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저렉션-94화 (94/152)

# 94

의국 회의

“물론입니다.”

아사다 류타로는 활짝 웃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이 굳는 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한국어를 못하시니 직접 진료를 보시긴 힘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병원 간의 연계가 있다 해도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닌데 수술을 막 하실 순 없겠죠.”

벌써부터 부려먹을 생각이라니.

아사다 류타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건 그렇습니다.”

도수가 아랑곳 않고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그러니 응급 환자들을 진단해 주시고, 레지던트들에게 약물 처방을 제외한 오더를 내리고 감독해 주셨으면 합니다.”

약물 처방은 병원마다 규정이 있으니 함부로 지시할 수 없었다. 그런 약물 처방을 제외한 오더라면, 환자가 들어왔을 때 필요한 조치들을 말한다. 예를 들어 인투베이션이 필요할 경우 오더를 내고 레지던트가 잘하는지 감독해 달라는 뜻.

아사다 류타로는 직접 뛰어드는 것도, 그저 참관하는 것도 아닌 수준의 의료 행위를 하려니 찝찝했으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이런 생각을 했다.

‘괜히 한다고 했나?’

하지만 그는 불청객.

그가 원하고 말고는 크게 중요치 않았다.

도수가 말했다.

“그럼 저도 협조하겠습니다. 같이 가시죠.”

그는 앉은 지 얼마나 됐다고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아사다 류타로도 반사적으로 일어나 도수를 쫓았다.

도수가 향한 곳은 의국이었다.

문을 열자.

“어?”

“센터장님.”

“좋은 저녁입니다.”

안에 있던 레지던트들이 인사를 건넸다.

그들을 응시한 도수가 말했다.

“지금 근무하고 있는 근무자들 좀 소집해 줘요. 의사, 간호사 전원 다.”

“알겠습니다!”

이시원이 가장 먼저 의국을 뛰쳐나갔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강미소가 몸을 일으켰다.

임재영과 남민수가 따라 일어나려 하자, 그녀가 도로 앉혔다.

“내가 갈게.”

“아, 네…….”

그녀는 도수를 보며 덧붙였다.

“오늘 김 교수님 당직이세요.”

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광석도 부르라는 뜻.

의미를 알아들은 강미소가 나가자 도수는 자리에 앉았다.

“센터장님.”

남민수가 언제 꺼내 왔는지 아이스크림을 건넸다. 은근히 싹싹한 면이 있었다. 하긴, 그랬으니 천하대병원에서 수석씩이나 하고 졸업했겠지만.

혼자 힘으로 고득점을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선배들에게 잘 보여 족보를 얻은 쪽이 유리했다. 더구나 대학병원이 있는 의대는 취업할 병원과도 라인이 이어지기 때문에 선배들과 관계를 잘 맺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남민수는 대학 생활에서 체득한 노하우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스크림을 받은 도수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아사다 류타로에게 마저 아이스크림을 건넨 남민수가 물었다.

“그런데 이분은 누구신지……?”

의사가 아무리 유명해도 연예인은 아니니, 일일이 얼굴을 다 알 수는 없다.

전공 외의 과라면 더더욱.

도수가 대답했다.

“동일본대학 아사다 류타로 씨입니다. 흉부외과 분야에선 세계적인 권위자고요.”

“아……!”

남민수가 눈을 반짝였다.

‘어울리는 분들까지… 역시 클래스가 다르셔!’

그런 생각이 표정에서 고스란히 묻어났다.

남민수나 임재영이 봤을 때 도수는 그야말로 천외천의 존재였다.

하늘같은 교수들 위에 위치한 직급도 직급이지만 그의 수술 실력은 볼 때마다 경악을 감출 수 없었다.

임재영 역시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센터장님과는 어떤 관계신지…….”

관계?

설명할 말이 사라진 도수가 대충 답했다.

“협력 관계?”

“협력 관계라면…….”

“당분간 우리 과에서 일을 도와주실 분입니다. 그 정도만. 더는 묻지 마세요.”

“아, 넵.”

귀찮은 질문을 차단한 도수가 아이스크림을 맛보고 있는 그때.

김광석을 대동한 강미소가 들어왔다.

김광석이 물었다.

“무슨 일 있나?”

“별일 아닙니다. 다들 오면 한 번에 말씀드릴게요.”

“음.”

김광석이 자리에 앉았다.

이후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들어와서 좁은 의국을 채웠다.

늦은 시간인데도 당직인 의사나 당직이 아닌 의사나 모두 근무 중이었다.

이시원이 말했다.

“응급실엔 김용찬 선생이 남았습니다. 회의내용은 회의 끝나는 대로 전달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도수가 입을 열었다.

“오늘 시청에서 사람이 나왔습니다. 시민들이 민원을 넣었다고.”

“또요?”

이하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요즘도 자주 전화 와요. 시끄럽다고…….”

다른 간호사들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조했다.

“선생님들은 환자만 보시면 되지만 저희는 환자 보랴, 욕먹으랴 얼마나 골치인데요. 어제는 저한테 썅년이라고 했다니까요.”

과연 짬밥 되고 기가 센 수간호사다웠다. 도수와 교수들 눈치를 보면서도 말을 적당히 골랐다. 그들한테 욕을 한 건 아니지만 들은 욕을 필터링 없이 전달한 것이다.

“심각성을 좀 아시겠죠?”

그녀의 질문에 도수가 대답했다.

“간호사 선생님들 노고는 잘 알고 있습니다.”

“무시하라고 하셔도 말이 무시지… 한두 건도 아니고, 솔직히 욕먹자고 간호 일 하는 것도 아닌데 너무 스트레스예요. 거기다 환자는 계속 몰려오지, 선생님들은 자기가 맡은 환자 한 번이라도 더 들여다보라고 오더 주지……. 여기저기 치인다구요.”

수간호사는 간호사들의 입장을 대변했다. 이미 이 병원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수간호사는 그런 민원이 오면 전화를 끊어버리거나 수화기를 뒤집어 놓았다가 끊는다. 그 정도 일에 까딱할 그녀가 아닌 것이다.

이내 팔짱을 끼고 있던 조근현 교수가 입을 열었다.

“스트레스받는 거야 간호사 선생들만 그렇겠나. 우리도 매일같이 출동 나가고, 손에 피를 묻혀가며 집에도 잘 못 들어가고 일하는데.”

그는 의사 입장을 대변했다. 의사들이 봤을 땐 간호사들이 배부른 불평을 토로하는 걸로 보이는 것이다.

“지금 비교하자는 얘기가 아니잖아요?”

수간호사가 외치는 순간.

도수가 개입했다.

“이럴까 봐 모두 불러서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민원을 넣는 시민들이나 환자들에게 직접 뭐라고 할 수 없으니 안에서 곪는 거예요. 수간호사님 말씀처럼 그런다고 서로 비교하고 탓하면 안 됩니다.”

뜨끔한 조근현이 입을 다물었다.

이내 도수가 덧붙였다.

“민원 건은 조속한 시일 내에 대처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요?”

“시민들 한 명, 한 명 입을 일일이 틀어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간호사들은 부정적이었다.

민원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이다 보면 터져 나오는 게 당연했다.

그동안은 말이 나오지 않아 잠자코 있었지만, 도수가 그 불씨를 지핀 셈이다.

하지만 어차피 한 번은 부딪쳐야 할 문제.

도수는 피하지 않았다. 그 역시 생각해 둔 바도 없이 이런 자리를 마련한 건 아니었으니까.

“대외 활동을 해서 우리가 하는 일의 필요성을 알릴 생각입니다.”

대외 활동.

늘 시간에 쫓기는 응급실 의사한테 대외 활동이라함은 인터뷰, 컨퍼런스, 방송 참여 따위를 뜻한다.

그러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기나 하려구요.”

“별 효과도 없을 거예요.”

그러나 도수는 고개를 저었다.

“있게 해야죠. 대외 활동을 하면서 우리 상황을 알리면 시청에서도 더는 압박하지 못할 거예요. 그래도 발생하는 민원은 전문적인 민원 처리 기관의 협조를 받을 생각입니다.”

“민원 처리 기관의 협조라면?”

“어떤 식의 협력이 될지는 상의를 거쳐야겠죠. 그리고 원내 전화기를 발신지가 표시되는 것으로 모두 바꾼 뒤 욕설이나 협박을 할 시에는 강경 대응 하면 어떨까 합니다. 여러분의 동의를 받으면 바로 이사장님께 건의할 거고요.”

“…….”

센터장인 도수가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겠다는 데에야.

의사들과 간호사들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 역시 근본적인 해결책이 없었기에 불만을 토로한 것뿐, 실질적인 해결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도수가 입을 열었다.

“이견이 없으면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 주세요.”

“…알겠습니다.”

“너무 개의치 마세요. 센터장님이 가장 고생하시는 건 우리 병원 사람들 다 알아요.”

이하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자.

옆에 앉은 간호사가 팔꿈치로 툭 치며 은밀한 눈총을 보냈다.

그러자 얼굴을 확 붉힌 이하연이 고개를 푹 숙였다.

물론 도수는 여기 모인 사람들 전체를 아우르고 있었기에 그녀의 표정 변화까지 알아채진 못했다.

그는 손뼉을 치며 말했다.

“자! 그럼 다시 힘내봅시다.”

“네!”

대답한 의사며 간호사들이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다들 하나같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김광석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

도수가 눈을 크게 뜨자.

김광석이 마지막으로 몸을 일으키며 입술을 뗐다.

“센터장한테는 미안하지만 근무표를 좀 바꿨습니다.”

“근무표를요?”

김광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은근히 아사다 류타로에게 시선을 던졌다.

“…바꾸기 전엔 센터장이 거부할까 봐 걱정했는데, 이제 모든 조건이 완벽히 갖춰진 것 같군요.”

“뭔데 그래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도수가 묻자.

김광석이 대답했다.

“센터장은 내일 오프입니다.”

“예?”

도수가 당황했다.

“무슨 오프요?”

“서른여섯 시간 잠도 안 자고 당직 근무. 네다섯 시간 자고 또 열 시간 이상 근무. 사십팔 시간 근무했을 때도 있었던 걸로 압니다. 그러다 몸 상해요. 환자한테도 안 좋고.”

“왜 새삼스럽게……. 그건 다들 그렇잖아요.”

“센터장이 가장 근무 시간이 많아요. 그 상입니다. 내일 오프예요.”

김광석은 거의 억지로 욱여넣듯 말했다.

그러나 도수는 그리 말을 잘 듣는 편이 아닌지라 다시 한번 튕겨져 나왔다.

“병실에 환자가 있는데 어떻게 자리를 비워요? 우리 응급실에 흉부외과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대체할 인력이 없지 않습니까.”

“센터장 말도 일리가 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흉부외과의, 있어요.”

다시 한번 아사다 류타로를 쳐다보는 김광석.

아사다 류타로가 팔짱을 풀며 자신을 가리켰다.

“제 얘기 중입니까?”

못 들은 척한 도수가 김광석에게 말했다.

“다른 병원 인력입니다. 그것도 일본의.”

굳은 표정의 도수.

바로 그때였다.

수간호사가 답답한지 큰 소리를 냈다.

“아니, 무슨 지박령이세요? 교도소 수십 년 살면 나가기 무섭다던데 센터장님도 그런 겁니까? 그냥 좀! 생일 하루쯤 쉬어요, 쉬어!”

그녀의 말에 다들 한 마디씩 거들었다.

“생일 축하드립니다, 센터장님.”

“축하드립니다.”

“내일은 좀 쉬세요.”

“센터장님이 건강하셔야 우리 과가 건재하고, 그래야 환자를 한 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습니다.”

“센터장님은 홀몸이 아니세요.”

울컥.

도수는 케케묵은 감정이 치고 올라왔다. 느껴 본지 너무 오래돼서 어떤 감정인지 정체를 파악하는 데만 해도 한참 걸렸다.

감동.

가슴 속에서 느껴지는 촉감으로 치면 따뜻함이다

“…….”

당연한 얘기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생일을 챙긴 적이 없었다. 수험생 등록을 할 때나 이력서에 생일을 적어 넣을 때도 가물가물한 기억을 한참 되짚어야 했다. 그리고 정작 병원에 온 뒤로는 자신의 생일 따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동료들이 챙겨준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오프는…….”

“아, 쫌!”

놀랍게도.

목소리의 주인은 이하연이었다.

평소 전혀 그런 이미지가 아니었기에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아예 도수 앞에 가선 소매를 잡았다.

“제가 집까지 데려다드려요?”

“…….”

“딱 하루예요. 저기 류타로 선생님도 계신데 스물네 시간 안에 무슨 큰일이 벌어지겠어요? 만약 문제가 생기더라도 병원에 각 과 당직 선생님들 계시잖아요. 휴가 가실래요, 말래요?”

홍시처럼 새빨간 그녀의 얼굴에서 다른 동료들의 얼굴로 일일이 시선을 옮긴 도수는 그들 모두 자신보다 더 자신의 휴가를 염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데야.

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갈게요.”

왠지 패배자처럼 동료들을 가로질러 의국 문 앞까지 다가간 도수는 문고리를 돌리기 전, 뒤를 돌아보며 입을 뗐다.

그 순간 강미소가 그가 하려던 말을 대신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 드릴게요. 어차피 멀리 가시지도 못할 테니.”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인 도수.

그가 말했다.

“축하 감사합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제 휴가 챙겨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왜 그 말이 이렇게 안 떨어지고 어색하게 흘러나올까. ‘감사하다’는 말이나 ‘죄송하다’는 말을 평소 심할 정도로 아끼는 도수였다.

그가 철컥, 문을 열고 나가자.

뒤에 덩그러니 남은 아사다 류타로가 두리번거리다, 고민 끝에 큰일을 저지르고 고개를 푹 숙인 이하연에게 영어로 물었다.

“뭡니까?”

그 순간.

토닥, 토닥.

말없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는 조근현.

한술 더 떠 김광석은 넌지시 근무표를 내밀었다. 어느새 근무표에 명시된 몇몇 환자의 이름 옆에는 ‘임시 주치의 아사다 류타로’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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