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노블레스 오블리제
천하대병원 VIP병동은 호텔을 방불케 하는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안에 들어선 도수는 자기도 모르게 주위에 눈길을 주곤 임옥순 여사를 보았다.
“몸은 좀 어떠세요?”
“선생님 덕분에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돌덩이를 치운 느낌이에요. 뻐근한 통증은 있지만.”
임옥순이 미소 지었다.
고개를 끄덕인 도수가 말했다.
“수술 후에 마취가 깨면서 느껴지는 통증입니다.”
“그런 것 같네요.”
“…….”
도수가 은영에게 돌아가기 전에 임옥순 여사의 병실을 들른 것은, 어려운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실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부탁이라… 생명을 연장해 준 은인 부탁인데 뭔들 못 들어드릴까.”
“지금 중환자실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천하대병원은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를 가진 병원이었다. 하지만 여느 대형병원이 그렇듯 찾는 환자도 그만큼 많았다.
유명하고 유능한 의사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환자들은 진료를 받을 때도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입원치료 역시 다를 게 없었다. 번호표를 끊어야 하는 것이다.
천하대병원 입장에서도 병실이나 침대를 비워두는 자체가 손실이라고 생각했기에 언제나 병실을 빈틈없이 돌렸다.
여기서 문제는 중증 외상센터가 재가동됐다는 점. 도수와 김광석이 부임한 뒤로 중증 외상 환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딱 맞게 돌아가던 중환자실이 넘쳤다.
말하자면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중증 외상센터를 재가동시킨 것에 대한 부작용이었다. 그에 따라 은영이 같은 중환자가 안정적인 환경에서 치료받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내부사정을 잘 모르는 임옥순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요?”
도수는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
“오성병원으로 트랜스퍼해 주셨으면 합니다.”
“병실을 비워달라?”
“네.”
“기분이 묘한데. VIP병동에 있는 날 쫓아내는 건가요? 나도 아직 회복이 다 안 됐는데.”
“여사님은 트랜스퍼가 가능하지만, 중환자실 환자 중에는 트랜스퍼가 가능한 환자가 없습니다. 일반실에선 중환자를 케어할 수 없고요. 트랜스퍼가 안 되는 중환자를 언제까지 응급실에 둘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응급실에 있는 이상 보험 적용도 안 되겠죠.”
“네.”
“하지만 그건 여기도 마찬가지일 텐데요? 병실이 없어서 응급실에 누워 있는 환자가 VIP병실이 보장 대상인 보험을 들었을 리도 없고.”
“환자 사정을 말하고 이사장님께 재가를 받은 생각입니다.”
“그건 선생님 일이 아니지 않나요?”
임옥순 여사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여전히 목소리는 온화했지만 속에 담긴 내용은 부드럽지 못했다.
“이사장님께는 내가 말씀드리죠. 이도수 선생이 정당한 금액을 지불하고 의료 서비스를 이용하는 내 권리를 침해하려 한다고. 환자 상태의 경중을 따져서 어느 한쪽만 편애를 한다고요.”
“편애가 아닙니다.”
“어째서죠.”
“여사님이 이 환자와 같은 상황이셨더라도 전 똑같이 트랜스퍼가 가능한 환자에게 부탁을 했을 테니까요.”
“선생님이 올바른 가치관을 가졌다고 해서 지금 저지르고 있는 부당한 요구가 정당해지는 건 아니죠.”
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래서 부탁을 드리는 거고요.”
그는 임옥순 여사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도수를 잠시 응시하던 임옥순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군진 들었겠죠?”
“오성병원과 관계된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난 오성그룹의 안주인이에요.”
모르고 있었다면 당연히 놀라야 하는데.
도수는 담담했다.
“네.”
“다른 나라에서 왔다더니 오성그룹이 어딘지 모르는 건가요?”
“그럴 리가요. 라크리마에서도 오성그룹이 보낸 구호품(救護品)을 봤는데요.”
“그런데도 부탁을 철회하지 않는군요.”
“끝끝내 거절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제 부탁은 다른 대안이 생길 때까지 유효합니다.”
도수는 꼿꼿했다.
“기분이 상한 내가 온 병원을 들쑤실 거라는 생각은 왜 못 하죠? 돈 많은 늙은이 추태는 하느님이 와도 못 막는 법인데.”
대 오성그룹의 안주인.
임옥순 여사의 협박을 듣고도 도수는 당황하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병원이 뒤집혀도 사람이 죽어 나가진 않지만, 환자는 목숨이 달렸습니다. 특히 제가 언급한 환자는 큰 수술을 두 번이나 거쳤어요. 수술이 성공했다 하더라도 어떤 환경에서 치료를 받느냐에 따라 충분히 예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환자 앞날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왜 본인 앞날은 걱정하지 않는 건지.”
두 사람은 줄다리기하듯 팽팽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둘 중 어느 쪽도 한 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유하는 흥미진진한 표정이 되었다.
‘병원 이사장들도 기를 못 펴는 할머니한테.’
도수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한참 동안 그 모습을 맞상대하던 임옥순이 두 눈을 반짝이며 빙그레 미소를 그렸다. 방금까지 기 싸움을 하던 사람치곤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다. 뜻밖의 반응을 보인 그녀가 입을 열었다.
“혼자 두면 단명할 인사일세. 그래도…….”
임옥순이 웃음기를 지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선생님 같은 의사가 많아야 할 텐데 말이에요. 나이를 먹다 보니 건강관리를 한다고 하는데도 병원과 친해져요. 점점 하나의 필수 코스가 되는 거지. 그렇게 의사들을 만나면 선생님 같은 느낌이 들어야 하는데, 다들 우리 족속 같은 느낌을 풍긴단 말이야. 의사가 아니라 장사치들 같아.”
도수는 말을 듣는 순간 정영록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한 사람도 함께 생각이 났다.
바로 김광석이다.
“그렇지 않은 의사들도 많습니다.”
그는 임옥순의 달라진 태도에 당황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그래요. 선생님 같은 의사가 많아야 한다고 말해놓고 병실을 양보 못 해주면 그것도 이상하지. 그리고 굳이 이사장님한테 허락 맡을 필요 없어요.”
“……?”
도수가 눈을 치뜨자.
임옥순이 말을 이었다.
“난 철저하게 이득을 좇는 사람이에요. 그중 상책은 나도 이득을 취하고 상대도 이득을 취해서 상부상조하는 거죠. 기왕 선행을 베풀 거 나한테도 득이 될 만큼 베풉시다. 환자 입원비는 내가 부담하겠어요.”
도수는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다.
“…환자한텐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임옥순이 뒤에 다소곳이 서 있는 나유하에게 손짓했다.
폭, 폭.
침대를 두드리자.
나유하가 그리 가서 앉았다.
“네, 할머니.”
김옥순이 그녀에게 말했다.
“씨앗을 많이 뿌려두면 그중 절반은 버리고 절반은 수확하기 마련이다. 인생이란 그런 거야. 결국 씨앗을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유리한 게임이지. 되도록 손해 볼 일은 하지 말되 남한테 호의를 베풀려거든 입으로 떠들지 않아도 모두가 다 알아챌 만큼 넉넉하게 베풀도록 하렴.”
깡마른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는 임옥순.
나유하는 가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할머니.”
반면 도수는 굳이 남에 가족사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임옥순의 동의를 받아 목적을 이뤘으니 이제 반대편 환자들에게 전달하면 그뿐이었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빙그레 웃은 임옥순이 손녀에게 덧붙였다.
“…그리고 은혜는 반드시 갚아야 하고. 감사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게 바로 사람 간에 의리를 지키는 길이거든.”
그녀는 도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오성병원으로 가면 당분간 못 볼 테니 미리 얘기해 둘게요.”
“……?”
“언제든 내게 원하는 게 생기거든 얘기해요. 나도 이 선생님이 필요한 게 뭐가 있을지 고민해 볼 테니.”
도수는 그 말이 빈말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도수가 아들을 구해준 ‘명인’이란 로펌의 대표가 그러했듯 그녀는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다.
해서 도수는 굳이 거부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
도수는 그 길로 응급실에 가서 은영이와 보호자들을 만났다.
그가 소식을 전하자, 보호자들은 눈물을 흘렸다.
“선생님 이렇게까지 우리 은영이를 신경 써주시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들로선 도수가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그들 세상의 전부인 딸아이를 구해준 사람.
“오실 때마다 이렇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시고… 이 은혜를 어떻게 다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도수는 맞잡은 손에 힘을 실으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저는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수술이 잘 끝났다고 해도 큰 수술이었습니다. 환자에게도, 어머님, 아버님께도 앞으로가 힘든 싸움이 될 거예요. 흔들리지 말고 잘 이겨내셔야 합니다. 그렇게 이겨내다 보면… 반드시 화창한 날이 올 겁니다.”
비가 쏟아지고 벼락이 꽂히는 먹구름 아래를 지나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살아만 있다면.
살아남기만 한다면.
시커먼 먹구름은 지나간다.
도수는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부모님을 잃었을 때, 총알이 빗발치고 방금까지 대화를 나누던 사람이 육편이 돼서 터져 나갈 때. 정을 붙인 사람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죽어 나자빠지고 그 자신 역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버텨낼 수 있었던 건, 해가 솟을 날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지금 그는 이곳에서 의사로서, 지옥에 막 발을 들인 사람들에게 이 길 끝에 천국이 있음을 안내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 속내까지 알아듣진 못했을지언정.
은영이의 부모님은 그 마음만은 전달받았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은영이도, 저희도 평생 감사하며 살 거예요. 감사합니다.”
“그분… 저희한테 병실을 양보해 준 분한테도 감사를 드려야 할 것 같은데… 혹시 어디 계신지 알 수 있을까요? 그래도 찾아뵙고 말씀드리는 게 도리인 것 같아서요.”
“십삼 층 VIP병실입니다. 이곳에 계신 게 알려지면 안 되는 분이라 만나주실 지는 모르겠습니다.”
도수의 말에 보호자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도 가봐야지요. 정말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몸소 실천하시는 분 같은데… 저희가 뭘 해드릴 게 있을진 몰라도 찾아가서 감사 인사를 드리는 게 사람 된 도리이지요…….”
도수는 말없이 은영이를 응시했다. 이제 환자의 치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으니, 남은 건 환자 본인의 회복력이었다.
‘그보다…….’
환자 보호자들이 알아야 하는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얼마 전 신경외과 레지던트가 고의로 자행한 투약 사건.
만약 이 일이 새나갔다면 병원뿐만 아니라 의사사회, 어쩌면 이사장까지 도수의 입을 막으려 설득했겠지만, 도수의 입장은 달랐다.
환자 보호자들은 환자에 관해 사소한 것까지 알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 권리는 누구도 침해할 수 없다.
의사라면 더더욱 바로 알려야 할 의무가 있었다.
고개를 돌린 도수는 푸석한 환자들의 얼굴을 보며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 아셔야 할 게 있습니다.”
***
다음 날.
도수는 지난 두 번의 대수술에 대한 원내 컨퍼런스 자료를 준비했다.
이 정도는 강미소나 이시원에게 부탁해도 되는 부분이었지만 그는 직접 했다.
아니, 직접 할 수밖에 없었다.
임옥순 여사의 심장성형술은 기존 바티스타 수술을 변형해 만든 새로운 방식의 수술법이었고, 은영이의 뇌수술 역시 일반적인 써전이 할 수 없는 술식으로 진행했기 때문이다.
도수는 일곱 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을 쏟아부어 자료를 완성했고, 다음 날이 되자 조수 강미소를 대동한 채 컨퍼런스를 열기로 한 대회의실로 갔다.
대회의실에 들어서기 무섭게 강미소가 말했다.
“후, 떨리네요.”
“왜요?”
“천하대병원이잖아요. 아로대랑은 폼(Form)이나 발표방식도 다를 텐데.”
“김용찬 선생한테 물어봐서 참고했습니다.”
“역시……!”
강미소는 엄지를 추켜세우고 덧붙였다.
“빈틈없으시긴.”
“…수술 내용에 대한 발표도 발표지만, 오늘 컨퍼런스에 목적이 하나 더 있습니다.”
도수가 입을 뗐다.
“신경외과 레지던트 한 명이 징계를 받게 될 거예요.”
“에? 무슨 일 있었어요?”
“네.”
그는 도둑 투약 사건 이후 그에 관한 내용을 일언반구 입에 담지 않아왔다. 그리고 지금 역시 구체적인 설명을 보류했다.
“어차피 곧 알게 될 테니 묻진 마시고.”
“어차피 안 알려줄 거 알아서 물을 생각도 없었거든요.”
“그건 그렇고, 이 일로 신경외과 헤드부터 당사자까지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그 정도 사이즈예요?”
“네.”
강미소는 후,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센터장님이 가는 길에는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네요. 가시밭길이에요, 가시밭길.”
“우리가 했던 선서가 맞는 지도라면. 지도를 따라가는데도 자꾸 가시밭길을 만난다는 건, 그 지도가 사실은 잘못된 지도거나…….”
“지도거나?”
“많은 사람이 오가면서 그 길이 원형을 잃은 거겠죠.”
강미소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것 같아요.”
그 순간.
대회의실 문이 열리며 의사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파도포말처럼 우르르 밀려 들어왔다.
그 선두에는 이사장.
그리고 도수가 생각지도 못했던 한 사람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