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각자의 입장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이사장은 화색을 띠었다.
“그래. 그게 좋겠구나. 따로 얘기할 시간도 없을 텐데.”
“여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임옥순이 거들자.
목례한 도수는 나유하에게 눈치를 준 뒤 함께 룸을 나갔다.
드르륵.
문이 닫히기 무섭게 감정을 억누르고 있던 정영록이 입을 뗐다.
“누가 되지 않는다면 한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몸에 밴 것처럼 공손했다. 도수가 두 어른을 대할 때완 다른 태도였다.
그럼 뭐 하겠는가?
이미 두 어른의 눈길은 도수에게 머물러 있는데.
이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라.”
정영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양가의 혼사를 염두하고 계신 건지.”
“그게 인력으로 될 일이냐.”
이사장이 조용하란 말을 돌려서 한 그때.
뜻밖에도 임옥순이 치고 들어왔다.
“물론 남녀 일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두 아이가 실과 바늘처럼 잘 어울린다면요?”
이사장은 일순 흠칫했다. 그러나 곧 당황한 기색을 지우고 대답했다.
“그것도 인연이니 기쁘고 감사한 일 아니겠습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무슨 말씀이신지…….”
이사장이 조심스럽게 되묻자 임옥순이 어깨를 으쓱였다.
“저는 이사장님이 이도수 선생을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서요. 같은 입장이니 하는 말이지만 품 안의 자식을 잃는 기분이 들 수도 있잖아요.”
미소 띤 그녀.
역시,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그저 집안 어른의 입장처럼 얘기했으나 내막에는 도수를 탐내는 욕심이 깃들어 있었다.
이사장은 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손자 녀석들이 있는 자리에서 이런 질문을 받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불편하시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불편할 게 있겠습니까.”
자리에 남은 손자들의 면면을 일별한 이사장이 임옥순에게 말했다.
“제 생각에는 후계 문제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아직 결정된 게 없어서 조심스러울 뿐입니다. 직책이 이사장이라 해도 엄연히 경영진과 병원 중역들이 있는데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니까요.”
“음… 이사장님께선 이 선생을 후임으로 염두하고 계신다는 말처럼 들리네요.”
임옥순은 집요했다.
그에 이사장이 다시 한번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센터장도 병원에서 중책을 맡고 있으니 후보가 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꼭 혈육에게 이 자리를 물려줘야 하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모두와 상의해서 이 자리의 중압감을 견디고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사람. 이사장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을 선발해야겠지요.”
“흠.”
임옥순은 미소를 거뒀다. 돌아온 답변이 정론이라 더 캐묻고 싶지 않았다. 하긴, 두 손자가 똑똑히 듣고 있는 자리에서 후계자를 도수로 못 박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사장의 표정이나 태도에서 도수를 중히 염두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었다.
정영록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표정이 굳어졌다.
‘이 아이는 속내를 숨기지 못하는군.’
그를 보던 임옥순은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정영훈은 아무 말도 못 들은 것처럼 물을 홀짝이고 있었다.
‘이쪽이 나은 것 같기도.’
딱 여기까지.
어차피 남 일이다.
그녀가 원하는 건 도수였다.
마음 같아선 나유하를 도와 오성그룹의 의료재단에 큰 힘이 되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도수의 명성만 해도 충분히 도움이 된다.
물론 이사장도 그걸 알기에 속내를 감추는 것일 테지만.
임옥순은 불필요한 기 싸움을 하지 않기로 했다.
“개의치 마세요. 보기 드물게 훌륭한 손자분을 두셔서 제가 주책을 부렸습니다.”
“별말씀을… 유하야말로 곧고 예쁘게 잘 자랐습니다. 다만 도수와도 이런 얘길 나누지 않아서 뭐라 드릴 말씀이 없었던 것뿐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도수 쪽에서 관심이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사장의 어조에서 씁쓸한 감정이 묻어났다.
재단이나 병원을 물려주는 건 하루아침에 성사되는 일이 아니었다. 이사장 자리나 병원장 자리는 단순히 수술 잘한다고 수행할 수 없는 자리. 오히려 의사로서의 능력보단 정치적인 능력, 경영 측면의 능력이 필요했다.
‘소양을 갖추자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하거늘.’
이사장은 도수가 나간 문 쪽을 흘깃 보았다.
아로대학병원장을 해임 시킨 건, 그리고 협상 끝에 천하대병원 센터장 자리를 안고 들어온 건만 봐도 막내 손자의 재능을 알 수 있었다. 더구나 이사장인 자신과 협상을 할 정도로 대담하고 냉철하고 영리하다.
그럼에도 본인은 관심조차 안 보이니.
이사장은 목이 타서 물만 들이킬 따름이었다.
***
갑갑한 식당을 벗어난 도수는 나유하와 호텔 로비의 카페로 갔다.
나유하는 주문을 하고 앉자마자 도수를 유심히 뜯어봤다.
“흐음.”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도수가 묻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이상해서요.”
“뭐가?”
“제 입으로 얘기하긴 자존심 상하는데.”
“피차 자존심 상할 거리는 없을 것 같은데요.”
“이거 봐.”
나유하가 말을 이었다.
“저랑 그다지 친해지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은데 단둘이 커피 마시자고 하는 게 이상하잖아요.”
도수는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순순히 수긍하자 나유하가 미간을 찡그렸다.
“인정하는 게 더 기분 나쁘네. 일본 연수는 핑계였죠?”
“아시다시피.”
“그럼 왜 저랑 커피 마셔요?”
“얘길 좀 할까 해서요.”
“무슨 얘기?”
“제가 오해했으면 정정해 줘요.”
그렇게 양해를 구한 도수가 본론을 꺼냈다.
“제가 보기에 두 어른이 우릴 이어주려고 하시는 것 같던데.”
“잘 아시네요.”
“알고 있었어요?”
“여기 와서 알았어요.”
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알았으면 안 왔겠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아직 어리고 예쁜데 이런 부담스러운 자리를 반길 것 같진 않아서.”
나유하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나이차도 얼마 안 나면서. 칭찬이에요?”
“사실입니다.”
“……!”
나유하가 볼에 홍조를 띤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분 나빴는데 풀렸어요. 예뻐 보이긴 하나 봐요?”
“예뻐 보이는 게 아니라 예쁜 겁니다.”
“그게 그거죠.”
“자존심 상할 필요 없다는 뜻이에요.”
“자상하기까지? 지금 제 얘기 기억하고 배려해 주시는 거예요?”
이번에는 도수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각자 입장만 생각하기로 하죠.”
그가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 보니 할머님이 애정을 많이 주시는 것 같던데.”
“지나치죠.”
“그래서 말인데, 할머님 말씀에 너무 의미 두지 않았으면 합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겠는데 설명 좀 해주세요.”
“오성그룹 손녀, 천하대병원 이사장 손자. 이런 타이틀 말고 자연스럽게 지내잔 거예요.”
“아하.”
나유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오성그룹 손녀인 것도, 천하대병원 이사장 손자인 것도 사실이잖아요? 말씀하셨던 것처럼 제 나이 꽃다운 열일곱이에요. 열일곱 살에 이런 자리에 불려 와서 선보듯 마주 앉아 있는 자체가 이미 자연스러움을 벗어났어요. 안 그래요?”
“그건 그렇지만.”
“그러니까.”
말을 자른 나유하가 덧붙였다.
“전 그리 자유롭지 않다는 뜻이에요. 센터장님은 이사장님 눈치를 안 볼지 몰라도 전 할머니 눈치를 엄청 보거든요. 할머니가 원하시면 전 자존심이 상해도 센터장님한테 연락을 하고 친분을 쌓아야 한다는 의미죠.”
“…….”
나유하의 말처럼 이미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일까.
도수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할머님 말씀에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하는 겁니까?”
“제 할머니가 그랬고, 제 어머니도 그랬으니까요. 센터장님 운명은 센터장님의 것이겠지만 제 운명은 제 것이 아니에요.”
“본인 운명이 본인 게 아니라고요?”
“그래요. 집안이 정해준 사람을 만나고, 정해진 혼처로 시집을 가죠. 우리 집안 사업을 함께 이끌어나갈 재량이 되는 사람. 혹은 우리 집안을 더 부유하게 만들어 줄 사람. 그런 사람이 어디 흔한가요? 그런 사람을 만나야 하니까, 그래서 전 선택권이 없는 거예요.”
“저는 자격 미달 같은데.”
“할머니 눈에는 아닌가 보죠.”
“음.”
도수가 침음하자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저한테 무조건 협조하란 뜻은 아니에요. 센터장님은 자유롭게 하세요. 저는 할머니 말을 들을 테니까. 그러니 또 다시 저를 이런 자리에서 만난다고 해도 저를 이상하게 생각하진 말아주세요.”
그렇게 말한 나유하가 덧붙였다.
“…오늘 같은 이런 얘기도 하지 말아주시고요. 선생님 입장은 잘 알았어요. 된 거죠?”
“…….”
도수는 그녀를 천하대병원에서 봤을 때 느꼈던 분위기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그녀는 새장에 갇힌 새 같았다. 오늘 그러하듯. 그리고 임옥순 병실에 갔을 때, 그녀는 마치 말 잘 듣는 강아지 같았다. 그녀에 대한 임옥순의 사랑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정작 나유하는 항상 억압된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도수가 말했다.
“미안합니다.”
진심 어린 사과였다.
본래 의도에서 벗어났지만 나유하에게 상처를 준 셈이다.
그러나 그녀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선생님이 뭘 하셨다고요. 저한테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런 표정 짓지도 마시고.”
“…….”
“일어날까요?”
끄덕.
도수는 군말 없이 일어났다.
커피숍으로 자리를 피한 건 그 자리가 불편해서가 반, 나유하에게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전하기 위해서가 반이었다.
안 그래도 복잡했기 때문이다.
매일 발생하는 환자들을 구조해서 구명할 사명이 있고 입원해 있는 환자들을 어떻게 완치시킬지도 고민해야 했다.
엄승진 환자를 비롯해 부모님과 끈질기게 연관되는 B&W도 신경이 쓰였다.
뿐만 아니라 그가 책임지는 중증외상센터도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산 넘어 산이었다.
이런 그에게는 집안 문제나 나유하가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간단히 입장 정리를 하고 넘어가려 한 것뿐인데 대화를 시작하기 전보다 가슴이 훨씬 더 답답하고 묵직해진 것이다.
‘그냥 밥이나 먹을걸.’
오랜만에 후회란 걸 해보는 도수.
그런 그에게 나유하가 활짝 웃었다. 언제나처럼 밝은 미소를 보인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또 봐요.”
“그러죠.”
도수가 손을 맞잡자 그녀가 덧붙였다.
“제가 너무 감정이 격해졌던 거예요.”
“알아요.”
마주 웃은 두 사람은 손을 놓고 함께 회전문 밖으로 나왔다.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느새 호텔 앞에 대기하고 있는 고급세단.
나유하가 물었다.
“데려다드릴까요?”
“아뇨.”
도수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살던 곳에선 눈을 볼 수 없었거든요. 눈 좀 맞고 싶어서.”
“젖고 찝찝할 텐데.”
중얼거린 나유하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것도 운치죠. 그럼 전 먼저 갑니다!”
씩씩하게 말하는 그녀.
도수가 손을 흔들었고.
나유하는 차를 타고 떠났다.
그 자리에 잠시 서 있던 도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눈 내리는 거리는 반짝이는 불빛으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날에도 병원은 북적일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실려 오겠지.
어느새 도수는 병원 쪽으로 걷고 있었다.
뽀드득, 뽀드득.
굳이 눈을 밟으며 한참을 그렇게 걸었다.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울리기 전까지.
지이이이잉. 지이이이잉.
전화를 받자.
-센터장님, 큰일 났습니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시원이었다.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도수가 대답했지만.
이시원의 목소리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네, 들어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보다 정말 큰일입니다. 지금 티브이나 인터넷 좀 보십시오. 이건 정말…….
이시원은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은 도수는 전화를 끊을 생각도 못하고 대로변으로 뛰어나갔다.
“택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