 목적으론 헬기를 띄울 수 없대. 한국 정부에 요청하라고 하더라.
“젠장.”
-…처음부터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래.
뚝.
전화를 끊은 도수가 엄승진을 바라봤다. 이제 희망은 그밖에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엄승진의 전화기가 울렸다.
엄승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사다 류타로가 스피커폰을 켰다.
-미스터 엄.
“어떻게 됐습니까?”
-거기 상황은 어떤가?
“안 좋습니다.”
-이런 젠장. 주한미군 총사령관에게 직통으로 문의를 해놓긴 했는데. 사령관이 직접 천하대병원으로 연락을 주겠다더군. 아무리 사령관 재량이라 해도, 이 일로 병력 손실이라도 발생하면 책임을 고스란히 떠안을 텐데 승낙하기 힘들 거야.
“…….”
-왜 대답이 없어? 자네는 얼마 전까지 현장 요원이었잖아? 포기하지 말고 어서 다른 방법을 찾아보게!
“일단…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빌어먹을!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은가?
대사는 순진한 질문을 던졌다.
계속해 엄승진이 현장에 있는 줄 아는 것이다.
무사히 속았기에 엄승진은 최후의 보루로 감정에 호소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절박합니다.”
-내 최대한 손써보겠네.
“부탁드립니다.”
뚝.
전화를 끊은 엄승진이 도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대사가 힘써본다고 약속하긴 했어도 힘들 거라는 뜻이다.
모든 희망이 사라지자 이제 TV 화면을 보며 오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대참사에 휘말리는 걸 두 손 놓고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제기랄.”
김광석이 평소의 그답지 않게 욕설을 뱉었다.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는 한마디였다.
바로 그 순간.
병실 문을 거칠게 밀치며 간호사 이하연이 들이닥쳤다.
“센터장님!”
모두의 시선이 주목되자.
그녀가 숨을 고를 생각도 못하고 다시 외쳤다.
“헉, 허억… 그… 주한 미군에서 연락이 왔어요! 헬기 띄우겠다고!”
병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게 정말인가?”
김광석이 묻고.
이하연이 대답했다.
“네! 후우, 후우… 센터장님을 ‘친구’라고 부르셨다던데요…….”
“친구?”
강미소가 눈을 치떴다.
“센터장님, 주한미군에도 친구 있으세요?”
대사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 미군 헬기를 띄울 정도면 친구도 보통 친구가 아니다.
도수는 선뜻 생각나는 사람이 없어 물었다.
“이름이 뭐라고 했습니까?”
“어- 음… 아! 주한미군 총사령관라고 했어요! 할리 무어 장군! 할리 무어요!”
할리 무어.
도수와 김광석이 시선을 맞추고 웃음을 터뜨렸다.
“기막힌 우연이 있나.”
김광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와 도수가 있었던 라크리마에서 UN군 사령관 역할을 했던 할리 무어 장군이 주한미군 사령관으로 온 것이다.
그야말로 기가 막힌 우연이었다.
“센터장을 바꿔달란 말은 안 했나?”
“네, 그런 말은 없으셨고… 여전하시다고.”
도수가 피식 웃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하연을 다독인 도수가 병실 안의 김광석과 강미소를 보며 말했다.
“뭐 해요? 빨리 출동하죠.”
김광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후가 문제인가? 일본은 히로시마 원폭이 터졌을 때도 전국 외과의 수백 명이 너나 할 것 없이 방사능에 뒤덮이고 낙진 부는 곳을 뚫고 날아 들어갔다던데.”
툭.
아사다 류타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한 말.
돌아가는 상황을 정확히 모르는 류타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그러나 김광석은 대답하지 않고 병실을 나갔다.
도수가 아사다 류타로에게 말했다.
“우린 저곳에 갈 겁니다.”
어디 하나 의지할 곳 없는 망망대해에 갇혀 침몰하고 있는 선박 한 척.
아사다 류타로의 눈빛에 두려움이 서렸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고 물었다.
“저도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한 상황이었다.
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한다면.”
그는 병실 문턱을 넘기 전, 여전히 TV에서 눈을 못 떼고 있는 의료진들에게 말했다.
“억지로 가자는 말은 안 합니다. 하지만 우리도 일본한테 질 수 없잖아요. 우리도 가서 사람 살립시다. 저 사람들, 목 빠지게 우리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수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
아까까지만 해도 어렴풋이 보이던 선박의 형체가 안개에 파묻힌 채 시야에서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