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그 순간.
도수의 가운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려 퍼졌다.
지이이이잉. 지이이이잉.
도수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할아버지.
네 글자가 액정 위로 드러났다.
“잠시… 전화 좀 받겠습니다.”
도수가 통화 버튼을 누르자 수화기 뒤편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다.
이사장이 말했다.
-지금 막 회의를 끝내고 나오는 길이야. 반대도 많았지만 네가 원했던 것들을 모두 수용하기로 결론이 났다.
“알겠습니다.”
-언제 출근할 생각이냐?
“연락드리죠.”
-…그래. 준비 되는 대로 연락하거라. 너무 늦지 말고.
“네.”
전화가 끊어졌다.
핸드폰을 내린 도수는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세 사람에게 말했다.
“결정됐습니다. 가시죠.”
“…….”
김광석은 도수에게 더 캐묻지 않고 세 사람과 함께 자신의 연구실로 갔다.
레지던트 둘, 인턴 하나. 그리고 김광석 교수가 둘러앉았다.
응급실 인력 절반이 빠진 셈이지만, 양진명 교수와 임재영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에 가질 수 있는 여유였다. 물론 그들의 마음은 한 명도 여유롭지 못했다. 팽팽한 분위기를 깨고, 김광석이 첫마디를 뗐다.
“우선 두 사람한테 묻지.”
그는 레지던트 둘을 응시했다.
“각자 마음들은 정했나?”
김광석의 말에 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가고 싶습니다.”
“전 가고 싶습니다.”
말이 엉키자 이시원이 불현듯 강미소를 보며 농담을 던졌다.
“요즘 죽이 잘 맞네요.”
강미소가 인상을 쓰며 쏘아보고 이시원이 깨갱하는 사이.
고개를 끄덕인 김광석이 입을 뗐다.
“나도 결심이 섰다.”
그리곤 도수를 봤다.
“…천하대병원 근처 학군이 그렇게 좋다던데. 가족들과도 상의를 끝냈다.”
진짜 그 이유였다면 진작 이사를 가겠지만.
비로소 셋 다 천하대병원으로 가는 데 동의한 셈이다.
도수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확인했다.
“확실히 결심이 서신 건가요?”
세 사람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모든 게 확고해지고 나서야 도수도 숨김없이 밝혔다.
“저는 천하대병원 이사장님의 손자입니다.”
“……!”
김광석을 제외한 레지던트들은 기겁했다.
“엉……?”
“뭐어어?”
차분한 표정의 김광석을 발견한 강미소가 물었다.
“설마 교수님은 알고 계셨던 거예요?”
“그래.”
“와아, 어떻게 이런 일이…….”
공증인이 있으니 거짓은 아닐 테지만.
두 레지던트는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제가 처음 아로대학병원에 온 이유는 아버지의 논문을 되찾기 위해서입니다. 병원장이 그걸 막았고요. 아직 자세한 내막을 알려 드릴 순 없지만 오늘 그에 관한 기자회견을 열 생각입니다.”
“……!”
이번에는 김광석도 눈을 치떴다. 아버지의 논문에 대한 것은 전에도 들었던 이야기. 병원장이 가지고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도 그였다.
“그럴 리가… 병원장님은 내게 자신이 논문을 가지고 있다고 직접 말씀하셨는데?”
“빼돌리려 했습니다. 가짜를 주려 했을 수도 있고요. 저는 다른 경로로 그 논문을 입수했습니다.”
이번에는 강미소가 나섰다.
“제가 넘겼어요. 그 논문.”
그녀가 직접 밝히니 도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복잡한 표정이 된 세 사람.
그나마 아로대학병원을 떠나기로 결심한 후였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더 큰 충격을 받았을 터였다. 하지만 모교 병원에 이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기쁜 사람은 없었다.
그들의 기분을 이해한 도수는 더 이상 대화를 진행하지 않았다.
“전 환자들 보고 양진명 교수님한테 가보겠습니다. 그동안 제가 맡았던 환자들 인수인계를 하려고요.”
“…그래.”
김광석의 허락을 받은 도수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구실을 나선 그는 자신이 맡았던 응급 환자들을 죽 돌아보고, 응급실이 한산한 시간이 되어서야 양진명 교수의 연구실로 갔다.
양진명은 수술복을 입은 채 짜장면을 먹고 있었다.
후루룩!
“음?”
도수의 얼굴을 본 그는 뜻밖이란 표정으로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좀 앉아. 아침 전인가?”
“아침을 먹기엔 좀 이른데요.”
“아침 되면 환자들이 또 들이닥칠 텐데 미리 든든하게 배 채워놔야지.”
“이제 저녁 식사 아니시고요?”
“…그랬나? 기억이 잘 안 나는군.”
양진명은 피식 웃었다.
어제 몇 끼를 먹었는지, 뭘 먹었는지도 선뜻 기억이 안 났다.
환자에 대한 걸 잊지 않는 것을 보면 치매는 아닌데 응급실이 워낙 정신없이 돌아가다 보니 쓸데없는 것들에 뇌가 반응을 안 했다.
시계를 본 그가 말을 이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도수는 하루 종일 피곤했기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저는 곧 인턴을 그만둡니다.”
양진명은 그리 크게 놀라지 않았다.
애초에 아로대 출신 의사도 아닌 도수. 거기다 중증 외상센터의 특수성을 생각해 보면 사람 한 명 나가는 게 그리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만큼은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센터에 꼭 필요한 인재라고 생각했는데.”
“감사합니다.”
“뭐, 감사까지야. 그건 우리 병원 사람들 대부분이 같은 생각일 텐데. 아무튼… 이유를 묻진 않지. 어디서든 알아서 잘할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럼 날 찾아온 이유는 인수인계를 하러?”
“네.”
“일단 접수했다.”
짜장면 그릇을 옆으로 밀어낸 양진명은 곧장 수첩을 가져왔다.
“얘기해 봐.”
그 후 두 시간.
영진명은 연구실에서 꼼짝도 못 했다.
도수는 불과 다섯 명의 환자를 전담하고 있을 뿐이지만 두 시간이 꽉 찰 정도로 소상하게 설명했다.
환자를 최초 발견했던 당시부터 지금까지 상태 흐름과 어떤 주제의 대화를 좋아하는지, 뭐에 관심이 있는지까지 빼놓지 않았다.
죽 들은 양진명은 혀를 내둘렀다.
“무뚝뚝해 보이는 사람이 관찰력이 대단하군. 환자랑도 잘 지냈던 것 같고.”
당연하다.
잠자고 수술하고 초진 및 처치하는 시간을 빼곤 대부분 전담 환자를 보는 데 썼으니까.
“…어쨌든 어제 제가 수술한 대동맥류 환자를 제외하고 다들 어느 정도 인정을 찾은 상태입니다.”
“그래. 그런 것 같구만.”
양진명은 아쉬운 눈길로 도수를 보며 물었다.
“정말 가야겠나?”
“…….”
“넌 좋은 의사가 될 자질을 갖추고 있어. 내가 도와줄 수 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거절이나 다름없었다.
그 뜻을 알아들은 양진명은 여전히 미련이 남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네 생각이 확고하다면 어쩔 수 없지. 완전히 떠나기 전에 또 보자고.”
“네.”
인사한 도수는 양진명의 방을 나왔다.
다음 그가 향한 곳은 어제 대동맥류로 실려 왔던 육십칠 세 노인 환자가 있는 응급실이었다.
회복실에 자리가 없었기에 그녀는 여전히 응급실에서 수액과 항생제를 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노인이 눈동자만 돌렸다.
주름진 눈가를 쪼그리던 그녀가 물었다.
“선상이 내 생명의 은인이여?”
생명의 은인이라.
언제 들어도 달콤한 말이다.
“이도수입니다. 선생님께선 어제 오후 아홉시 경 대동맥류로 실려 오셨습니다. 혈관 벽이 약해져서…….”
“선상님. 구구절절 설명한다고 내가 알겠나. 아무튼 고마와요.”
“아닙니다.”
“내 선상님한테 해줄 수 있는 건 없고… 뭐라도 해주고 싶은데 내 재주가 좀 있으니 관상 좀 봐주리다.”
“네?”
도수가 당황했다.
“아뇨, 전 괜찮은데.”
“사양하지 마시우. 금수도 제 목숨 살린 은혜는 안다던데. 보기에는 이래도 난 그리 경우 없는 사람이 아니니.”
할머니는 도수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손을 꼭 잡았다.
도수 역시 그 손을 떨쳐내지 않았다.
“…….”
그를 빤히 응시하는 할머니.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휴, 슨상. 내 그래도 관상가로 이름깨나 날렸으니 불편하게 듣지 말고 살면서 한 번씩 생각은 혀요. 그러라고 말해주는 거니께.”
어째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역마살이라고 들어보셨수?”
도수가 고개를 젓자 할머니가 말했다.
“인상을 찌푸리면 미간에 내천(川)자가 생기고 눈썹 끝이 길고 솟았으니 평생 떠도는 역마살이 끼었어. 거기에 불시에 재난과 죽음이 따르는 천살까지. 아주 위험한…….”
말을 하다 만 노파의 눈이 커졌다. 보통 이런 얘길 들으면 인상을 찌푸리며 화를 내거나, 긴장해서 표정이 굳기 마련인데 도수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기 때문이다.
“…왜 웃는 게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라서.”
“관상을 본 적이 있는가?”
도수는 고개를 저었다.
“쭉 그래 왔니까요. 돌아가신 부모님도 관상을 보셨다면 저와 비슷한 관상을 가지셨을 겁니다.”
“기구하구만… 기구해.”
“저는 반가운데요.”
“뭐가?”
“할머니 말씀에 의하면 저는 죽음과 가까운 곳을 떠돌아다닐 게 분명하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왜 반갑단 말이우.”
“그런 곳이 의사가 가장 필요한 곳이니까.”
빙그레 웃은 도수는 허리를 숙여 할머니의 이부자리를 봐주었다.
“은혜 톡톡히 갚으셨습니다. 오래 사세요. 그래야 제가 더 뿌듯합니다.”
말을 남긴 도수가 병실을 나갔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할머니는 병실 문에서 쉬이 눈을 떼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기이한 일이로고… 상의 조화가 신비로와 그런가. 눈빛이나 인성 모두 내 짐작을 벗어나는구만.”
아래 떨어져서 관상을 봤던 할머니는 도수가 이부자리를 봐줄 때, 그의 눈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역마살과 천살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상반된 기운을 풍기고 있는 도수의 앞길을 예측할 수 없었다.
***
다음 날 아침.
아로대학병원 주차장으로 수십 대의 차량이 들어섰다. 고급 세단부터 승합차까지 다양한 차종이 뒤섞여 있었다. 누가 보면 병원에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보던 조직폭력배 두목이 입원했나 싶은 광경.
주차장 건너편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환자들이 웅성거렸다.
“뭐여?”
“시방, 방송국에서도 온 것 같은디.”
구수한 사투리를 쓰는 두 노인의 말대로 승합차마다 방송국 로고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고급세단 뒷좌석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
바로 법무법인 ‘명인’의 대표 장성민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나머지 세단 뒷좌석에서도 정장을 입은 중년 남자들이 줄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을 스윽 훑은 장성민이 입을 열었다.
“가지. 일하러.”
저벅, 저벅, 저벅……
장성민을 위시한 여덟 명의 변호인단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 뒤를 승합차에서 내린 기자들 수십 명이 우르르 따라붙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아로대학병원 정문이었다.
***
한편 그 시각.
맞은편에 보이는 건물 13층에선 병원장이 전화통을 붙들고 있었다.
“…그래. 어제 사직서를 받았고 퇴사 처리를 통보했단 말이야. 그럼 내가 그 야밤에 공지를 올리나? 그래, 그래. 이도수 선생은 어제 오후 아홉 시 경 우리 병원에서 퇴사처리 됐어. 그러니까…….”
무심코 고개를 돌린 병원장은 창문으로 보이는 광경에 말을 멈췄다.
“…저게 뭐야?”
-예?
수화기 반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장님. 무슨 문제라도…….
“나중에 다시 하지.”
뚝.
전화를 끊은 병원장은 대답해 줄 사람도 없는 허공에다 반복된 질문을 던졌다.
“저게 뭐야?”
정장을 입은 일단의 남자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무수한 기자들.
머리가 다시 굴러가기 시작한 병원장은 벌떡 일어났다.
“이게 무슨 개 같은 일이야?”
그는 즉시 원장실 문을 열고 나섰다. 그리고 비서를 지나치려다,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지금 부원장한테 전화해서 일 층 로비로 가라고 해요.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나한테 연락 좀 달라고.”
“예, 원장…….”
병원장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엘리베이터로 가서 몸을 실었다. 그가 향하는 곳은 도수가 있을 응급실이었다.
***
병원장이 응급실로 내려간 시간.
도수는 임재영과 함께 1층 로비에 있었다.
막 아침을 먹으러 가던 길이었다.
웅성웅성.
“무슨 일 있나 본데?”
임재영의 말에 도수는 직감했다.
‘왔군.’
의료진이며 환자들이 양측으로 갈라져 있고, 일단의 무리가 병원 로비를 통과하고 있었다. 정장을 입고 서류가방을 든 남자들과 그 뒤를 따르는 기자들이었다.
그 앞을 막은 건 부원장과 과장 두 사람이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우뚝.
일정 거리를 두고 걸음을 멈춘 장성민이 입을 열었다.
“의뢰인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리고 명함을 건넸다.
명함을 받아본 부원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법무법인 명인… 대표님이시라고요……?”
그도 알고 있는 곳이었다. 그가 알기에 이곳 대표와 변호인단이 총동원될 정도면 대기업 사장급 이상은 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 VIP병동에도 이들을 부를만한 환자가 없는 상황.
선뜻 그들이 말하는 ‘의뢰인’이 누군지 떠오르지 않은 부원장이 물었다.
“…대체 의뢰인이 누구란 말입니까?”
그 순간.
병원장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부원장 옆에 섰다. 얼마나 돌아다녔으면 이마에 땀이 흥건했다. 평소와 전혀 다른 병원장의 모습에 모두가 놀란 그때.
병원장이 숨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후우… 무슨 일입니까.”
그는 위축되지 않았다. 지금도 등 뒤에는 그를 따르는 수많은 의사들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변호인단과 기자들, 그리고 병원사람들이 절반으로 갈린 듯한 상황.
장성민이 입을 열어 대답하려 할 때.
불쑥 의사라인에서 한 사람이 나섰다.
두벅, 두벅.
도수였다.
그는 변호인단 앞에서 몸을 빙글 돌리며 병원장을 마주봤다.
“이제부터 기자회견을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