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아사다 류타로
매디 보웬과 엄승진이 도수를 만나기 위해 한국으로 향하는 사이.
도수는 임숙영을 찾아갔다.
병실 문을 여는 순간.
눈을 깜빡이고 있는 임숙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 곁을 지키고 있는 김광석, 김해리의 얼굴도.
“도수야.”
나지막이 그를 부른 김광석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왔다.
“안 그래도 찾아가려고 했는데… 네가 먼저 왔구나.”
가볍게 목례한 도수가 미소지었다.
“깨어나셨군요.”
“그래… 다 네 덕분이다……. 그 어려운 수술을 해내다니.”
“검사 결과는 받아 보셨어요?”
“간담췌외과 과장이 직접 주고 갔다.”
임숙영이 실려 왔을 때 얼굴도 비추지 않았던 간담췌외과 과장이다. 그런 그가 검사 결과나 알려주려 직접 왔다니 의외였다.
그에 김광석이 말했다.
“수술을 극구 반대하던 입장이었으니. 미안할 테지.”
“아아.”
그제야 간담췌외과 과장의 심리를 납득한 도수가 김해리에게 눈길을 돌렸다.
“괜찮아?”
“고마워, 오빠!”
그녀가 와락 안겼다.
샴푸와 베이비로션 향이 뒤섞인 풋풋한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잠깐 당황했던 도수는 등을 토닥여 주며 세 사람 모두에게 말했다.
“병실 오기 전에 검사 결과 보고 왔어요. 아시다시피 안정적입니다.”
김광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술 과정을 들었다. 직장 내 동맥, 정맥 외에 혈관들을 재구성했다고.”
“네. 다행히 제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그래, 그렇더구나.”
김광석은 머리를 흔들었다.
“정말 놀라운 일을 해냈다.”
그러더니 임숙영을 보며 말을 이었다.
“도수가 당신을 기적적으로 살려냈어. 나도 앞으로 달라질 테니 당신도 힘내야 돼.”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는 그.
임숙영이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찌르르.
도수의 가슴속이 가늘게 떨려왔다. 그는 해리를 떼어내며 말했다.
“전 다시 환자 보러 가보겠습니다.”
“정말 고마워, 오빠.”
“당연한 걸.”
도수가 해리의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리고.
김광석이 말했다.
“고맙다. 이 은혜는 꼭 갚으마……. 너무 큰 빚을 져서 다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좋아지실 거예요.”
가볍게 목례한 도수는 병실을 나가서 문을 닫고 등을 기댔다.
“후.”
그가 빨리 자리를 피한 건 다문 환자 때문만은 아니었다.
병실 안 김광석 가족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흐뭇함과 함께 잊었던 그리움이 몰려왔다. 다른 환자들을 볼 때보다 그 농도가 짙었다. 그 집에서 한 가족처럼 지내며 보고 느꼈던 것들이 있으니 당연했다.
고개를 절레 저으며 뜨끈해진 눈시울을 식힌 도수는 걸음을 뗐다.
환자 한 명을 떠나보냈으니.
이제 찾아올 환자를 생각해야 하는 그였다.
매일매일 새로운 환자들을 접해야 하는 그의 마음속은 다른 무언가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넉넉지 않았다.
***
연구실로 돌아온 도수는 노인에게 받은 자료를 검토했다.
첫 번째로 본 사진은 올해로 스물여섯 살이라던 노인의 손주가 이십오 년 전 찍은 사진이었다.
“첫 수술이 아니었어?”
그가 들은 수술은 두 번째 수술이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찍은 검사 사진은 한 가지 질환을 뜻하고 있었다.
“티오에프(Tetalogy of Fallot: 팔로 4징후)?”
큰 심실중격 결손증, 혼합형 폐동맥 협착, 대동맥 기승, 우심실비대의 네 가지 증상을 동반한 선천성 심장질환.
기록을 보니 매뉴얼대로 6개월 이내 단락술을 시행하고 24개월 이내에 교정을 했다.
이건 국내에서.
다음 사진은 지금으로부터 십사 년 전, 환자 나이 십이 세 때 검사를 받은 사진이었다.
“……!”
도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단순히 팔로 4징후 수술에 관한 후유증이 아니었다. 환자의 심장은 팔로 4징후로 생길 수 있는 문제의 경로를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지나치게 부어오른 심장의 크기.
그리고 기묘한 형태.
다시 생각해 봐도 팔로 4징후 수술 후유증에 이런 증상은 없다.
“당신은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도수는 모니터에 대고 물었다.
그 질문의 끝에는 노인이 말했던 누군가의 진료 기록이 놓여 있었다.
딸깍, 딸깍.
두 번 클릭하자.
“역시.”
의문 투성이인 소견이 눈에 들어왔다.
간략하게 요약하면 ‘원인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수술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수술을 하겠다고?”
도수는 모니터 너머의 누군가와 대화하듯 물었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수술 결정만큼 이상한 점은 소견서 하단에 주치의 이름이 지워졌다는 점이다.
이내 도수가 수술 기록을 나란히 띄웠고.
마침내 수술 결과가 모습을 드러냈다.
“……!”
도수는 눈을 치떴다.
놀랍게도, 수술 후 심장의 형태가 어느 정도 복원된 것이다.
의문의 의사가 행했던 심장 수술은 일견 바티스타 수술이나 도수가 행했던 심장성형술과 흡사했다.
그러나 다른 점은 좌심실의 외측 자유벽을 절제하는 것이 아닌, 사방을 골고루 절제했다는 점이다.
입술이 바짝 말랐다.
“말도 안 돼.”
단언컨대 이런 수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할 수 없다’고 쉽게 말할 그가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이들이 ‘할 수 없다’고 말했던 수술들을 척척 해내던 그다.
그런 도수가 이번엔 ‘말도 안 된다’는 감탄을 듣는 게 아닌, 내뱉고 있었다.
혼란에 휩싸인 도수는 다시금 수술 후 주치의 소견을 클릭했다.
딸깍.
그러자.
‘수술은 성공했고 최대한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주치의는 환자의 심장이 크게 부어올랐던 후유증의 원인을 밝히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고뇌가 도수에게까지 느껴졌다.
“답답했겠군.”
아마 환자의 주치의는 대략적인 생존 기간도 말해주지 못했을 터였다.
중얼거린 도수는 마지막 사진을 클릭했다. 가장 최근에 촬영된 사진.
그리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하!”
탄식이 나왔다.
왜 내로라하는 흉부외과의들이 이 환자의 심장에 손을 못 댔는지 알 것 같았다.
심장은 성인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줄어들어 있었다.
다시 한번 드는 의문.
환자의 심장은 수술 후 왜 부어올랐으며, 절제술 후 급격하게 줄어든 걸까?
아니, 이건 작아졌다기보다 ‘녹아내렸다’는 표현이 적합했다.
수술 기록을 참고해 봤을 때, 수술에 의한 손상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대체 뭐로 인한 손상이란 말인가?
도수조차 어렵다고 생각하는 수술을 해낸 무명 의사. 그리고 그 의사조차 밝혀내지 못한 심장기형의 원인.
그 모든 것이 변수였다.
“뭐가 문제인지 밝혀내야만 환자를 완치할 수 있다.”
직감이었다.
사실 줄어든 심장의 기능을 어떻게 상향시킬지 그것도 답이 안 나왔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원인’이다.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는 이상 어떻게 수술을 성공한다 해도 문제는 계속될 것이다. 무명 의사가 말도 안 되는 수술을 기적적으로 성공시켰음에도 다시 한번 환자에게 위기가 찾아온 것처럼.
“…답답하구만.”
도수는 환자를 수술했던 무명 의사가 느꼈을 고뇌를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앞에 놓인 과제는 두 가지.
평생 살면서 두 번 보기 힘든 케이스의 환자를 수술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부어오른 심장을 절제할 방법은 지금껏 연구되어 왔고, 도수의 손에 완성됐지만 녹아내린 심장 기능을 되살릴 방법은 현존하지 않는다. 그 방법을 생각해 내고 실현해야 했다.
그리고 또 하나. 수술에 성공한 후에도 환자의 심장 형태가 왜 계속 변하는 건지 원인을 찾아야 한다.
이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해야만 환자를 완치시킬 길이 보일 터였다.
“산 넘어 산이군.”
그렇게 중얼거리는 말과는 달리.
도수의 두 눈은 생생하게 빛나고 있었다.
***
그로부터 이틀 후.
천하대병원 앞에 택시 한 대가 멈춰 섰다.
그곳에서 내린 남자는 동일본대학병원의 다크호스이자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흉부외과 분야의 권위자, 아사다 류타로였다.
“하아.”
숨을 크게 들이쉬고 뱉은 그가 중얼거렸다.
“여기 있단 말이지?”
이도수.
요 근래 일본까지 들려오던 이름이다.
열아홉에 국시 패스. 레지던트, 전문의 과정을 밟기도 전에 대학병원 과장급 직책인 센터장에 오른 이례적인 소년.
그리고 수차례 희박한 성공률의 수술을 성공시킨 장본인.
이제 스물이 된 소년이 벌써 세계 의료 역사에 붓을 대기 시작하다니.
만나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일이었다.
절로 홍조 띤 그가 응급실 안으로 들어섰지만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처음 말을 걸어온 건 이하연이었다.
그녀를 마주본 아사다 료타로가 일어로 대답했다.
“이도수 센터장을 보러 왔습니다.”
그러면서도 두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아직 미혼, 그것도 오래도록 솔로인 그에게 싱그러운 이하연의 외모는 눈길을 앗아가기 충분했다.
‘천하대 간호사들은 아름답군.’
그가 이하연의 미모를 감상하는 사이.
정작 이하연은 난색을 표했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일어 수업을 듣긴 했지만 현지인과 일상적인 대화는 힘든 실정이었다. 그나마 알아들은 게 ‘이도수’란 세 글자다.
‘심각하게 다친 데는 없는 것 같은데?’
눈으로 훑은 그녀가 말했다.
“이도수 선생님은 지금 바쁘셔서요. 어디가 아픈지 손으로 가리켜 주시면 담당 선생님을 불러드릴게요.”
바디랭귀지를 섞어서 하는 그녀.
예쁘면 뭐 하겠나? 의사소통이 불통인데.
아사다 류타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난 환자가 아닌 의사입니다. 아이엠 닥터. 마이 네임 이즈 아사다 류타로.”
“아… 닥터? 아! 닥터! 의사라고요?”
류타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반색한 이하연이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왜 이도수를 찾는 것인지는 모른다. 어쩌면 기자가 거짓말을 하는 걸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도수는 연예인이 아닌 의사. 천하대 응급실에 오면 볼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녀는 처치실에 있는 도수를 찾아갔다.
“센터장님.”
몸이 근질거렸는지 직접 나와서 환자에게 드레싱을 해주던 도수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이하연이 말했다.
“자기가 의사라는 일본인이 찾아왔는데요. 이름이… 아, 그! 아사다 류타로? 아사다 류타로라고…….”
“아사다 류타로?”
중얼거린 도수가 물었다.
“확실해요?”
“네. 본인이 그렇다고.”
“드레싱 끝나고 가겠습니다. 제 연구실로 모셔주세요.”
“아, 네!”
이하연이 처치실을 나가자.
드레싱을 마친 도수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물 안 닿게 조심해 주시고요. 괜찮아지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가볍게 목례한 도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연구실로 갔다. 과연 이하연의 말처럼 연구실 안에는 아사다 류타로가 기다리고 있었다.
중간 키에 머리를 단정하게 넘긴 삼십 대 미남.
저널에서나 보던 사람을 직접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도수입니다.”
영어로 인사하자 류타로 역시 신기한 듯 도수를 뜯어보며 대답했다.
“아사다 류타로입니다.”
두 써전은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시선이 오가고.
이내 마주 앉은 도수가 물었다.
“한국에는 무슨 일로 오셨는지.”
“단도직입적이군요.”
빙그레 미소 띤 아사다 류타로가 대답했다.
“닥터 리의 실력을 보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저보다 더 직설적이신 것 같은데.”
“아니라고 안 했습니다.”
“…….”
잠시 침묵하던 도수가 물었다.
“어떻게요? 매번 흉부외과 관련 수술이 잡히는 것도 아니고. 여기서 상주하지 않는 이상 보기 힘드실 겁니다.”
“수술 있을 때 연락 주십시오.”
아사다 류타로는 명함을 내밀었다.
그런데, 동일본대학 명함이 아니다.
“동일본대학 소속 아니십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이건…….”
명함에 찍혀 있는 곳. ‘국경 없는 의사회’다.
빙긋 웃은 아사다 류타로가 대답했다.
“전 국경 없는 의사회의 일원이기도 합니다. 사실 주된 목적은 아니지만, 약간은 공적인 용무도 있습니다. 우리 ‘국경 없는 의사회’의 일원으로 닥터 리를 스카우트하고 싶습니다.”
아사다 류타로는 이번에도 단도직입적이었다.
‘국경 없는 의사회라.’
도수 역시 이 단체의 의사들을 라크리마에서 본 적이 있다.
의료 지원을 나온 그들은 전쟁터에서도 용감하고 능숙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갑작스럽군요.”
“천천히 생각해 보시라는 겁니다. 그럼 바쁘신 것 같으니 전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보인 아사다 류타로가 몸을 일으켰다. 도수는 그를 연구실 밖까지 배웅해 주기 위해 직접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도수를 찾아온 한 사람과 맞닥뜨렸다.
“이도수 센터장님이시죠?”
그렇게 묻는 그.
건장한 체격 위로 셔츠를 걸친 엄승진이었다. 도수를 보던 그는 함께 있는 아사다 류타로를 발견하곤 묘한 표정을 지었다.
“…두 분이 같이 있는 걸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가 일본어로 말을 이었다.
“아사다 선생. 오랜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