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인과응보(因果應報)
“할아버지가… 누구라고?”
병원장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라크리마에서 온 도수의 할아버지가 천하대 이사장이라?
뜬금없어도 이건 너무 뜬금없지 않은가.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거냐?”
완전히 멘탈이 붕괴된 병원장이 아무렇게나 던지자 도수가 대답했다.
“믿으시든 안 믿으시든 상관없습니다.”
“하.”
병원장은 기가 막혔다.
천하대병원이 어떤 곳인가?
대한민국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병원이다.
“그래, 그렇다 치자. 그런 놈이 왜 우리 병원에 왔어?”
그 순간 도수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게 마음에 안 들면 왜 내 아버지의 논문을 갖고 계셨습니까?”
“……!”
“당신은…….”
입을 뗀 도수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당신만큼은 날 똑바로 쳐다보지 말았어야지.”
그는 한 걸음 성큼 다가갔다.
병원장이 움찔하는 찰나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날 만난 순간, 당신이 훔친 논문을 들고 부리나케 달아났어야지.”
“너…….”
“날 이용하려 들지도 말아야 했고.”
“…….”
병원장은 도수의 두 눈을 감히 마주볼 수가 없었다. 그런 볼품없는 모습을 빤히 응시하던 도수는 주먹에 힘을 풀었다.
부모님이 객지에서 그렇게 돌아가셔야만 했던 것.
그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해 보면 모든 비극은 눈앞에 서 있는 병원장이 손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원인은 원한이 됐다.
“…지금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한 도수는 품 안에서 봉투 한 장을 꺼냈다. ‘사직서’라고 쓰여 있는 봉투를.
“제도적으로 인턴은 초임지에서 일 년을 채워야 하죠. 그래서 전 그만두고 천하대로 가겠습니다.”
“…이래놓고… 내가 사표 처리를 해줄 거라고 생각하나?”
병원장은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다. 한순간 느낀 두려움이 그의 자존심을 무너트렸다. 그렇게 공포는 분노가 됐다.
하지만 그 분노는 도수를 막지 못했다.
“그럼 저를 끼고 계시려고요?”
“…….”
병원장은 차마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아군은 가까이 두고 적은 더 가까이 두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품는 순간 찔리는 고슴도치 같은 놈은 최대한 멀리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도수는 그야말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상대였으니까.
“그럼.”
고개를 살짝 숙인 도수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두벅, 두벅, 두벅……
그가 멀어졌지만.
병원장은 다시 불러 세울 수 없었다. 만약 그를 잡았다간 그 순간 감당치 못할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분명 일순 그런 느낌이 들었는데도, 느낌은 짧고 생각은 금방 바뀌었다.
“건방진 새끼.”
병원장은 작정을 했다.
상대가 지금도 감당하기 벅찬 적이라면, 품지 못하는 이상 밟아버려야겠다고.
***
“후우.”
도수는 힘을 뺐다.
병원장의 뻔뻔한 낯짝을 보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분노가 치민 것이다.
하마터면 그 면상에 주먹을 날릴 뻔했다.
‘그렇게 쉽게 분풀이를 할 순 없지.’
병원장이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막은 건 보건복지부.
일개 아로대학병원 병원장이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없는 단체다.
즉 뭔가가 더 있다는 뜻.
마음을 다스린 도수는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했던 소아 환자에게로 갔다.
혈액응고장애를 가진 상태에서 끔찍한 사고를 당해 생명이 위험했던 남자아이는 수술 부위와 상처 부위를 거즈로 감싼 채 회복하고 있는 중이었다.
“유빈.”
도수가 이름을 부르자 남자아이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힘들겠지만 밤에도 최대한 뒤척이지 말고 바르게 누워서 자야 한다. 간호사 누나가 주는 약 잘 챙겨 먹고.”
유빈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런데 그 순간. 아이 눈시울이 붉어지며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흘렀다. 눈가를 훔치며 참는 듯한 숨소리를 내더니 이내 고개를 돌린다.
“…….”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인 것이다.
돌아서려던 도수는 간이침대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아마 칠 년 전 자신도 이 아이와 똑같은 표정으로 울고 있었을 것이다.
부모님을 잃고 전쟁터를 전전하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도수가 그랬듯.
이 아이 역시 자신만의 전쟁을 치러야 할 터였다.
비록 환경은 달라도 아픔을 견뎌내야 한다는 사실만은 같다.
아직 여물지도 않은 심장에 커다란 흉터를 새기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만은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던 도수는 아이를 향해 입술을 뗐다.
“하나만 잊지마.”
아이가 고개를 살짝 돌리며 도수를 보았다.
맑은 눈을 응시한 도수가 덧붙였다.
“엄마가 널 지켜보고 있을 거라는 거.”
“…….”
“엄마는 항상 네 곁에 계실 거다.”
“…흐극.”
참던 눈물이 터졌다.
유빈은 한참을 꺽꺽대며 울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도수는 아이가 눈물을 그칠 때쯤 되어서야 몸을 일으켰다.
바로 그때.
유빈이 도수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엄마를 살려달라고 울며 붙잡았던 그 손으로.
“…감사합니다…….”
유빈의 한마디.
인사성이 밝은 아이다.
도수는 머리를 녀석의 헝클어트린 후 저벅저벅 병실을 나섰다. 그리고 병실 앞 스테이션으로 가서 물었다.
“김유빈 환자. 가족은요?”
“아, 선생님. 그게… 연고가 전혀 없어요. 엄마랑 단둘이 살았던 것 같은데… 아빠는 연락 끊긴 지 오래라고 하고요. 위자료만 조금씩 보내줬던 것 같아요.”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일단 안정을 찾고, 회복하면 복지시설로 이관되겠죠.”
병실 문을 응시한 간호사가 덧붙였다.
“참… 딱해요. 저런 아이들을 보면.”
“…….”
도수는 몸을 돌려 환자들이 가득 찬 병실을 지났다. 이번 붕괴 사고는 오래된 주공아파트에서 생겼다. 그 때문에 사상자들의 태반은 경제 상황이 열악한 이들이었다. 이런 사람들 중 대부분은 수술을 받고 살아난다 해도 새로운 걱정이 시작된다. 돈 걱정. 치료비 때문에 가족들은 빚을 지고 부담을 떠안는다. 비극에서 벗어난 순간 새로운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좋으니 살려만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의사가 할 수 있는 건 딱 거기까지.
해야 할 일도 거기까지다.
환자의 인생 전부를 책임지고 소생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예외도 있지만.’
도수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김광석을 보았다. 병원 내 풍문에 의하면 저 사람은 위급한 환자를 치료하다 진 빚만 8억이라고 한다. 나이 오십에 빚이 8억. 누가 들으면 실패한 삶이었지만 그는 의사고, 지금도 하루하루 생명을 구하고 있었다.
우뚝.
도수가 걸음을 멈췄지만 김광석은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바람결에 한마디를 남겼다.
“한 시간 후에 레지던트 둘과 내 방으로 와라.”
고개를 돌려 김광석의 뒷모습을 좇던 도수는 입가에 미소를 드리웠다.
‘드디어.’
결정을 내린 것 같다.
그렇게 여긴 도수는 이시원과 강미소를 부르기 위해 응급실 스테이션으로 갔다.
***
오늘도 임재영은 스테이션에 콱 박혀 있었다. 언제든 환자가 들어오면 초진과 함께 콜이나 노티를 하기 위해서.
“이시원 선생님, 강미소 선생님은요?”
도수였다.
“오늘 자주 찾네. 두 분 다 양 교수님 환자 2차 수술 들어가셨어. 금방 끝나실 거야.”
“이 밤에요?”
“엉. 비상 상황이잖아. 아무도 퇴근 못 하고 있다고. 수술실도 가득 찼고.”
밖에는 밤이 왔는데 병원 안은 여전히 한낮이었다.
붕괴 사고로 인해 환자들 수술 스케줄이 꼬인 것이다.
그나저나 이런 비상시국에 오프를 주다니.
“근데 왜 오프를…….”
“인턴이 그런 큰 수술들을 했으니 김 교수님이 특별히 생각해서 주신 거지. 비상 상황이긴 해도, 응급수술은 없으니까 스케줄만 조절하면 소화 가능하잖아.”
“그러다 응급 오면요?”
“김 교수님 계시잖아.”
하긴.
김광석 정도면 웬만한 상황은 혼자서 감당할 수 있다. 어느 정도 납득이 된 도수가 못 다 즐긴 휴일의 한 시간을 공부로 때우기 위해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밖으로부터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임재영이 인심 쓴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신경 쓰지 말고 가봐. 내가 알아서 할게.”
“환자 상태 보고요.”
그 순간 구조대원들이 스트레쳐카를 밀면서 들이닥쳤다.
“육십칠 세 환자입니다! 혈압 급격히 오르고 있고…….”
임재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환자 상태는 한눈에 봐도 심각해 보였기에, 그는 환자 곁에 붙어서 물었다.
“환자분? 환자분!”
“아이고, 아이고…….”
대화가 가능한 상태가 아니었다.
환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이게……!”
혼자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임재영은 서둘러 콜을 하기 위해 스테이션으로 뛰어갔다.
그때 이미 도수는 투시력을 쓰고 있었다.
샤아아아아아아아.
환자의 복부가 눈에 들어왔다.
복부대동맥류.
압력이 센 대동맥 내 혈관벽의 일부분이 약해져서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현상이다.
이러다 터져 버리면?
쇼크가 올 테고, 환자는 몇 분 내에 사망할 것이다.
그때 귓가로 구조대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복통이 심하고 복부에서 심장이 뛰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셨다고… 구토와 어지러움증도 호소했었습니다!”
이미 대동맥은 부풀대로 부풀어서 당장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시간이 없다는 의미.
도수가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피!”
그리고 거듭.
“오형 피 주세요! 빨리!”
그 외침이 어찌나 다급했던지 간호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도수의 머리도 바쁘게 굴러갔다.
‘수술방은 없다.’
그럼 대체할 곳이 필요하다.
“처치실.”
중얼거린 도수가 지시를 내렸다.
“이 환자 지금 당장 수술 들어갑니다! 현미경이랑 확장모니터 필요 없으니 스텐트 그라프트(Stent-Graft: 인조혈관)! 빨리! 수술복이랑 수술 도구, 수혈팩도 최대한 많이 받아서 처치실로 가져오세요!”
그리고는 구조대원들과 함께 스트레쳐카를 밀며 처치실로 내달렸다.
도착했을 땐 이미 환자가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쇼크.
“……!”
배도 서서히 부풀어 오르고 있다.
이 두 가지 증상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
이미 대동맥이 터진 것이다.
“젠장.”
샤아아아아아.
투시력이 발현된 도수의 시야로 배 안에 가득찬 핏물이 들어왔다.
곧 수혈팩과 수술도구를 든 간호사들이 들이닥치고.
도수는 망설임 없이 메스를 꺼내 들었다.
“후우.”
환자의 배를 열어야 한다.
“출혈 심할 거예요. 긴장합시다.”
간호사들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지금 이 자리에서 배를 열었다가 사망할 경우 큰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선생님! 아무리 그래도 처치실에서…….”
“감염은 어떻게 하시려구요!”
우려섞인 외침에 도수가 수술복을 입으며 대답했다.
“일단 살려놓고 보죠.”
“……!”
대동맥류는 한번 터지면 절반 이상 무조건 사망하는 질환.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도수 손에서 처리할 문제가 아니었지만, 김광석이나 다른 누군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면 환자가 죽을 확률은 거의 백퍼센트였다.
하지만 콜을 하고 돌아온 임재영과 다른 환자를 보러 내려왔던 레지던트, 그리고 간호사들은 발만 동동 구르며 지금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오히려 도수를 말리려 들었다.
“미쳤어? 여기서 배를 열려고?”
수술 이후 은근히 도수를 조심스러워하던 임재영이 눈을 부라리며 외쳤고.
레지던트 역시 도끼눈을 뜨며 소리를 질렀다.
“그 환자 건드는 순간 독박이야! 미친 짓 하지 마!”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도수에게 가장 중요한 건 누군가의 어머니이자 아내이자 할머니일 노인을 살리는 것뿐이었다. 그래서일까?
도수는 환자 배로 메스를 가져갔다.
그리고.
스으윽……!
배를 째는 순간.
안으로부터 시뻘건 핏물이 넘쳐 올랐다.
촤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