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인연
“이송 중 불가피한 개복을 했습니다.”
“개복?”
노인이 눈을 치떴다.
“내 듣기로 구조용 헬기로 실려 왔다고 하던데? 이도수 선생님이 직접 이송해 왔다고 알고 있고.”
“맞습니다.”
“……!”
그때 불현 듯,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노인의 뇌리를 스쳤다.
“설마 헬리콥터 안에서 개복을 했단 말입니까?”
“네.”
“그날 날씨도 좋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비바람이 불었습니다.”
“흔들렸을 텐데?”
“그랬죠.”
“…….”
너무 태연한 답변에.
노인은 믿기 힘들면서도 묘한 신뢰가 갔다. ‘이도수’란 이름은 익히 들어본 이름. 그 대단한 소년이 거짓말을 치고 있진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말 믿을 수가 없군……. 헬기 안에서 개복이라니.”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랬겠지. 나도 압니다. 그런 부상을 입고도 살아 있는 게 신기할 따름이에요.”
“…….”
이번엔 도수가 말이 없었다.
사이를 둔 노인이 물었다.
“수술로 출혈을 막은 겁니까?”
“예.”
호기심이 가득 묻어나는 눈빛을 마주 본 도수가 설명을 덧붙였다.
“복부 동맥을 잇고 다른 장기들은 패드로 지혈했습니다.”
“복부 동맥도 끊어졌었습니까?”
배 속 출혈이 극심한 건 직접 느꼈지만 복부 동맥이 끊어진 것까진 미처 몰랐다. 순식간에 사망에 이를 수도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 순간의 느낌이 오버랩 된 노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습니다.”
대답이 돌아오고.
노인은 다시금 충격받은 어조로 물었다.
“그 상황에 혈관 봉합을 했단 말입니까?”
“네.”
“흔들리는 헬기 안에서요?”
재차 확인했지만.
끄덕.
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노인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듣던 것보다 훨씬 더 출중한 실력을 가졌나 보군요……. 모두가 포기한 환자도 살려낸다는 소문이 과장이 아니었어.”
직설적인 칭찬에 도수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를 오해한 노인이 말했다.
“아, 선생님 실력을 평가하는 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평가하면 뭐 어떤가 싶었다.
이내, 노인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선생님을 보니 미국에 있는 손자 놈이 생각납니다. 아마 비슷한 나이일 거예요.”
“전 올해로 스무 살입니다.”
“허허허허. 맞아요. 그렇게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더 젊어요. 우리 손자보다 여섯 살이나 더 적군요. 내가 왜 그 녀석 얘길 꺼내냐면…….”
도수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어려서부터 몸이 안 좋아서 미국에 보냈어요. 치료를 받으러 흉부외과 분야 권위자를 찾아 보낸 거지. 그 덕분에 많이 회복이 됐었는데……. 크면서 무리하게 운동을 해서 그런가 병이 다시 도졌지 뭡니까?”
“이런…….”
“그런데 이 녀석을 수술해 줬던 주치의께서 돌아가셨어요. 이젠 정말 잡을 지푸라기도 없어진 거지.”
“…다른 의사도 많지 않습니까?”
그렇게 묻는 도수의 뇌리로 ‘아사다 류타로’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그가 이사장에게 들어 알고 있는 유일한 실력자의 이름이었다. 그 써전도 흉부외과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심장이 선천적인 기형이에요. 십여 년 전 수술했던 당시에도 주치의께서 이야기했습니다. 통상적인 수술법으론 회생이 힘들다고. 수술이 끝난 후에는 그러더군요. 완치는 확실치 않다.”
“그런 불안정한 상태로 운동을 했던 겁니까?”
“꿈 없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소?”
“…….”
“내 손자 놈이 그리 말하더군요. 그래서 내버려 뒀습니다. 운동선수가 되는 건 반대했지만 입대는 허락했죠. 한동안은 괜찮았습니다. 전역할 때까진.”
꿈 없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말이 도수의 심장에 와닿았다. 그는 부모님을 보며 의사를 꿈꿨고 지금도 사람들을 치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더 이상 이 일을 할 수 없다면?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의사란 직업은 도수의 정체성 그 자체였다. 사람을 치유하는 능력을 빼면 그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명석한 두뇌, 제법 뛰어난 반사 신경, 투시력 같은 재능들은 어디서든 활용할 수 있겠지만 사람을 살리는 일이 아니라면 그에게는 무용했다.
그렇기에.
그는 쉬지 않고 환자를 돌봤다.
그가 다른 데 정신을 팔고 다른 일을 하는 모든 시간 속에서도 누군가는 다치고 누군가는 병들고 누군가는 죽는다.
그렇기 때문에 도수는 라크리마를 떠날 수 없었고, 병원을 떠날 수 없고, 앞으로도 환자가 있는 곳을 찾아다닐 터였다.
그 무엇도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값지지도, 즐겁지도 않기 때문이다.
“손자분이 영특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요, 영특합니다. 그러니 존중한 게고. 문제는 그 영특한 아이에게 다시 한번 시련이 찾아왔다는 겁니다. 이번엔 빛이 보이지 않았어요.”
“…….”
“지금 내가 선생님을 만난 게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사람 인연이란 건 늘 타이밍 아닙니까? 공교롭게도 전에 선생님 소문을 접한 후 이력을 좀 찾아봤었습니다. 물론 그 이력들만으론 속단하기 힘들었지요. 그래도 하나뿐인 손자인데, 그 아이의 생명을 쉽게 누군가에게 맡길 순 없었으니.”
“그러셨겠죠.”
“한데 이렇게 선생님을 만난 겁니다. 그리고 죽었다 확신했던 내 목숨을 살려주었습니다. 사고 후 나를 봤다면 어떤 써전이 내 몸에 칼을 댈 생각을 했겠습니까?”
노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를 처음 봤을 때 그는 죽음의 문턱에 서 있었다.
도수 아닌 대부분의 외과의라면 포기했을 터였다.
그러나.
“아닙니다.”
뜻밖에 한마디.
도수의 말에 노인이 눈을 크게 떴다.
“뭐가 말입니까?”
“전 환자분이 생각하시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저는 제가 볼 때 가망 있는 환자의 생존률을 최선을 다해 끌어 올릴 뿐입니다. 저도 환자를 잃을까 봐 두렵습니다. 그건 다른 써전들과 같아요.”
“다들 불가능하다고 하던 수술. 그런 수술을 해내지 않았습니까.”
“그들과 제 생각이 달랐을 뿐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노인이 강렬한 눈빛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듣고 싶습니다. 손자 놈을 부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 녀석이 여기까지 왔는데 선생님이 고개를 내젓는다면 다시 한번 상처를 받을 겁니다. 치료를 포기할 수도 있을 거예요. 그래서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니 말씀해 주십시오. 모두가 거부한 환자를 한번 봐주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노인의 말처럼 정확한 건 환자의 상태를 봐야 안다.
하지만 죽 들어보니 다른 이들은 ‘수술을 할 수 없다’고 답했을 터. 반대로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어떤 의사가 ‘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수술을 성공시켰기에, 노인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묻는 것이다.
그 부분을 상기한 도수가 대답했다.
“저는 저를 찾아온 환자를 그냥 돌려보내지 않습니다. 그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거면 됐습니다.”
빙그레 미소 진 노인이 말했다.
“외래를 보시는 분이면 진료를 보낼 텐데 응급실로 보내야겠군요. 내 손자 놈이 앓고 있는 희귀병에 대한 자료는 이메일을 알려주시면 보내겠습니다.”
그간의 수술 기록과 검사 결과를 보낸다는 뜻.
심장의 경우, 이미 한번 수술 받은 심장을 재수술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식을 생각하지 않은 건 이식도 힘든 질환이란 의미다.
도수가 명함을 건넸다.
“이쪽으로 주십시오.”
“고맙습니다. 꼭 보답하겠습니다.”
고개 숙이는 노인.
문득 궁금해진 도수가 물었다.
“어느 병원에서 근무하십니까?”
“이미 은퇴했습니다만…….”
빙그레 웃은 노인이 말을 이었다.
“그 전에는 명인대학병원에서 신경외과 과장으로 근무했었습니다.”
***
미국 켈리포니아.
오클랜드 국제공항.
헤어스타일은 포머드, 선글라스를 쓰고 청바지에 셔츠를 입은 동양인 남자가 출국심사를 마치고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의 이름은 엄승진.
어릴 적 심장 수술을 받기 위해 미국에 왔다가 스물여섯인 지금까지 쭉 이곳에서 산 청년이었다.
그는 한국에 계신 할아버지가 사고를 당했단 소식을 듣고 그 즉시 비행기 표를 끊어 떠나는 길이었다.
자리에 앉아 창문을 바라보고 있는 그때.
금발을 가진 백인 미녀가 옆에 와서 앉았다.
‘오늘은 운이 좋군.’
빙그레 웃은 엄승진은 비행기가 출발하길 기다렸다.
그리고 비행기가 상공에 뜨자.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미녀에게 말을 걸었다.
“실례지만…….”
“예?”
“어디까지 가시죠?”
“한국.”
짤막한 대답.
엄승진은 위축되지 않고 표를 보여주었다.
“가는 길이 같군요.”
“아, 네.”
“출장인가요?”
그 질문에 여자가 살짝 호기심을 드러냈다.
“어떻게 알았죠?”
“저한테는 특별한 능력이 있거든요.”
“특별한 능력……?”
“뭐, 통찰력 같은. 그런 겁니다.”
빙그레 웃은 엄승진이 말을 이었다.
“직업은 기자?”
“음.”
짧게 침음한 그녀가 피식 웃었다.
“작업 치곤 참신하네요.”
“말했잖아요. 내겐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스스로 마법사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 같은데. 난 그쪽이 얘기한 대로 논픽션을 다루는 직업이라 허접한 마술에는 별 관심 없거든요.”
그녀는 기자증을 슬쩍 보여준 뒤 말을 이었다.
“스스로 마법사라는 걸 증명하면 어울려 드리죠.”
“이런.”
짐짓 흠칫한 엄승진이 고개를 내저었다.
“하필 기자한테 들키다니. 운도 지지리 없지.”
“시시껄렁한 농담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미녀와 농담 따 먹기 하는 걸 좋아하는 겁니다.”
그는 자신의 신분증을 슬쩍 보여주었다.
그 신분증에는 알파벳 세 개와 누구나 알아볼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CIA?”
“이제 농담에 응할 생각이 좀 드나요?”
“좋아요, 제임스 본드 씨.”
흥미를 보인 그녀가 물었다.
“한국에는 왜?”
“할아버지 병문안. 그리고…….”
엄승진이 길게 말하지 않고 셔츠 단추를 풀었다.
톡, 톡!
“섹스어필을 하는 거라면…….”
그 순간.
셔츠 사이로 드러난 엄승진의 가슴팍을 본 여자의 눈이 커졌다.
“이건?”
“맞습니다. 심장 수술 자국.”
“수술받기 위해 한국으로 간다고요?”
“미국은 의료비가 너무 비싸서.”
“그게 다예요?”
고개를 저은 엄승진이 대답했다.
“기자라면 ‘이도수’란 이름을 들어봤죠?”
“이도수?”
여자의 푸른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이도수… 그 이름을 여기서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설마 그럴 리 없겠지만, 그를 아는 듯한 말투인데.”
“맞아요.”
“맙소사.”
“모든 걸 꿰고 있다는 듯한 표정은 어디 갔죠? 제임스 본드 씨.”
그녀가 화제를 전환했다.
“이도수한테 수술을 받으려는 거군요.”
“혹시 CIA 생각 있어요?”
“아뇨.”
여자가 말했다.
“라크리마에서의 이도수 관련 기사. 내가 최초로 보도했어요. 그쪽이나 나나 행선지가 겹치는 건 신기하지만… 그쪽보단 닥터 리가 훨씬 더 매력적이라서.”
그녀가 안대를 쓰려 하자 엄승진이 입을 열었다.
“내 심장은 특별합니다.”
여자, 매디 보웬의 손동작이 멈추자.
빙그레 웃은 엄승진이 말을 이었다.
“선천적인 기형이죠. 재수술이 필요한데, 누구도 내 심장을 보고 수술하려 들지 않더군요. 실패해도 본전이고 성공하면 대단히 각광받을 텐데.”
“재수술이라면 누군가는 수술을 했다는 뜻?”
“그랬죠. 옛날 옛적에 그런 분이 계셨습니다. 내가 심장 수술을 한 게 알려지면 운동을 못 할까 봐, 부와 명예를 포기해 가며 환자와의 비밀을 비켜준 위대한 의사가.”
“감동적인데요.”
“그런 감동적인 의사는 세상에 더 없는 것 같더군요. 뿐만 아니라 내 심장에 칼을 댈 만큼 용감한 의사도 없죠. 닥터 리에 대해선 잘 모르겠지만, 그 역시 내 상태를 보면 고개를 저을 겁니다.”
“…….”
“세계 최고의 흉부외과의라는 아사다 류타로도 ‘힘들다’고 했으니까.”
“아사다 류타로라.”
매디 보웬이 한국으로 가는 이유.
한국으로 귀국한 뒤 계속 파란을 일으키는 도수를 취재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아사다 류타로란 이름도 이 일이 개입되어 있었다.
세계 최고의 흉부외과의로 명성이 자자한 그가 괴짜라는 소문답게 직접 도수의 실력을 보기 위해 한국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별로 겹치고 싶지 않은데 계속 겹치네요. 아사다 류타로는 최고의 흉부외과의죠.”
“그런 그가 포기했다면 전 죽었다고 봐야죠.”
씁쓸하게 웃은 엄승진이 안색을 바꾸며 능글맞게 말했다.
“산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죽을 사람 소원은…….”
“제 생각은 좀 다른데요.”
매디 보웬이 더 듣기 싫다는 듯 말을 잘랐다. 그리고 나지막이 덧붙였다.
“방금 얘긴 흥미로웠어요. 앞으로 더 감동적인 드라마가 써질 것 같기도 하고… 당신은 닥터 리를 최후의 보루로 생각해도 좋을 거예요.”
엄승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뜻인지?”
“그는 포기를 모르는 남자거든요.”
“그에 대해 정말 잘 아나 보군요.”
무슨 말인지 이해한 엄승진이 이죽거렸으나.
매디 보웬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에요. 그러니 그를 만나기 전까지 비관적인 생각은 하지 말라는 거예요.”
“위로해 주는 겁니까?”
“글쎄요.”
고개를 돌려 창밖을 응시한 매디 보웬이 입에 미소를 배어 물고 말을 이었다.
“위로가 됐으면 좋겠네요. 그가 할 수 없다면 그때 포기해도 늦지 않아요. 그가 포기한다면 적어도 현세에는 당신을 치료할 수 있는 기술도, 사람도 없다는 뜻이니까. 라크리마에서 기적을 봤던 제가 증명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