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병원장이 좋고 말고는 중요치 않았다.
이미 도수를 취재하기 위한 기자들이 잔뜩 몰려든 상태였고, 국내 최고의 변호사들이 그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곧 회견장이 마련되고 도수와 장성민이 회견석에 앉았다.
“질문은 고발 후에 받겠습니다.”
그는 말을 이었다.
“아로대병원 병원장실은 로비와, 그로인한 모략의 산실입니다…….”
그렇게 첫마디를 뗀 도수는 아버지 논문에 관한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밝혔다.
그리고 증거 자료로 자신이 개량한 논문이 아닌, 아버지 논문 원안을 들고 보여주었다.
찰칵, 찰칵!
“보건복지부에서 막은 논문이 바로 이 논문입니다. 사본을 원하시는 기자님이 계시면 회견 후 따로 복사본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병원장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와 관련된 몇몇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도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굳이 병원 안을 돌아다니며 캐고 다닐 필요 없이 공모자들이 드러났다.
도수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보건복지부와 아로대병원의 커넥션은 증거가 없는 상태이니 추측성 보도는 자제 부탁드립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한 대학병원 병원장이 의사들 간의 결속력을 믿고 소속 교수였던 이찬 씨의 논문을 침해, 은폐하여 환자들을 기만했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저는 아로대학병원측에 병원장 해임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이상입니다.”
말이 떨어지자.
기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들고 물었다.
그중 귀에 들어오는 질문이 있었다.
“이 사실을 폭로하신 분은 누구십니까?”
그에 도수가 대답했다.
“저는 아로대학병원장이 은폐하려 했던 논문을 작성한 이찬 씨의 아들이며, 바로 어제까지 이 병원에서 근무했던 인턴. 이도수입니다.”
웅성웅성.
다시 한번 장내가 술렁였다.
병원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리 미친놈이라고 해도…….’
선수 쳐서 이렇게 터뜨릴 줄은 몰랐다. 어느 병원이 됐던 의사 사회 자체의 결속력은 굉장히 단단했기에 이렇게 저질러 버리면 ‘용감하다’고 칭찬하는 사람보단 ‘저만 잘났다’고 비꼬는 동종업계 사람들이 훨씬 많을 터였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도수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걸 폭로하고 병원장 해임을 요구했다.
“제기랄.”
병원장은 욕지거리를 씹어 뱉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불편한 시선들이 느껴졌다.
바로 그때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기자들 중 누군가 물었다.
“‘어제까지’ 아로대학병원에서 근무하셨다고 하셨죠? 그럼 이제 앞으론 어떻게 되시는 건가요? 아로대학병원은 그만두신 겁니까?”
도수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이제 서울 천하대학병원으로 갑니다.”
기자들이 다시 한번 술렁거렸다.
“처, 천하대?”
“본원으로 간다고……?”
“인턴이 이렇게 막 옮겨도 되는 건가?”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며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뒤섞였다.
그야말로 정신없는 상황 속에.
도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제보해서 조용히 처리하려고 했는데.’
더 확실한 증거들도 확보하고, 뒤에 누가 있는지도 알아낸 후 제보해서 깔끔하게 병원장을 끌어내리려 했다.
한데 이제 자신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화려한 퍼포먼스와 함께.
이건 좋지 않았다.
병원장을 주물렀던 상대가 누구든 도수의 존재를 알게 되는 셈이니까.
하지만 도수는 이미 벌어진 일에는 미련을 두지 않았다.
“더 질문 없으시면 이만 인터뷰 마치겠습니다.”
이후 모든 건 장성민이 처리할 것이다.
이미 그렇게 이야기가 되서 있었고.
병원장을 어떻게 망가뜨릴지는 그의 입맛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도수는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회견장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일별한 장성민이 마이크에 대고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이 사건에 관한 모든 질문은 법무법인 ‘명인’ 법무팀을 통해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고개를 숙여 보인 장성민이 회견장을 나서서 어딘가로 전화를 한 통 걸었다.
그리곤 먹이를 던졌다.
“어, 난데. 아로대병원장 구린내 많이 풍기고 다녔던데… 한번 쪼아보지 그래?”
상대가 무어라 말했고.
그가 피식 웃었다.
“심평원? 자네가 직접 나서서 뒤를 캐보란 말이야. 내가 그 치들을 믿었으면 자네한테 직접 연락을 했겠나? 말귀가 어두워진 거야, 아니면 우물에 오래 있다 보니 엉덩이가 무거워진 거야?”
도수를 상대할 때와는 백팔십도 다른 모습이었다.
결국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었는지 장성민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래… 그래. 자네가 신경 써주면 내가 가만히 있겠나? 자주 연락하자고.”
뚝.
전화를 끊은 장성민이 어느새 도착한 도수 앞에서 입을 열었다.
“아무 걱정 말게. 이제 병원장은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쁠 테니.”
“감사합니다.”
도수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장성민은 묘하게 뿌듯했다. 어지간해선 ‘고맙다’고 말할 성격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설탕발린 말보단 진심 한마디가 더 와닿기 마련인 법.
장성민이 대답했다.
“나야말로 고맙네.”
***
도수가 먼저 사직서를 냈고.
레지던트 강미소, 이시원이 한 달 간격으로 사표를 냈다.
마지막은 인수인계할 것이 가장 많은 김광석이었다.
그렇게 세 달.
세 사람이 천하대병원으로 출근하는 첫날이 다가왔다.
아침 댓바람부터 일어난 김광석의 아내, 임숙영은 쌀밥과 따뜻한 미역국, 갈비 몇 점을 식탁 위에 올렸다.
오랜만에 세 식구와 도수가 둘러앉자 그녀가 말했다.
“여기 와서 마음이 놓여요.”
이곳으로 이사오기 전, 임숙영의 속이 시커멓게 썩어들어갔던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다.
오직 병원에만 처박혀 있는 김광석. 자기 딸은 변변한 학원 한 곳도 못 다니는데 한 달 죽어라 일해 받은 자기 월급을 모조리 환자 치료비용으로 대주는 데 써버리는 것도 미칠 노릇이었다. 비라도 퍼붓는 날이면 물까지 새는 오래된 임대 아파트는 밤이면 으스스했다.
한데 이제 그 모든 것들이 해결됐다.
어쩌면 가족보다 환자가 우선이었던 김광석의 태도도 바뀔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다.
이런 생각 끝에, 임숙영이 도수에게 말했다.
“고맙다.”
“네?”
“네 덕분이라며. 우리가 여기로 온 거.”
“교수님 실력 덕분이죠.”
도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기분이 좋았다. 김광석의 가족에게 입은 은혜를 이런 식으로나마 조금씩 갚아 갈 수 있다는 게 즐거운 것이다.
그때 새로운 교복을 맞춰 입은 해리가 불쑥 물었다.
“아, 맞다! 오빠 그거 알아?”
“뭐?”
“오빠 내 수원 친구들한테 인기 어어어엄~ 청 많은 거.”
“……?”
도수가 영문을 모르자 해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그렇게 둔해서 사람 몸은 어떻게 보고 수술은 어떻게 한대? 암튼 오늘부터 싸인해 달라는 환자들로 넘쳐날걸!”
“…설마.”
도수는 진심으로 불편한 표정을 지었고.
그 얼굴을 본 해리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응급실엔 아픈 사람들만 올 텐데 오빠 신경 쓸 겨를이나 있겠어?”
“그게 편해.”
아직 소년소녀 티를 채 다 못 벗은 두 사람이 노닥거리는 모습을 보던 김광석은 홀로 생각했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애인데… 어떻게 수술만 들어가면 사람이 돌변하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가 도수의 밥그릇이 싹 빈 걸 확인하고 말했다.
“일어나자. 일하러 가야지.”
***
도수는 김광석의 차를 타고 천하대병원으로 갔다.
두 시까지 정문 앞에서 만나기로 한 레지던트 이시원과 강미소를 기다리고 있는데, 앰뷸런스 한 대가 들어섰다.
사이렌 소리를 듣는 순간.
운전대를 잡고 있던 김광석은 자기도 모르게 안전벨트를 풀었다.
“교수님.”
도수의 한마디.
김광석이 멈칫했다.
“아.”
이곳은 아로대병원이 아니다.
직업병.
도수 역시 자기도 모르게 문고리를 잡았던 것이다.
“…조금만 미루죠.”
“…그러자.”
서로를 보며 피식 웃는 두 사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시원과 강미소가 도착했다.
그렇게 합류한 네 사람은 일단 이사장실로 올라갔다.
‘응급외상센터’는 천하대병원 소속이면서도 독립적인 단체였다. 말이 좋아 독립적인 단체지, 이사장 라인을 타고 들어온 외지인들이다.
그 때문일까?
엘리베이터에서부터 김광석 교수를 알아본 이들의 시선이 가시처럼 뾰족했다.
“…….”
띵!
문이 열리고 천하대병원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그들만 남자, 이시원이 머리를 흔들었다.
“후, 예상은 했지만 정말 장난 아니네요.”
“남자가 쫄긴.”
강미소가 한마디 하자 이시원이 고개를 홱 돌렸다.
두 사람을 보며 씁쓸하게 웃은 김광석이 말했다.
“너희도 그렇지만 나도 예상했던 일이다. 그래도 너무 걱정은 마라. 후원자 한 명 없는 아로대에서도 잘해냈는데 강력한 후원자가 있는 여기서라고 못 할까.”
듣고 보니 그랬다.
다들 표정을 푸는 그때.
띵!
엘리베이터가 이사장실이 있는 17층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김광석의 표정도 굳었다.
개중 유일하게 태연한 도수가 먼저 내리며 말했다.
“우리한테 아무도 시비 안 걸어요.”
툭 던진 한마디였지만.
다들 수긍할 수 있었다.
도수가 저지른 사건은 의료계 전반에 소문이 좍 퍼진 상태였다. ‘이도수’란 인턴이 아로대학병원 병원장을 날려 버렸다고.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인턴이 병원장 목도 날리는 판에, 누구도 도수와 척을 지고 싶지 않을 것이다.
네 사람은 이사장실로 들어갔다.
“어서 오시오. 이사장 정영기입니다.”
이사장이 김광석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맞잡은 김광석이 공손하게 인사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김광석이라고 합니다.”
“김 교수와 함께 일하게 돼서 영광입니다.”
이사장은 ‘함께 일한다’고 못 박고 있었다. 하긴, 그의 입장에서도 아로대병원의 마스코트였던 김광석의 영입만 놓고 보면 호재였다.
빙그레 웃은 이사장이 그 옆의 이시원과 강미소에게로 시선을 옮기자.
두 사람이 스스로 소개했다.
“아로대학병원 응급의학과… 였던, 레지던트 2년 차 이시원입니다!”
“3년차 강미솝니다.”
이사장이 차례로 악수를 마치자.
김광석이 말했다.
“이런 대우를 받고 와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파트도 분에 넘칩니다. 식구들이 무척 좋아하더군요.”
이 역시 천하대병원의 이점이었다.
교수들에게는 임기 동안 아파트를 무료로 쓸 수 있도록 제공해 주는 것이다.
“다행입니다.”
빙그레 웃은 이사장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우리 병원 응급외상센터를 이끌어줄 주역들이니 그 정도 지원은 당연한 거지요. 여러분들 이력서를 보니 다들 실전 경험이 대단하더군요. 모쪼록 좋은 병원 문화를 만들어보도록 합시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사장이 말했다.
“그럼 서로 통성명도 했으니 앞으로 근무하시게 될 응급외상센터도 가보시고, 병원 안을 둘러보시지요. 밖에 안내할 친구가 와 있을 겁니다. 출근은 내일 아침부터 하시면 됩니다.”
모두가 일어났지만 도수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병원장도 그에게 나가라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먼저 일어선 이시원만 우두커니 기다리는 게 아닌가?
강미소가 옆구리를 쿡 찌르며 고갯짓을 하고 나서야 ‘아!’ 외친 이시원이 졸졸 따라 나갔다.
마침내 조손 간의 자리가 마련되자.
이사장이 말했다.
“동료들이 널 많이 신뢰하는 것 같더구나.”
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믿지 않았다면 천하대병원까지 함께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사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그런 일을 저지르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좀 시끄럽긴 했죠. 제 계획과 달리.”
“네 머릿속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구나.”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앞으로 어떤 길을 가게 될지.”
“그래. 앞길이 창창하니 뭐라도 할 수 있을 게야. 그보다…….”
이사장은 상체를 숙이며 도수를 응시했다.
“너도 이제 이 병원에서 근무하게 됐으니, 우리 가족에 대해 알아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