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원인불명
“제안은 고맙지만 이도수 센터장은 현재 본원에 없어선 안 될 인재입니다. 엘 파소 파견은 병원 내부적으로 결정하도록 하지요.”
“…….”
이학승이 미간을 찌푸렸다.
“주제넘을지 모르지만 좋은 기회입니다. 이도수 센터장은 세계 의료업계 전반에 영향을 끼칠만한 외과의이니 더 넓은 곳으로 가는 게…….”
그 말을, 이사장이 칼같이 잘랐다.
“내 <브라운&윌리암슨>이 의료업계 발전 및 의료인력 양성에 힘쓴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니지만. 이 문제는 더 거론치 말도록 합시다.”
“…….”
이렇게까지 나오니 이학승도 더 설득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파견 문제는 어디까지나 이사장의 직권이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이도수 센터장에게 좋은 기회이니 한번 상의해 주십시오. 전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또 봅시다.”
이사장이 손을 뻗었다.
이학승은 찜찜한 기분으로 악수를 나눈 뒤 이사장실을 나갔다.
철컥.
문이 닫히자.
이사장이 인터폰 수화기를 들어 데스크 여직원에게 말했다.
“이도수 센터장 들어오라고 해요.”
***
잠시 후.
도수가 이사장실에 들어섰다.
“부르셨어요?”
고개를 끄덕인 이사장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예상을 빗나갔다.
“<브라운&윌리암슨>에 대해 알게 됐더구나.”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말투.
도수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반면 이사장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 날 딸이 사라졌는데, 내가 그 정도도 조사해 보지 않았을까.”
“…알고 계셨군요.”
“물론이다.”
고개를 주억거리는 이사장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그가 이학승에게 주범을 안다고 했던 건 바로 <브라운&윌리암슨>을 가리킨 것이었다. 죽기 전에 반드시 요절내리라 장담했던 상대도 <브라운&윌리암슨>이었다. 외려 그로서 자신이 알고 있다는 의심을 피한 것이다.
이를 모르는 도수가 물었다.
“…그런데도 그자들과 거래를 하신다고요?”
“그래서 거래를 하는 것이다.”
이사장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동물에게는 배울 점이 많지. 놈들이 자신보다 덩치가 큰 상대와 맞설 때 어떻게 하는 줄 아느냐?”
도수가 고개를 흔들자 그가 대답했다.
“발톱을 숨기고 다가가지. 그리고 단번에 물어 죽인다.”
도수는 씁쓸하게 웃었다.
“저완 다르네요.”
“그러니 내가 하겠다는 것이야. 전에 내게 말했지? 병원 경영이나 원내 정치 따위엔 조금도 관심이 없다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브라운&윌리암슨>이고 논문이고 그만 잊거라.”
“저도 그러고 싶은데, 저들이 안 도와주니.”
“무슨 뜻이냐?”
“전 말씀드렸듯 원내 정치든 <브라운&윌리암슨>이든 엮이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심장성형술’ 논문을 완성시킨 것도, 새로운 ‘심장성형술’로 환자를 살린 것도 아버지 아들로서, 외과의로서 제 길을 걸은 겁니다. 단지 아로대학병원장이나 <브라운&윌리암슨>이 그 길을 막고 서있었을 뿐.”
“…넌 네 갈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네. 그리고 전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겁니다. 제가 치료할 수 있는 환자는 힘닿는 데까지 모두 치료할 겁니다. 수술을 하든, 약을 주든, 논문을 쓰든지요.”
“…….”
거기까지 들은 이사장은 도수의 길 도중에 <브라운&윌리암슨>이란 거대한 벽이 있다고 해서 ‘멈추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할아버지가 아닌 한 사람의 선배 의사로서 대답했다.
“그래… 네 앞길의 돌부리는 내가 치워주마. 나 역시 힘닿는 데까지 도울 것이다.”
눈빛이 아련하게 잠기는 것만큼은 막을 수 없었다.
겁 없이 당찬 도수를 보니 사무치게 그리운 한 사람의 얼굴이 겹쳐졌던 것이다.
바로 자신의 딸, 정영화였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 했던가?
정영화도, 사위 이찬도 그랬다.
언제나 의사로서의 사명을 다했고, 그 길을 걷는 데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영화야.’
이사장은 속으로 그리운 딸의 이름을 불렀다. 네 아들은 참으로 곧고 의젓하다. 넌 지켜주지 못했지만, 네 아들만큼은 반드시 지켜주마.
그리 말해주고 싶었다.
그 마음이 너무 깊었던 탓일까?
단둘뿐인 이 자리에 가족들이 한데 모여 앉아 웃고 있는 장면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씁쓸한 미소.
주름 깊이 파인 가슴 깊은 회한.
‘그때 내가 고집을 꺾었다면…….’
사위 이찬을 인정해 주었다면.
만약 딸을 그렇게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그가 보고 있는 풍경이 현실이 됐을지도 모른다.
도수 역시, 조금은 더 어리광 넘치고 아이다운 모습을 지켰을 것이다.
이사장으로서 보는 ‘이도수 센터장’은 훌륭한 직원이었지만 할아버지로서 ‘이도수’는 아픈 손가락일 수밖에 없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수는 그를 덤덤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사무적인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
“그럼 전 환자를 봐야 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그러렴.”
이사장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하고 싶은 말은 태산이었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어색한 침묵.
그사이 고개를 숙여 보인 도수가 일어나 이사장실 문 너머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보던 이사장은 다시금 수화기를 들었다.
“흉부외과 박경환 선생 들어오라고 해요.”
엘 파소 병원으로의 파견이 내정된 인사.
그가 가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
한편 이사장실 문을 열고 나선 도수는 슬며시 주먹을 쥐었다. 의식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내색하진 않아도 할아버지와의 만남이 아직은 괜히 긴장되고 불편했다.
이런 느낌을 보통 사람들은 ‘서먹하다’고 표현할 터였다. 단지 도수와 이사장 간의 서먹함은 다른 이들보다 깊고 멀었다.
그 순간.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고개를 들자 익숙한 얼굴이 안에 있었다.
“…….”
“안녕하세요.”
먼저 인사한 건 나유하였다.
임옥순 여사의 손녀.
도수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할머님은요?”
“선생님 덕분에 많이 좋아지셨어요.”
“평소 건강관리를 잘해오셔서 그런지 회복이 빠르신 편입니다.”
“그렇겠죠. 몸에 좋다면 대통령 것도 뺏어 드시는 분이니.”
도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표정을 본 나유하가 깔깔 웃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죠. 진짜 대통령 음식을 빼앗아 드셨으려고요?”
“…원래 안 믿었는데.”
“그렇다 쳐요.”
여전히 웃음기를 드러내고 있는 그녀가 말했다.
“할머니가 선생님을 굉장히 좋게 보세요. 자길 쫓아냈다고.”
“…….”
“왜요?”
“말의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아서.”
“뭐가요? 내쫓았더니 호감 가지는 게?”
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유하가 피식 웃었다.
“누구도 할머니한테 당당하게 뭔가를 요구하진 않거든요. 선생님이 처음이었어요. 그런 무례한 요구는.”
“그랬겠죠.”
오성그룹의 안주인한테 누가 그런 무례를 범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나유하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만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환자를 위해 무례를 감수했다는 점이 다른 거죠. 할머닌 반드시 약속은 지키는 분이니 꼭 답례하실 거예요.”
“의사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다 그런 건 아니죠. 전 그 수술을 선생님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른 분이 할 수도 있었지만, 누구도 위험성 때문에 권하지 못했어요. 어차피 수술받지 않으면 사망할 상황인데도 수술 도중 사망했을 때의 책임이 두려워서 포기했던 거죠.”
영특한 소녀였다.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니.
도수가 말이 없자 그녀가 자조적으로 덧붙였다.
“만약 성공률이 높은 수술이었다면 서로 하려고 달려들었을걸요?”
그랬겠지.
하지만 심장성형술은 과정도 까다로울뿐더러 예후가 좋지 않은 수술이니 다들 몸을 사린 것이다.
도수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2층에 도착했다.
띵!
문이 열리자.
나유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전 선생님의 자신감을 존경해요. 그리고… 다들 포기했던 할머니를 살려주셔서 감사해요. 아직 그 말을 못한 것 같아서.”
“별말씀을.”
도수가 가볍게 고개 숙이며 답례하자 빙그레 웃은 나유하가 먼저 내렸다.
그녀가 떠난 엘리베이터는 1층에서 멈췄다.
그제서 내린 도수는 곧장 응급실로 향했다.
드르르륵.
응급실 자동문이 열리고.
여전히 분주한 응급실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약제실을 나서던 간호사 이하연이 그를 보며 알은체를 했다.
“센터장님.”
“네.”
“김 교수님이 찾으세요.”
김광석을 말하는 것이다.
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그의 얼굴을 훔쳐보던 이하연은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가 수술실에서 보여준 모습. 고난도 신경외과 수술과 흉부외과 수술을 모두 소화하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는, 병원에서 근무하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었다.
선망의 시선을 보내는 그녀를 등진 도수는 김광석의 연구실로 갔다.
철컥,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에선 김광석이 진지한 표정으로 CT를 보고 있었다.
“교수님.”
도수가 인기척을 하자 김광석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아, 센터장.”
그는 서론을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이것 좀 보지.”
도수는 그의 곁에 서서 모니터에 떠 있는 뇌 사진을 보았다.
CT에는 특별한 문제가 보이지 않았다.
“어떤 환자죠?”
그가 묻자.
김광석이 대답했다.
“급성발작을 일으켜서 실려 온 이십 대 남자 환자야. 언어기능이 현저히 떨어진 상태지.”
CT로 모든 걸 알 수는 없다.
해서 도수는 다시 물었다.
“MRI는요?”
“검사 도중 문제가 생겼어.”
김광석은 괴로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갑자기 환자의 기도가 막혀서 숨을 쉬지 못했다. 외과적 조치를 할 수밖에 없었어.”
기도를 절개하고 튜브를 꽂았다는 뜻이다.
“정밀 검사도 힘든 상황이라.”
“그래.”
“신경외과에선 뭐라고 했죠?”
“결론을 못 내고 있다. 내색하진 않지만 뇌에는 특별한 이상이 보이지 않는단 말로 환자를 거부하고 있어.”
“…….”
도수는 돌아가는 상황을 알 것 같았다.
‘정영록도 찾지 못했다고?’
물론 정영록은 도수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그건 그거고, 그가 훌륭한 실력을 가진 신경외과의라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수술에 대한 욕심이나 희귀 케이스 환자에 대한 열망도 대단했다. 그런 그가 단념했다는 것은 환자의 문제점을 전혀 종잡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제가 한번 보겠습니다.”
“그래. 나도 그러길 바라고 센터장한테 도움을 청한 거니까.”
두 사람은 연구실을 나섰다.
튜브를 꽂은 채 호흡하고 있는 환자에게 다가간 김광석이 말했다.
“환자분, 오늘 내에 튜브를 제거할 테니 불편해도 조금만 참으세요.”
환자가 눈을 감았다 뜨며 수긍했다.
한 발 다가선 도수가 투시력을 썼다.
샤아아아아아.
두 눈이 환하게 빛나며.
환자의 머릿속이 투영됐다.
그러나 CT를 보던 것처럼 한눈에 문제점을 발견할 순 없었다.
‘신경외과에서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뇌종양, 뇌졸중, 허혈성증후군은 아니야.’
일단 네 가지 대표적인 가능성을 배제했다.
그리고 한 발 더 바짝 다가서며 환자의 뇌를 샅샅이 살폈다.
샤아아아아아.
투시력이 더 강해졌다.
‘씨제이디(CJD: 크로이펠츠 야콥병. 광우병)도 아니고… 뭐지?’
이런 적은 없었다.
투시력을 쓰면 대부분 명확한 문제점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
도수는 환자의 머릿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이 집중력을 쏟아부었다.
샤아아아아아.
그러자.
환자의 뇌 속에서 꿈틀대는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김광석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눈이 마주친 도수의 입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한마디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