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저렉션-95화 (95/152)

# 95

뜻밖의 소식

아사다 류타로는 도수가 맡았던 환자들을 자주 살펴보았다. 딱히 할 일이 없어선 아니었다.

남의 환자를 살핀다는 것.

본인의 환자를 들여다보는 일보다 더 조심스럽고 긴장되는 일이었다.

환자의 병력이나 수술 기록을 확인했다 하더라도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두벅, 두벅…….

복도를 걷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잘못 걸렸어.’

아니, 제대로 걸려들었다고 해야 하나?

어찌 됐든 그 덕분에 도수가 예정에도 없던 오프를 나갔으니 나쁜 일은 아니었다.

뭐, 아사다 류타로 입장에서도 응급실에 더 자주 드나들 수 있었다.

그가 두리번거리며 생각했다.

‘이 인력으로 이렇게 많은 환자들을 케어한다고?’

아직도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았다.

환자 수 대비 의료진 수를 고려했을 때 물리적으로 힘들다는 계산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응급실은 문제없이 돌아갔다.

‘역시… 그때 모였던 인원이 전부였어.’

의국에서 본 의료진이 응급의학과 의사 전원이었다.

간호사도 절반은 회의에 참여했다.

의사, 간호사, 코디네이터, 구조원, 항공 관련 종사자까지. 중증외상센터 인원만 수백에 달하는 동일본대학병원에 비해 하잘 것 없는 인력이었다.

한국 최고라는 천하대병원에서 유독 중증외상센터만 인력이 부족한 것은 도수가 오기 전까지 명목상 만들어뒀던 유령 분과이기 때문이다.

개편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이사장의 사비로 운영되고 있기에 재정 지원이나 인력 충원에 한계를 겪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도 동일본대학병원과 비슷한 환자 수를 커버한다는 것은.

‘근무 시간.’

그것밖에 답이 없었다.

천하대병원 응급의학과 인원들은 전원 다 주당 백이십 시간 이상 근무를 하고 있었으며, 특히 의사들의 경우 집에 가는 날짜를 세려면 주 단위가 아니라 년 단위로 계산을 해야 했다.

근무 시간표를 확인한 아사다 류타로는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 일하는데도 다들 용케 살아 있군.”

혼잣말이었지만 스테이션에서 중얼거렸기에 간호사들이 들었다.

개중에 일어에 능통한 수간호사가 물었다.

“뭐가요?”

“아, 아닙니다.”

아사다 류타로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작 수간호사는 고개를 돌리며 자기 일에 집중했지만, 그는 중증외상센터 누구도 허투루 볼 수 없었다.

누구 하나 빠질 것 없이 혹독한 악조건 속에서도 열정을 다해 환자를 살리려고 고군분투하는 투사들인 것이다.

***

아사다 류타로가 천하대병원에 적응하는 사이.

도수는 아침 회진을 끝으로 병원을 나선 참이었다. 그러나 그는 주차장 문턱에서 멈춰 섰다.

‘어딜 가지?’

갈 곳이 없었다.

그가 지내던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임숙영과 김해리, 김광석 모두 병원에 있었기 때문이다.

‘…갈 데가 없네.’

집 비밀번호는 알고 있었으니 이대로 집으로 향해도 될 것이다.

그간 부족했던 잠을 몰아서 푹 자도 된다. 많은 의사들이 오프 날을 활용해 부족했던 수면 시간을 채우는 것처럼.

피식.

도수는 문득 웃음을 흘렸다.

정말 지독하게 일만 하는 의사들이 많다. 그 사실이, 도수에게 힘을 주었다. 말하자면 전우 간에 동질감이 상호작용하여 전투에 나간 병사들의 사기가 자발적으로 올라가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음.”

그냥 집으로 가서 일단 좀 자둘까, 아니면 도서관이라도 들려서 의대생들이 보는 의학 서적을 잔뜩 빌려 들고 집에 갈까 고민하는 사이.

누군가 다가왔다.

“닥터 리.”

귀에 익은 목소리.

그리고 영어 발음.

고개를 돌린 도수가 활짝 웃었다.

“매디 보웬.”

“오랜만이야.”

그녀가 내민 손을 도수가 잡았다.

“한국에는 웬일이에요?”

“휴가… 면 좋겠지만, 취재.”

“역시.”

밤낮 없이 일하는 건 의사만이 아니다.

매디 보웬 같은 기자들도, 밤낮 없이 자기 일을 한다. 목숨 걸고 전쟁터까지 와서 취재를 했던 그녀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취재 대상은?”

“닥터 리.”

“저요?”

도수가 눈을 크게 뜨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스터 엄의 수술도 성공했던데.”

엄승진을 말하는 것이다.

“그를 알아요?”

“그렇게 됐어. 친하진 않지만 안면이 있는 정도?”

“신기하군요.”

“나도.”

“그가 정보를 줬습니까?”

“아니. 그가 준 정보는 자신이 죽을병에 걸렸다는 것 하나야. 아, 나랑 함께 밤을 보내고 싶다는 얘기도 하던데.”

“못 말릴 양반이로군.”

피식 웃는 도수.

무의식적으로 놓지 않고 있던 손을 빼며, 매디 보웬이 말했다.

“그래서 거절했어. 너라면 생각은 해봤을 텐데.”

“제 의사는 안 중요해요?”

“농담해?”

매디 보웬이 짐짓 눈을 찡그렸다.

“나, 어디 가서 안 빠지는데?”

“그건 인정하지만 데이트 정도로 만족하죠.”

“이제 제법 사내다워져서 어른이 다 된 줄 알았는데 아직 연애 세포는 어린 시절에 머물러 있었네.”

“모욕적인데.”

“매정하게 차인 나보다 더 모욕적이려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던 그녀가 용건을 꺼냈다.

“한국에선 주로 어디 가? 데이트할 때.”

“카페 갑시다.”

도수는 걸음을 옮겼다.

그나 그녀 모두 ‘데이트’에 비유했으나 농담일 뿐이었다.

매디 보웬이 도수와 데이트나 하자고 한국에 올 정도로 둘 사이가 각별하고 애틋한 것도, 그만큼 한가한 것도 아닐 테니까.

짤랑.

두 사람이 길 건너편 카페에 들어가 마주 앉자 매디 보웬이 입을 뗐다.

“데이트 치고 시시한데. 병원을 못 벗어나네.”

“병원 밖인데.”

“길 건너잖아.”

“…좀 가깝죠.”

“많이 가까워. 재미없는 남자 같으니라고.”

투덜거린 매디 보웬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알아보느라 좀 늦었어.”

“감동 포인트인가요?”

“아마도.”

빙그레 웃은 그녀가 덧붙였다.

“내가 도움될 일이 있을 것 같은데…….”

도수는 선뜻 도움 받을 만한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도움을?”

“미스터 엄에 대한 거야. 그를 조사하다가 의외로 네가 흥미로워할 만한 정보를 건졌거든.”

“내 생각하다 늦었다고 했으면서.”

“원래 탐스러운 꽃에는 벌이 많이 꼬이는 법이지.”

피식 웃은 도수가 물었다.

“그래서, 제가 흥미로워할 만한 정보가 뭐예요?”

“공짜로?”

“원하는 게 있으면 제공하죠.”

“좋아.”

씨익 미소 지은 그녀는 도수가 봤던 엄승진의 수술 기록과 일치하는 기록지를 내밀었다.

기록지를 보던 도수가 말했다.

“이건 본 건데…….”

“자세히 봐.”

도수가 다시 보자.

노인에게 받았던 기록지에 지워져 있던 주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놀랍게도 그 이름은 ‘이찬’.

“아버지?”

“빙고.”

매디 보웬이 윙크를 던졌다.

“그게 원본이야.”

“하.”

도수는 다시 기록지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곤 쉽사리 눈을 떼지 못했다. 기록지를 든 손이, 잘게 떨려왔다.

“이렇게 또 보게 될 줄이야.”

어조가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그 속에 얼마나 큰 격정이 깃들었는지 매디 보웬은 모르지 않았다.

그녀가 물었다.

“또 놀라게 해줄까?”

도수가 어렵사리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한국에는 이찬이 누구와 결혼을 했는지 자료를 구할 길이 없지만 해외에선 알아볼 수 있었어. 물론 이것도 나쯤 되니까 가능한 일이지만… 너, 천하대 이사장의 혈육이더군?”

도수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고.”

“출생의 비밀 이런 건 식상하잖아.”

도수가 기록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어서 말해봐요. 그게 왜 놀라운 사실인지.”

“네 어머니도 아버지만큼 대담한 사람이었더라고.”

매디 보웬은 가방에서 가슴이 찍힌 씨티 사진을 꺼내 내밀었다.

그걸 확인한 도수의 표정이 삽시간이 굳었다.

“설마… 제 어머니의 심장 사진입니까?”

“그래. 만약 사고를 당하지 않았더라도 네 어머니는 위험했을 거야.”

“…….”

한 장의 씨티 사진.

그 속에는 수술 전 녹아내린 엄승진의 심장과 똑같은 형태의 심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설명이 필요합니다.”

도수의 말에 매디 보웬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턴 내 추측이야.”

확실히 밝힌 그녀가 말을 이었다.

“네 아버지는 심장 수술의 대가였어. 어머니는 신경외과 의사였고.”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이사장도, 이사장의 맏이도 모두 신경외과의였다. 그러니 어머니도 신경외과의가 됐을 것이다.

매디 보웬이 덧붙였다.

“미스터 엄을 수술한 네 아버지는 이상하다는 걸 느꼈겠지.”

“그랬겠죠.”

원인을 밝혀냈고 말고를 떠나 도수도 느낀 부분을 그 정도 수술을 해낸 실력자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도수가 동조하자 매디 보웬이 말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네 아버지는 미스터 엄이 복용하던 약을 조사했을 테고. 그리고 그 와중에 출처를 알 수 없는 의문의 약물을 찾아낸 거야. 하지만 어떤 곳에서도 성분 의뢰를 받아주지 않았지.”

“왜요?”

“이건 팩트인데… 그 약은 내가 근래 조사하고 있던 <브라운&윌리암슨>, 즉 세계 최고의 제약회사 B&W가 준비하고 있는 신약이었어.”

“…….”

도수의 머릿속에 B&W 한국지사장 이학승의 모습이 떠올랐다. 심장성형제를 개발하고 있는 제약회사 관계자이자 심장성형술 관련해 계속 맞닥뜨렸던 인물.

도수가 대답이 없자 매디 보웬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자, 이제 다시 추측. B&W가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신약이란 걸 알고 있는 기관들이 성분의뢰를 받아주지 않았다면 개인적인 인맥을 동원했을 테고. 별문제가 없었던 걸로 봐선 성분의뢰 결과는 문제없다고 나왔을 거야. 하긴, 세계 최대의 제약회사가 그렇게 쉽게 문제가 밝혀지도록 신약을 만들진 않았겠지. 그래도 의심을 버릴 수 없었던 네 부모님은 직접 실험을 해보기로 했어.”

“실험?”

“그래, 실험. 두 분이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설마… 임상실험을 했다는 겁니까?”

매디 보웬이 끄덕였다.

“아마도.”

“우리 어머니 목숨을 걸고?”

“내 생각은 그래. 실패한다 해도 최고의 흉부외과 써전인 네 아버지가 있었으니까.”

“그런 만용을 부렸다고요? 아무리 뛰어난 써전이라도 원인을 밝히지 못하면 손쓸 수 없을 텐데.”

“그만큼 중요한 일이니까.”

충격받은 도수의 표정만큼이나 굳은 표정을 한 매디 보웬이 덧붙였다.

“이건 한두 명의 목숨이 달린 일이 아니야. 수백만… 어쩌면 수천만일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목숨이 달린 일이지. 그 약 하나에. 그런 약을 B&W에서 계속 신약이랍시고 만든다? 이건 앞으로 목숨을 위협받을 수억, 수조… 인류에 재앙이 될 수 있는 문제야.”

“…….”

“네 어머니는 아버지를 믿었겠지. 아버지가 허락했는진 모르겠지만 그래서 그녀는 그 약을 삼켰고, 한동안 복용했을 거야. 그리고 시간이 지난 뒤 심장이 이렇게 변했지.”

톡, 톡.

사진을 건드리는 매디 보웬.

도수는 피곤에 찌든 얼굴을 문질렀다. 얼마나 충격을 받았으면 잠이고 생각이고 천리 밖으로 달아났다.

“후…….”

숨을 길게 뱉은 도수가 손을 치웠다.

“그래서, 뭘 원해요?”

받을 게 있으니 아직 공개하지도 않은 이런 고급 정보를 무료로 제공했을 터.

매디 보웬이 말했다.

“말했다시피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이기 때문에 터뜨리진 못해. 그래서 심장 수술에 능한 네가 나를 도와주길 바랐지. 중간에 미스터 엄이 끼어드는 바람에 네가 닥터 이찬의 아들이고, 이 일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걸 알게 됐지만… 지금도 내가 원하는 건 똑같아. 미스터 엄의 심장에서 뭘 알아냈지?”

도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열고 수술까지 해봤지만 약물복용 흔적 같은 건 없었어요.”

매디 보웬은 어느 정도 예상한 듯 중얼거렸다.

“하긴. 네가 알아볼 수 있었다면 과거 네 아버지도 알아냈겠지.”

다소 아쉬운 표정.

그녀가 화제를 돌렸다.

“대단한 수술들을 했던데.”

“그보다.”

도수는 부모님에 대한 걸 떨쳐낼 수 없었기에 대화를 원점으로 돌렸다.

“전 어차피 미스터 엄을 치료해야 하는 주치의입니다. 미스터 엄을 치료하려면 원인은 반드시 알아내야 하고요. 원인을 알아낸다면, 그리고 그게 B&W와 정말 연관이 있다면… 계속 조사해 줄 수 있으십니까?”

“물론이야.”

매디 보웬이 눈을 반짝이며 쐐기를 박았다.

“네가 지금 의사로서 자기 일을 하는 것처럼, 나도 내 일 하나는 완전히 끝을 보는 타입이라.”

“좋습니다.”

깔끔하게 정리한 도수는 자신이 그녀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었다.

“환자가 동의하는 한에서, 제가 했던 모든 수술에 대한 정보를 드리죠.”

“완벽해.”

두 사람의 목적이 맞아떨어지자.

매디 보웬이 엉덩이를 들썩였다.

“먼저 실례해도 될까? 이 기쁜 소식을 상사한테 전해야 하거든. B&W 한국지사도 들려야 하고.”

“너무 매너가 없는데.”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고.”

“기자로서의 마음만 대쪽 같으면 됩니다.”

대답한 도수가 말을 이었다.

“또 보죠.”

씨 유 어게인.

어차피 머지잖아 다시 만날 인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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