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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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수, 그리고 강미소는 동시에 눈살을 찌푸렸다. 굳이 이 상황에 나타나서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을 것은 뭐란 말인가.
지금 막 수술이 끝난 상황.
보호자나 환자가 안정을 조금 찾은 후에 이야기해도 될 일을, 정영록은 거침없이 덧붙였다.
“수술 후 코마(Coma: 혼수상태)가 길어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영영 깨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현실적인 문제도 있으니 잘 한번 고민해 보십시오.”
생명유지장치를 달고 연명하는 즉시 한 달에도 수천의 비용이 나갈 수밖에 없다. 일반인들이 감당하기 힘든 액수. 게다가 깨어날지, 깨어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두고 계속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감당키 힘든 비용을 쏟아붓는 건 환자나 환자 보호자나 피를 말리는 일이었다.
지극히 현실적인 조언이었지만 보호자들에게는 당장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수술을 받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수술을 하라구요....?”
“빠른 시일 내에 수술받지 않는다면 지금보다 더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그, 그럼 만약… 수술을 받지 않으면요?”
“따님에게 남은 시간이 길지 않을 겁니다.”
“……!”
보호자들은 다시 한번 큰 충격에 빠졌다.
도수의 수술이 잘 끝나서 잠시나마 희망을 맛봤던 보호자들의 머리 위로 더 큰 날벼락이 떨어진 셈이다.
도수 역시 조금 놀랐다. 그는 환자를 처음 봤던 순간 투시력을 썼지만 뇌를 보호하고 있는 두꺼운 두개골 뼈와 경막, 지주막, 연질막까지 뚫고 뇌 안쪽을 투시하진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다른 곳을 투시했을 때에 비해 자세히 파악하지 못했다.
반면 도수가 수술하는 사이 환자의 CT사진을 본 정영록이 말했다.
“치료비를 마련하실 때까지 모든 준비를 마쳐두겠습니다. 만약 따님 수술을 받기로 결심이 서시면 제가 직접 최선을 다해 수술해 드리겠습니다.”
태연한 태도.
그리고 치료비 이야기에 환자 아버지가 움찔했다.
“…선생님 딸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잘못 될지도 모르는 수술을 받지 않으면 내 딸이 시한부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요? 어떻게 그런 말을… 그렇게…….”
“보호자분들께서 이성적으로 판단하셔야 합니다.”
환자 어머니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도수를 쳐다봤다.
“선생님이 해주세요……! 수술!”
정영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친구는 신경외과가 아닙니다. 전 이 분야 최고의 신경외과의고요.”
그 어조에 본인에 대한 자부심 외에도 묘한 기대감이 배여 있었다.
“…….”
도수는 알 수 있었다.
그가 보기 드문 케이스의 환자를 보고 반가워하고 있음을.
보호자들이 너무 충격을 받아 울며 쓰러진 때에야, 그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그건 안타까움이나 애처로움이 아니었다.
불편함.
도수는 정영록의 팔을 덥석 잡았다.
“저 좀 보시죠.”
“손 떼지.”
그러나 도수는 더욱 힘을 주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따라오세요.”
그제야 손을 뗀 도수가 주저앉아 울고 있는 환자들을 지나쳐 수술실을 나갔고, 얼굴이 붉어진 정영록이 강미소를 보며 환자들을 눈짓한 뒤 뒤따라 나갔다.
“어디까지 가는 거지?”
도수는 대답 없이 철문을 열고 계단실로 나갔다. 그리고 정영록이 들어오기 무섭게, 몸을 돌리며 물었다.
“그렇게밖에 못 합니까?”
“뭐가?”
“상황이 적합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의사로서 환자들에게 하루빨리 사실을 알린 것뿐이다. 상황이란 건 감정적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야. 조금이라도 빨리 알려야 저 사람들도 슬퍼할 만큼 슬퍼하고 현실을 받아들일 거 아닌가? 한시라도 빨리 수술비 구할 곳도 알아보고, 입원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테고. 그리고 무엇보다 이건 보호자들이 궁금해하던 부분이다. 네가 대답해 주지 못했던 것들을, 네가 수술하는 사이 씨티 결과를 확인하고 대답해 준 것뿐이야. 머리가 얼마나, 어떻게 다쳤는지.”
“…….”
“우린 저 환자만 보는 게 아니야. 우리가 환자 한 명, 한 명한테 감정적으로 굴다간 컨디션에 지장을 받을 수 있다. 그로 인해 다른 환자를 잃을 수도 있고. 내게 뭘 말하고 싶은 거지? 의술은 인술이다?”
피식 웃은 정영록이 덧붙였다.
“환자 우리 과로 어레인지하도록.”
몸을 돌린 그가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도수가 정영록의 어깨를 잡았다.
고개를 홱 돌린 정영록이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자꾸 내 몸에 손을 대는 것 같은데.”
“손댈 만하니까요.”
도수가 중증 외상센터장으로서, 자기 환자를 거론하며 말했다.
“환자가 원하기 전까지 어레인지는 없습니다.”
“뭐?”
정영록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헛소리지? 중증 외상센터에 내가 모르는 신경외과 전문의라도 들어왔나?”
“…환자 보호자는 제게 수술받길 원합니다. 환자한테 맡기죠. 당신한테 수술받을지, 내게 수술을 받을지.”
“당신?”
그 호칭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더 황당한 건 본론이었다. 정영록은 선뜻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신경외과 전공도 아니면서 수술할 수 있다고?”
“저는 중증 외상센터로 오기 전 인턴이었습니다.”
“그래서?”
“중증 외상도 전공한 적이 없다고요.”
“…설마… 진짜 하겠단 건가?”
정영록은 거의 반년 만에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뇌수술이 장난이야? 뇌는 그리 간단한 게 아니야!”
“보고 싶으시면 직접 어시스트 서시죠.”
“뭐?”
정영록의 표정이 구겨졌고.
도수가 말을 이었다.
“제가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저도 환자 목숨 걸고 도박할 생각 없으니까, 제가 못 할 것 같거든 막으세요.”
“그렇게 해서 내가 얻는 건?”
“제안하는 게 아닙니다.”
도수의 눈빛이 바뀌었다.
“당신 같은 의사한테 환자 목숨을 맡길 수 없을 뿐.”
“나 같은 의사?”
정영록이 황당한 웃음을 터뜨렸다.
“난 최고야. 국내에 나보다 뛰어난 신경외과의는 없다.”
그야말로 대단한 자부심. 하지만 그 같은 실력을 가지고도 ‘최고’란 말을 입에 담지 않는 도수가 보기에는 언짢을 따름이었다.
“그건 두고 보면 알겠죠.”
그는 몸을 돌렸다.
왜 이사장이 ‘첫째 손주’ 얘길 하면서 혀를 찼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전까진 별다른 관심이 없었으나.
이젠 자신만의 세상에 매몰된 채 살고 있는 어리석은 사촌 형을 끄집어내서 패대기치고 싶은 의지가 생겼다. 그가 도수의 환자를 단순한 ‘수술 케이스’로 생각하는 마음은, 도수에게 모멸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
“아까 보셨죠? 그런 의사들 때문에 의사들이 싸잡혀서 욕을 먹는 거예요.”
강미소는 아직도 분이 안 풀렸는지 원래보다 말이 많아졌다.
“아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그 태도는 뭐냐구요.”
뇌신경과 관련된 수십 권의 책을 쌓아두고 읽던 도수가 고개를 들었다.
“본론이 뭐예요? 용건 없이 같은 소리 빙빙 돌리는 스타일 아닌 것 같은데.”
“흐음… 중증 외상센터장 되셨다고 태도가 너무 달라지셨는데?”
“달라진 건 강 선생님도 마찬가진 것 같고.”
턱.
책을 덮은 도수가 물었다.
“뭐예요, 용건이?”
“제가 들어가게 해주세요.”
도수는 더 들어보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신경외과 전공 안 했잖아요.”
“센터장님은 하셨구요?.”
“…….”
“어차피 어시스트는 정영록인지 뭔지 그 사람이 선다면서요? 나머지는 저도 거들 수 있어요.”
“그 자리를 제 사람으로 채울 순 없습니다.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고. 수술 과정을 증명해 줄 사람이 필요해요.”
“수술 과정을 증명해 줄 사람이요?”
“네.”
“그게 누군데요?”
도수는 적합한 사람을 한 사람 떠올렸지만, 굳이 그녀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있습니다. 적임자가.”
“어차피 물어도 말해주진 않을 테고…….”
그녀는 엄지와 새끼를 펼치며 말했다.
“그럼 약속해 주세요. 그 의사 소견을 뒤엎어 준다고. 그 환자, 은영이 반드시 살리겠다고.”
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할 겁니다.”
몇 번이나 듣는 같은 소리다.
하지만 강미소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 소릴 내뱉고 실패하는 도수의 모습을.
그래서 믿음이 갔다.
신경외과가 전공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는데, 뇌수술을 하겠다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앞뒤 없이 달려들 사람은 아닌 걸 알고 있으니, 자신이 모르는 신비로운 구석이 어디 또 있으리라 여길 따름이다.
“믿어요.”
그렇게 말한 강미소가 덧붙였다.
“그럼 전 자리 비우신 동안 환자 보러 가보겠습니다! 김 교수님도 계시니까 너무 걱정 말고 수술 준비 하세요. 삼 주면 그리 긴 시간은 아니잖아요. 파이팅!”
주먹을 흔들어 보인 그녀가 나가자.
도수는 다시 책을 펼쳤다.
이미 환자의 CT사진을 보고 증상을 파악해 둔 상태.
일단은 뇌신경의 기본이 되는 책들을 모두 읽고, 완벽한 수술법을 이론적으로 섭렵해야 한다. 그 후에는 천하대병원에만 있는 ‘3D바이오 시뮬레이터’를 통해 현재 환자의 뇌구조를 정확히 일치하게끔 구현해 낸 뒤 그 모형으로 쉼 없이 연습할 계획이었다.
언젠가는 신경외과 분야도 공부할 생각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바로 실전으로 뛰어들게 될 줄은 몰랐다.
그렇게 한참 실전을 대비하고 있는 그때.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바쁠 줄 알았다.”
철컥.
등 뒤로 문을 닫은 사람은 바로 이사장이었다.
“왜 부르시지 않고.”
“삼 주 뒤 뇌수술을 준비하려면 잠자는 시간도 줄여야 할 판일 텐데?”
“…….”
도수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고, 이사장이 이어 물었다.
“개두수술도 개복수술만큼이나 자신 있는 게냐?”
“아닙니다.”
“그러면?”
“제가 살린 환자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끝까지 책임져야죠.”
“환자나 보호자가 경력자를 원하면?”
“정 선생과 제 이력을 환자나 보호자에게 숨김없이 알린 뒤 직접 선택권을 줄 생각입니다. 만약 정 선생을 선택한다면 어쩔 수 없는 거고요.”
‘정 선생’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사장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많이 실망했나 보구나.”
“네.”
도수도 숨기지 않았다.
“사촌 형으로선 기대도 안 했으니 실망할 것도 없었습니다. 단지 환자를 대하는 태도만큼은 실망스럽더군요.”
“이번 일에 대해 말이 많을 거다. 자칫 환자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센터장 자리를 내려놔야 할 수도 있어. 센터장이라는 자리를 위협할 만큼 큰일이다, 이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라크리마에선 목숨 걸고 수술했습니다. 이깟 자리 하나 걸고 수술하는 게 뭐 대수라고요. 제가 두려운 건 자리를 내놓는 게 아니라 환자가 잘못되는 겁니다.”
“…….”
“전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할 겁니다.”
도수의 눈빛.
거기서 뿜어지는 강렬한 의지는 이사장을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한 것이 조금도 없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사장은 직접 봐왔다.
이런 눈빛으로 어떤 약속을 했을 때, 마침내 이루고야 마는 모습을.
문제는 이번에 그 굳건한 의지력이 꺾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사장은 그를 막진 않았다.
“영록이한테 들어보니 너와 약속을 했다면서? 만약 ‘실패할 것 같으면 수술 중 집도의를 바꿀 수 있다’고.”
“네. 환자 목숨을 담보로 걸 수는 없으니까요.”
“그럼 집도의 변경 시점을 판단해 줄 참관인도 필요하겠지?”
“물론입니다.”
“네가 정하면 영록이가 반대할 텐데. 영록이가 정해도 네가 반대할 테고.”
“반대하지 않을 사람을 생각해 뒀습니다.”
“누구로?”
잠시 침묵하던 도수가 전혀 뜻밖에 이름을 꺼냈다.
“정영훈 선생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