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오프 날 저녁
매디 보웬을 먼저 보낸 도수는 머리가 복잡했다. 고개를 돌려 창문을 관통해 눈을 찌르는 햇빛을 마주한 그때.
뜻밖의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오늘 나갔다고 들었다.
이사장이었다.
“네.”
필요 이상의 관심.
도수가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시간 괜찮으면 저녁 식사를 함께할까 하는데.
딱히 할 일이 없었던 데다 매디 보웬에게 들은 정보를 공유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 도수가 대답했다.
“좋아요.”
-아홉 시, 삼성동 컨티넨탈 호텔 일식당이다.
도수는 문득 이상한 점을 느꼈다. 식사 승낙을 한 건 방금 전인데 식당을 미리 예약이라도 해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저 말고 다른 손님이 있는 것 같은데.”
-영훈이와 영록이도 오기로 되어 있다. 임옥순 여사님과 손녀분도.
“둘이 보자고 하신 건 줄 알았어요.”
도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 마당에 불편한 자리에 참석하고 싶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전 다음에 함께하겠습니다.”
-불편한 건 이해한다. 하지만 이렇게 가족이 모이는 자리는 흔치 않아.
“할아버지께 따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 가겠다고 했던 것뿐이에요. 피곤해서요.”
-그래도 네가 왔으면 한다.
도수가 쉽게 허락하지 않자 이사장이 덧붙였다.
-우리 식구만 있는 자리도 아니야. 임 여사님도 널 보고 싶어 하신다. 손녀분도 마찬가지고.
수술을 깔끔하게 해줬으니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 마음인 걸까?
어차피 임옥순 여사의 손녀인 나유하와는 일본 연수도 같이 가기로 얘기가 된 상황이기에 도수는 더 거부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때 뵙죠.”
-그래.
전화를 끊은 도수는 다시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러나 병원으로 돌아가지 않고 몇 블록 떨어진 천하대학교 도서관으로 갔다.
사서에게 신분증을 제시한 도수가 말했다.
“의학 서적이 어디 있죠?”
사서는 모니터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여기 F구역에 가시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목례한 도수는 무사히 입구를 통과해 F구역으로 갔다. F구역에는 의대생들이 책을 고르고 있었다.
개중 도수와 가까이 있던 여학생이 고개를 돌리다 눈을 치떴다.
“어…….”
그녀가 친구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남학생이 나란히 도수를 발견하고 입을 쩍 벌렸다.
“이도수 교수님?”
엄연히 말하면 도수는 교수가 아니었다. 직급이야 교수직을 뛰어넘는 과장급이었지만 전문과정을 수료하지 않았기에 학생들을 가르칠 자격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도수는 학생들 사이에서 ‘교수’나 ‘센터장’으로 불렸다.
“나 잠깐만.”
남학생에게 양해를 구한 여학생이 도수에게 다가왔다.
“저, 죄송하지만…….”
모른 척 하려던 도수가 고개를 돌렸다.
“예.”
“이도수 센터장님 맞으시죠?”
속삭이는 여학생.
만약 도서관이 아니었다면 환호를 질렀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얼굴은 홍시처럼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학생이 말했다.
“와, 존경해요.”
“저를 아세요?”
“당연하죠. 학생들 중에 센터장님 모르는 학생은 없을 걸요? 한국 들어오시기 전부터 알았어요. 저희 병원으로 오신 후에는 수술 참관도 했었고요.”
아마 심장성형술을 펼쳤을 때 참관했던 학생들 중 한 명인 것 같았다. 당시 과장들과 더불어 특정 수업을 듣고 있던 학생들이 참관을 왔다고 들었다.
고개를 끄덕인 도수가 책장을 가리켰다.
“책을 좀 빌리러 와서.”
“아, 네! 방해 안 할게요.”
뻘쭘하게 물러난 여학생이 덧붙였다.
“그래도 이 말씀은 꼭 드리고 싶었어요. 센터장님 덕분에 제 진로를 정했어요. 인턴 마치고 중증외상센터에 지원할 거예요.”
제발 그 생각이 변치 않길.
도수가 보기엔 인턴 실습이 끝나기도 전에 마음이 바뀔 확률이 구십구 퍼센트 같았지만, 그는 굳이 희망을 꺾지 않았다.
“병원에서 봅시다.”
눈앞의 여학생이 내년에 졸업한다 해도 중증외상센터에 오려면 일 년의 인턴 기간과 두 번의 심적 고비가 남아 있었다. 학점이나 인턴 점수는 크게 상관없다. 중증외상센터는 천하대병원 내에서도 독립적인 단체인 데다 좀처럼 지원하지 않는 비인기 분과였으니 면접만 합격하면 오케이다. 다만 두 번의 심적 고비는 인턴 과정을 통해 중증외상센터의 실상을 알고도 지원하느냐는 것. 그리고 들어와서 실상을 직접 몸으로 겪고도 그만두지 않느냐는 것이다.
아로대학병원 중증외상센터의 데이터를 고려해 보면 본인이 자원을 하고도 한 달 내에 그만두는 사람이 열 명 중 여덟, 아홉 명이었다. 당시 센터장은 김광석. 그는 이 문제로 적지 않은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별일이 없다면 앞으로 도수가 겪을 문제기도 했다.
그러나 도수는 학생을 설득하지 않았다. 어차피 사람 마음은 끊임없이 달라지고, 본인이 간절히 원치 않으면 소화할 수 없는 센터 생활이기에. 일일이 설득하고 기대하면 자신만 지칠 거라고 여긴 것이다.
학생들은 도수를 만난 것이 신기한지 괜히 주위를 맴돌며 힐끔거렸다. 결국 책을 빨리 고른 도수가 먼저 도서관을 나섰다.
그가 고른 서적은 굳이 분류하자면 모두 내과 서적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지금껏 개발된 약물에 대한 논문과 사례들이 실려 있는 서적이었다.
***
저녁 여덟 시 오십 분.
도수는 컨티넨탈 호텔에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스카이라운지에 위치한 일식당에 도착하자 종업원이 그를 가장 전망이 좋은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서자.
먼저 와있던 정영록과 정영훈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이게 누구신가.”
정영록이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반면 정영훈은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우리 천재 써전님 오셨군. 여기 앉아.”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는 그.
도수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정영록이 말을 시켰다.
“얼마 전에 또 다시 검증되지 않은 수술을 했다고?”
“…….”
대답이 없자 그가 다시 물었다.
“환자가 카데바야?”
해부학 실습용 시체를 뜻하는 카데바.
도수가 미간을 찌푸리자, 정영훈이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또 왜 이래? 모처럼 한 가족이 모였는데 삭막한 일 얘긴 접어둡시다.”
“넌 빠져.”
정영록이 이를 드러냈지만 정영훈은 눈썹 한 올 까딱하지 않았다.
“싫은데.”
형제 사이에 전류가 흘렀으나 도수는 개의치 않았다. 그들 관계에 끼고 싶지 않을뿐더러 시비조인 정영록과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다.
조용히 물 잔을 들어 올리는데.
드르륵, 다시 문이 열리며 이사장과 임옥순, 그녀의 손녀가 들어섰다.
“다들 왔군요.”
이사장의 말에 임옥순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요.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기 힘든 분들인데. 제가 무리한 부탁을 한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앉으시죠.”
그들이 착석하고.
정영록과 정영훈이 신경전을 마쳤다.
도수 맞은편에 앉은 나유하는 그를 보며 미소를 띠었다.
“오셨네요?”
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나유하가 끈질기게 말을 붙였다.
“워낙 바쁘셔서 못 오실 줄 알았어요.”
“오프였습니다.”
“그건 들었어요.”
빙긋.
다시 한번 웃는 나유하.
반면 도수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내심 의아하게 생각할 따름이었다.
‘어떻게?’
도수가 오프인 걸 알았다는 것은 누군가 말을 해줬다는 뜻이다.
이사장을 바라보자.
이사장이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입을 뗐다.
“여사님. 저희 병원에 아사다 류타로 씨가 방문하셨습니다. 지금도 병원 응급실에 상주하면서 손을 빌려주고 계시고요.”
“그래요?”
임옥순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사람이 그리 부지런한 인사가 아닌데…….”
물론 세계 최고 수준의 써전으로 인정받는 만큼 부지런한 사람일 터였다. 다만 그녀가 의문을 갖는 건 그가 남 일에 굉장히 무심한 남자이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에 잠겼던 임옥순이 도수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런 거물을 움직일 정도로 우리 이 선생님 명성이 자자한 것 같네요.”
“아닙니다.”
겸양하는 도수.
이사장이 개입했다.
“하하하하. 센터장이 이렇습니다. 대외적인 명성이나 권력에 아무런 관심이 없어요. 사람이 수더분한 건가 싶다가도 수술하는 걸 보면 그런 말이 안 나옵니다.”
“제가 수술 받은 당사자니 잘 알죠.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센터장님 덕분이에요.”
“여사님이 평소에 꾸준히 건강관리를 하시니 회복이 빠른 것도 있지요.”
“그런가요?”
하하호호 웃는 두 사람.
도수는 이사장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렇게 오버하시지?’
평소의 이사장답지 않았다.
잠깐 임옥순 여사의 사회적 위치 때문인가 생각하다가도, 그 이상의 뭔가가 있는 눈치였다. 만약 단순히 두 가족이 모인 자리였다면 정영록과 정영훈을 들러리처럼 놔두진 않았을 테니. 지금 두 사람은 완전 논외였다.
역시나 임옥순 여사는 이번에도 도수를 응시했다.
“이 선생님이 이제 스무 살이죠?”
“네.”
“우리 유하랑은 세 살 차이밖에 안 나요. 그런데 벌써 각종 언론에서 집중하는 외과의인 데다 센터장이라니… 기분이 어때요?”
“전 병원에만 있어서.”
“잘 못 느끼죠?”
“네. 신경 쓸 겨를도 없고요.”
“하긴. 응급실을 찾는 환자가 한둘이 아니니 그럴 것 같아요. 하지만 적지 않은 관심을 받으면서 그렇게 자기 일에 묵묵히 집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죠. 어린 나이에는 더더욱. 주변 시선에 예민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나이잖아요.”
“주변에 일일이 신경 쓰다 보면 제 일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흔들리지 않고 일변도를 걷는다.”
정리한 임옥순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보기 좋아요. 믿음직스럽고.”
고개를 끄덕인 나유하가 거들었다.
“할머니한테 병실도 비워달라고 하셨는데요. 아! 감탄한 거예요. 좋은 쪽으로.”
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정영록은 웃지 못했다.
‘될 놈은 자빠져도 처녀 치마폭으로 자빠진다더니…….’
지금 이 자리의 주인공은 도수였다. 모든 화제는 도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정작 주변 시선에 아무 관심도 안 보이는 놈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것이다.
안 그래도 후계자 자리를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던 정영록의 촉이 경고하고 있었다.
같은 이사장 핏줄에, 힘을 가진 사람들과 인연을 만드는 운발, 누구보다 뛰어난 실력, 심지어 나이까지 어린 도수는 어느 면에서 보든 정영록은 상대가 안 되는 스팩을 가졌다고.
그렇게 잔뜩 곤두 서 있었기에, 정영록은 눈치 챌 수 있었다.
‘설마… 오성그룹이 저 자식을 탐내고 있는 건가?’
그는 시선을 돌렸다.
이사장은 일견 웃고 있었지만 가는 눈매 사이로 예사롭지 않은 눈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식사 자리가 아니다.’
두 집안 모두 사회적인 파장을 끼칠 수 있는 재벌가.
도수는 별생각이 없는 듯했으나, 그런 집안에서 자라온 정영록이나 정영훈은 양가 집안이 만난 자리가 단순히 친목을 다지기 위해서라는 순진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놈이 오성까지 등에 업으면…….’
정영록으로선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가 불안감을 느끼는 사이.
아랑곳하지 않은 도수가 말했다.
“그땐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다른 환자가 안정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었어요.”
“아녜요. 신문에 대서특필된 덕분에 나도 이미지 쇄신을 했으니까.”
빙그레 웃은 임옥순이 천천히 본론을 꺼냈다.
“우리 유하랑 오빠 동생처럼 지냈으면 해요. 나이도 비슷하고, 유하가 선생님한테 여러 가지로 배울 점이 많을 것 같아요. 선생님도 바쁘시겠지만 유하도 일찍부터 여러 가지 공부를 하느라 친구 사귈 시간도 없었거든요.”
미리 얘기가 된 건지, 이사장 역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센터장도 오랫동안 외국에 있다 와서 한국에 아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두 사람이 이번 일본 연수를 계기로 좋은 친구가 되면 좋지요.”
나유하에 대한 도수의 감정 역시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기에 굳이 무안 줄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할게요.”
짤막한 대답.
나유하는 느낄 수 있었다.
도수가 자신에게 호기심조차 없다는 것을.
물론 그녀 또한 도수에게 각별한 애정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호기심과 호감 사이의 감정 정도는 됐다. 그래서 이 자리도 불편함을 감수하고 나왔던 건데 도수가 너무 무심해 보이자 입술이 삐죽 나왔다.
‘치.’
도수는 다른 사람들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오빠, 동생, 친구 할 것 없이 나유하를 보면 친해지려 한다. 그녀의 청순한 외모와 화려한 집안은 뭇 남성의 시선을 끌기 충분하고도 넘쳤다.
반면 좀처럼 눈길도 주지 않는 도수.
그런 그가 뜻밖에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일본 연수에 관해 얘기 좀 나누려고 했는데… 실례가 안 된다면 둘이 차 한잔해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