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환자의 입장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굳은 표정의 아사다 류타로가 입을 뗐다.
“미스터 엄.”
“알아보시는군.”
한국어로 중얼거리며 피식 웃은 엄승진이 도수에게 시선을 옮겼다.
“얘길 좀 나누고 싶은데요.”
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세요.”
그가 뒤돌아서 들어가자.
엄승진은 아사다 류타로의 곁을 지나치며 속삭였다.
“또 봅시다.”
그에 류타로의 안색이 붉어졌다.
‘젠장.’
설마 이곳에서 엄승진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와 엄승진의 인연은 2년 전 시작됐다. 엄승진이 자신의 의료 기록을 보냈고, 류타로는 자신이 그를 치료해 주겠노라 약속했다. 방법을 찾으면서 일 년이 넘는 시간을 지체한 끝에 얻은 결론은, ‘불가능하다’는 것.
결국 아사다 류타로는 엄승진에게 수술할 수 없다는 대답을 보냈다.
그의 대답만 기다리고 있던 엄승진은 불같이 화를 냈다. 이럴 거면서 왜 약속을 했느냐고, 왜 희망을 품게 했느냐며 따져 물었다.
그러나 아사다 류타로는 할 말이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그리고 지금, 두 사람이 이곳 천하대병원에서 맞닥뜨린 것이다.
“미안합니다.”
허공에 한마디를 남긴 아사다 류타로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
“할아버지가 그러시더군요. 당신이라면 날 살려줄 수 있을 거라고.”
엄승진이 앉자마자 꺼낸 말이었다.
도수는 대답하지 않고 그를 응시했다. 그 속에 맺힌 회의감, 대상 없는 분노, 절망감과 좌절이 보였다. 도수는 비단 인체를 들여다보는 데에만 투시력을 쓰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초능력이었지만, 절망의 끝에 자리 잡은 지옥 라크리마에서 살아왔던 경험들은 그에게 감정을 읽는 능력을 주었다.
그리고 그에 대처하는 능력도.
이내, 도수가 입을 열었다.
“…가능성을 찾긴 했습니다.”
“가능성을 찾았다고요?”
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엄승진이 입꼬리를 올렸다.
“대부분의 유능한 의사들이 말했습니다. 내 병은 원인도, 치료법도 없다고. 그리고 몇몇 선생님들은 그랬죠. 고칠 수 있다고. 근데 두 부류의 공통점이 뭔 줄 아십니까? 결국 내 병을 고치지 못했단 겁니다.”
단단히 뒤틀려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답 없는 질환을 마주했을 때 의사가 느끼는 답답함은 그 병을 가진 환자가 느끼는 답답함에 백 분의 일도 되지 못한다.
엄승진의 가슴속은 타들어가다 못해 재만 남았을 터였다.
“…….”
도수가 말이 없자 엄승진이 다시 말했다.
“물론 저도 처음엔 믿었습니다. 하지만 매번 결과는 나빴죠. 이게 반복되다 보니 아무도 믿지 못하겠더군요. 자기 발로 찾아온 환자가 이런 말을 하니 선생님께서도 황당하시겠지만 이해해 주십시오. 제 부탁은 하나입니다.”
“말씀하세요.”
“확신하지 못하겠지만, 확신하지 못하신다면 할아버지께 대신 좀 말씀해 주십시오. ‘방법을 찾지 못했다’고 말입니다.”
“…….”
“그리고 앞으로도 희망은 없을 거란 말도요. 저는 수없이 말씀드렸지만 할아버지는 포기하지 못하셨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인정하시는 선생님이 말씀하신다면 받아들이실 거예요.”
물론 그 부탁을 들어줄 필요는 없었다.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도수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어차피 아픈 사람의 마음은 본인밖에 모른다. 어떤 감정의 발로인지 이해하려 들 필요 없었다. 그저 의사는 의사로서 환자를 대하면 된다.
도수의 입이 열렸다.
“전 사실만 얘기합니다. 가능성을 봤고, 할아버님께도 그렇게 말씀드릴 겁니다.”
“가능성이요?”
엄승진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제 심장이 고장 난 걸 안 건 태어나자마자입니다. 수술을 받고 약을 처방받았죠. 분명 수술은 성공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 후 검사를 해보니 심장이 부어올라서 곧 죽게 생겼다고 하더군요. 그때 또 다시 의사 한 분을 만나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얼마 전까지 그분을 은인처럼 생각했죠. 하지만 수술이 성공했다더니, 부어올랐던 심장은 이젠 손도 못 대게 쪼그라들었습니다. 이제는 수술하겠다는 의사도 없더군요. 하하하하.”
“그 얘긴 들었습니다. 기록도 봤고요.”
도수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분들 말은 거짓이 아닙니다. 첫 수술도, 두 번째 수술도 성공이었어요. 문제는 수술이 아닙니다.”
“뭐요?”
엄승진이 얼굴을 붉혔다.
“그럼 뭐가 문젭니까?”
“이제부터 알아봐야죠.”
“선생님은 태연하시군요.”
엄승진이 비꼬듯 뒤틀린 입매로 자조적인 미소를 보였다.
“하지만 전 제 일입니다. 내 인생에서 만난 의사들은 모두 날 잠깐 행복하게 해주고 더 크게 악화시켰어요.”
“수술을 받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생존하지 못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그랬다면 희망을 품진 않았겠죠.”
“…….”
“희망 고문이란 말을 아십니까?”
“들어봤습니다.”
“전 늘 희망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고문당하기 싫다는 겁니다. 그 정도 권리는 있잖아요?”
엄승진 입장에서.
목숨이 달린 질환이 그를 괴롭히며 의사의 입을 통해 감정을 들었다 놨다 했을 것이다.
충분히 지쳤을 수 있고, 무너졌을 수 있다.
그러나 도수는 그대로 둘 수 없었다.
“수술을 거부한다면 전 수술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의사로서 조언한다면, 포기하지 마세요.”
“…….”
엄승진은 한참 동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도수는 말없이 기다렸다. 더 이상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도, 수술을 권하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엄승진의 말이 아닌 엄승진의 입장이 되어 느낄 수 있었다. 엄승진이 결코 ‘가능성’을 버릴 수 없음을.
일 퍼센트의 가능성이라도, 그는 매달리고 싶을 것이다. 그게 바로 엄승진의 진심일 터다.
도수가 말이 없자 엄승진이 먼저 물어왔다.
“가능성은… 얼마나 되는 겁니까?”
도수는 솔직히 대답했다.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그 가능성이라는 거, 진짜 있는 겁니까?”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도수.
그는 투시력을 썼다.
샤아아아아아아아아.
엄승진의 심장이 뛰고 있는 게 보였다.
두근… 두근… 두근…….
좁은 심실.
부족한 근육.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도수가 말했다.
“…다만 이대로 두면 언제 심장이 멈출지 모릅니다. 수술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빨리 한다고 성공률이 늘어나는 건 아닙니다만, 빨리 해야 살 수 있습니다.”
“차라리 성공률이 늘어난다고 하면 덜 절망적일 텐데.”
다시금 자조적인 미소를 짓는 엄승진.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할아버지에게 얼굴을 비추기도 전에 선생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할아버지를 좀 뵙고 오겠습니다. 대답은 그 후에 드리죠. 설마 그동안 제 심장이 멈추진 않겠죠?”
도수는 확답하는 대신 말했다.
“최대한 빨리 대답해 주십시오.”
그리곤 명함을 건넸다.
열 마디 말보다 그 행동 하나가 엄승진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차라리 예약을 잡으라거나 직접 와서 대답해 달라고 했다면 덜 급해 보였을 텐데.
명함을 건네는 이유는 상황이 급하니 전화로라도 대답을 달라는 뜻이다.
명함을 받은 엄승진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몸을 돌린 그는 문고리를 비틀고 나가려다 말고 뒤에 대고 덧붙였다.
“오면서 선생님이 이룬 성과를 찾아봤습니다. 대단하시더군요. 제 얘기를 잠자코 듣고 계시는 것도 다른 선생님들과 달라서 이상했습니다. 무례를 범해서… 실례했습니다.”
“아닙니다.”
철컥.
엄승진은 문을 열고 나갔다.
뒤에 남은 도수는 가슴에 붙어 있는 포켓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엄승진의 심장 수술에 들어갈 수술팀 명단이었다.
“후.”
바꿔야 했다.
흉부외과 과장 김한철을 포함한 심장 수술의 실력자들로.
투시력으로 직접 본 엄승진의 심장은, 생각보다 더 작고 손상이 가 있었다.
하지만 흉부외과 과장이 이런 수술을 도울까?
적어도 도수가 그간 봐왔던 대학병원에 실패를 감수하고 성공 확률이 극악한 수술을 하려고 드는 의사는 없었다. 오랜 의사 경력으로 커리어를 쌓아온 권위자들일수록 더했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살아날 가능성이 눈곱만큼이라도 있는 환자가 죽어가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설득해야 한다.’
도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흉부외과로 직행했다.
‘재실’ 표시가 되어 있는 흉부외과 과장의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수술복도 미처 벗지 않은 흉부외과 과장 김한철이 보였다.
도수를 발견한 그가 물었다.
“노크도 않는구만.”
“…….”
너무 마음이 앞섰던 탓이다.
흉부외과 과장이 그런 도수를 대놓고 비꼬았다.
“위세가 대단해서 그런가?”
“아닙니다.”
고개를 저어 간단히 물리친 도수가 곧장 본론을 꺼냈다.
“힘든 흉부외과 수술이 있습니다.”
“그래서?”
김한철은 피식 웃었다.
“심장성형술은 정말 대단했어. 나도 감탄했다니까. 그 수술 실력으로 해결하면 될 일 아닌가?”
사실 김한철은 도수와 딱히 앙금이 있진 않았다. 심장성형술 대상자였던 오성그룹 임옥순 여사를 수술했을 때까지만 해도 배가 아팠지만 실력만은 인정했다. 그럼에도 그가 지금처럼 튕기는 건, 도수를 배척하는 신경외과 과장, 외과 과장과 한 라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도수는 그런 눈치는 없었다. 알았어도 굳이 눈치를 보려 하지 않았을 테지만.
“혼자선 불가능합니다.”
“센터장이 그렇게 얘기할 정도라니. 무조건 피해야 할 수술이로군.”
“…….”
도수가 말이 없자 그가 물었다.
“무슨 수술인데?”
내심 마음 한구석에는 궁금증과 욕심이 있었다. 임옥순 여사는 놓쳤지만 커리어에 도움될 만한 다른 큰 수술을 할 수 있다면, 이번에는 꼭 흉부외과로 트랜스퍼시킬 작정이었던 것이다.
이내 도수가 대답했다.
“축소된 심장의 활동력을 상향시키는 수술입니다. 심실재건술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뭐?”
김한철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축소된 심장의 활동력을 상향시킨다.
말이 쉽지, 심실을 다시 만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미친놈.’
심실재건술.
이름 한번 잘 짓는다.
그런데 이게 칭찬하고 감탄할 수만은 없는 문제였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심장성형을 하더니 심장이 무슨 모형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그런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잠깐이라도 도수가 커리어에 도움될 만한 수술을 제안할 거라 생각한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듣도 보도 못한 수술인데.”
슬슬 거절을 준비하는 김한철 과장.
도수가 말했다.
“지난 준비 기간 동안 방법을 생각해 뒀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검증되지 않은 수술이기에 성공을 위해선 최고의 의료진이 필요합니다.”
‘최고’라는 말에 으쓱했지만 그 한마디에 현혹될 김한철 과장이 아니었다. 대학병원에서 잔뼈가 굵은 그. 매일같이 그를 우러러보는 레지던트들과 인턴들, 학생들 틈에서 살아가는 그였다.
칭찬에 대한 내성은 정점을 찍었단 뜻이다.
“미안하지만 우리 흉부외과에선 그런 무리한 수술을 진행하지 않아. 센터장도 임옥순 여사 수술 때 봐서 알겠지만 우린 환자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지 않네.”
“수술하지 않으면 환자에게 희망은 없습니다.”
“그럼 남은 생을 최대한 행복하게 정리하는 쪽으로 방향성을 잡아야지.”
“인간은 죽기 직전까지 살려고 합니다. 그건 본능이죠.”
“내려놓는 환자들도 많아.”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아닙니까?”
“…….”
고개를 저은 김한철 과장은 더 말을 섞기 싫은 듯 대답했다.
“됐고. 아무튼 이 수술은 참여할 수 없네.”
“후회하실 겁니다.”
도수가 덧붙였다.
“저번처럼.”
“뭐?”
언성을 높이는 김한철 과장을 등진 도수는 문을 열고 나섰다. 어떤 수술인지 구체적으로 들어보지도 않고 수술을 거부하는 사람을 데리고 들어가 봐야 그가 아무리 실력자라 해도 방해만 될 뿐이다.
그럴 바에는 성공률이 다소 낮은 상태로 진행하더라도 믿고 따라와 줄 의료진이 필요했다.
철컥.
문을 닫자.
도수는 한숨이 나왔다.
“후.”
괜스레 몸이 으스스 했다.
쌀쌀한 바람을 맞고 있는 느낌.
혹은 거대한 폭풍우를 홀로 기다리고 있는 기분.
두려움일까?
아니면 외로움?
‘…많이 나약해졌어.’
한국 생활, 병원 생활이 길어지다 보니 라크리마처럼 지독하게 싸워가며 살아남기가 지쳤다. 그땐 지치고 힘들 여유마저 없었다면 지금은 앞을 볼 여유가 생겼다.
“환자에게는 여유가 없는데.”
어찌 의사라고 여유가 있겠는가?
해보는 데까지 닥치는 대로 해보는 거다.
매번 도수가 하는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은 목숨을 걸겠다는 의미였다.
다시 한번 마음을 단단히 먹은 도수는 걸음을 옮겼다. 함께 수술할 의료진을 구하려면 한시가 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