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저렉션-50화 (50/152)

# 50

러쉬(Rush)

오프 날 저녁.

도수는 아로대학병원으로 돌아왔다.

“어?”

그를 발견한 임재영이 토끼 눈을 했다.

“뭐야? 황금오프에 왜 병원을 와? 너, 설마 오늘 간다는 병원이 우리 병원…….”

“아뇨.”

고개를 저은 도수가 말했다.

“안 그래도 다른 병원에서 오는 길이에요.”

도수는 그 이상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그가 생각하는 두 명에 인턴은 없었다. 임재영은 자진해서 응급의학과에 지원한 것도 아닐뿐더러 내전 지역 의료봉사를 나간 적도 없기 때문이다.

“이시원 선생님, 강미소 선생님 어디 계세요?”

“글쎄? 응급실 어디 계시지 않을까? 수술 들어가신 건 아닐 거야.”

고개를 끄덕인 도수는 응급실을 가로질렀다.

“오프에 웬일이야?”

양진명 교수.

사람 좋고 도수를 인정해 주는 사람이었지만 그 역시 대상이 아니었다.

사람 좋은 만큼 병원 내 정치도 잘해서 중증 외상센터의 일원임에도 내전 지역 봉사를 권유받지 않고 굳건히 자리를 지켰던 것이다.

“센터장님 좀 뵈려고요.”

“그래? 시원이랑 미소 저녁 먹이신다고 나가셨는데. 요 앞에 찌개집에 계실 거다.”

“감사합니다.”

도수는 그 길로 응급실을 나와 찌개집으로 갔다. 과연 안에는 세 사람이 둘러앉아 때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어?”

가장 먼저 도수를 발견한 건 이시원이었다.

“오프 날 여긴 웬일이야?”

그러자 강미소가 따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게. 제2의 센터장님이 될 조짐이 보인다니까요?”

피식 웃은 김광석이 의자를 빼주며 도수에게 말했다.

“이리 앉아라.”

도수가 앉자 그가 다시 물었다.

“이쪽에 약속이라도 있는 거야?”

“그건 아니고, 마침 세 분을 뵈려고 왔어요.”

“음?”

김광석의 평온한 얼굴을 향해 도수가 돌을 던졌다.

“오늘 천하대병원 이사장님을 만나고 왔습니다. 저와 세 분을 스카우트해 달라고요.”

수면에 파문이 이는 것처럼 세 사람의 표정이 저마다 다르게 구겨졌다.

그중 김광석이 가장 심각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아로대병원 중증 외상센터에는 교수님께 모든 걸 배운 양진명 교수님이 계시죠. 하지만 천하대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경기권에는 아로대병원이 있지만 서울권에서 발생하는 중증 외상 환자는 의지할 데가 없어요.”

도수는 조건에 관한 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천하대’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 조건이 뛸 것은 불 보듯 빤했기 때문이다.

김광석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천하대로 가자? 상의 한마디 없이 네 멋대로 이런 일을 벌인 거냐?”

분노.

그러나 도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는 상태에서 상의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니까요. 지금도 결정된 건 없습니다. 그래서 의사를 여쭙는 거고요.”

원래 무데뽀인 건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이건 좀 지나쳤다.

적어도 김광석의 생각은 그랬다.

“네가 옮기는 건 막지 않으마. 그렇다고 안 그래도 인력이 달리는 중증 외상센터의 인력을 감언이설로 빼가려는 건 누가 봐도 눈살 찌푸려질 행동이야.”

“우리가 빠져도 인력은 충원될 겁니다.”

“누가 지원한다고?”

“누구든 ‘아로대’ 하면 ‘중증 외상센터’를 먼저 떠올립니다. 교수님이 이루신 거죠. 병원은 명성을 위해서라도 예산을 절감할지언정 외상센터를 없애진 못할 겁니다.”

“일 리 있는 말이다만.”

김광석이 덧붙였다.

“난 이 병원에 아무런 불만도 없다. 그런 내가 왜 조강지처를 버리고 다른 살림을 차려야 한단 말이냐?”

“정말 불만이 없으세요?”

한마디로 아프게 찌른 도수가 말을 이었다.

“교수님이 안 계시면 중증 외상센터는 변하겠죠. 전만 못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경기권역의 구조 활동은 계속 이어질 거예요. 병원이 그걸 바랄 테니까. 하지만 서울은 중증 외상센터 자체가 없어요. 있어도 유명무실하죠.”

이쯤 되자 김광석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좋다. 우리가 여길 떠나서 천하대 중증 외상센터로 간다고 치자. 그들이 우리를 있는 그대로 볼까? 천하대다, 천하대! 모교 출신이 아니라고 색안경을 낄 테고, 어떤 지원도 빈약할 거다. 그런 곳에 타학교출신 인력 셋이 들어가서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있습니다.”

도수는 확신했다.

“중증 외상센터는 병원과 별개로 활동하게 될 겁니다. 모든 재가는 이사장을 통해서 받게 될 테고요. 병원정치에 휘말릴 일도, 눈치 보며 환자를 치료해야 하는 일도 없을 겁니다.”

“…….”

“물론 문제는 있습니다.”

도수는 솔직히 밝혔다.

“센터장 자리를 내려놓고 평교수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제가 센터장으로 부임할 테니까요.”

“……!”

레지던트들은 수저도 못 뜨고 있었지만, 만약 음식을 먹고 있었다면 내용물을 뱉었을 만큼 놀랐다.

“으… 응급외상센터장!?”

인턴에서 바로 센터장까지.

과장급 인사가 되는 셈이다.

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말씀드렸다시피 별개로 활동하니 병원 내 어떤 힘도 없습니다. 병원장 선거에도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할 테고 과장급 회의도 참여하지 못할 겁니다. 그 대신 임기가 없는 이사장님께 환자 치료를 위한 건 뭐든 요구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환자 치료에 더 집중할 수 있는 거죠.”

“맙소사.”

강미소가 김광석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교수님. 우리가 그렇게 원하던 것들 아니에요?”

이시원도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김광석을 응시하고 있었다.

두 레지던트의 눈길을 받은 김광석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미 마음이 동했군.’

중증 외상센터장?

누가 되든 알 바 아니었다.

그저 환자가 필요로 하는 곳에서 한 명의 환자라도 더 치료할 수 있다면 그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천하대병원 이사장은 최고의 스폰서였다. 아마 그를 등에 업은 천하대병원 중증 외상센터는 금세 아로대병원을 넘어 세계적으로 도약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물을 한 모금 들이켠 김광석이 물었다.

“언제부터 했던 생각이지?”

“아로대병원에 왔을 때부터요.”

도수는 굳이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전 현장 경험이 많은 동료가 필요합니다. 환자를 위해서라면 개인의 영달 따윈 얼마든 포기할 수 있는 동료가 필요합니다. 손, 발을 맞출 실력 있는 동료가 필요해요.”

그는, 한마디 덧붙였다.

“저와 함께해 주십시오.”

“…….”

침묵이 감돌았다.

보글보글 끓던 찌개는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두 레지던트의 가슴은 반대로 점차 다시 끓어오르고 있었지만, 김광석의 가슴만은 여전히 차가웠다.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을 걸까.

환자에 대한 순순한 열망으로 가득 찬 두 레지던트는 마음속으로 환호하고 있는데 말이다.

만약.

도수가 천하대 응급외상센터장 자리를 받아왔다면?

그래도 지금처럼 불쾌하게 앉아 있을까?

김광석은 그에 대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어느새 나도 그렇게 되었던가.’

그는 깊은 고민에 잠겼고.

도수 역시 오늘 당장 결론이 날 대화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세 사람에게 말했다.

“충분히 고민해 보고 결정해서 알려주세요. 세 분이 어떤 결정을 내리시든 존중합니다. 저는 천하대로 갈 테지만요.”

그는 먼저 일어났다.

“그럼 식사하고 오십시오. 병원에 들어가 있겠습니다.”

인사한 도수는 몸을 돌려 찌개집을 나왔다. 아직 아로대학병원에서 할 일이 끝나지 않았다.

***

아로대학병원 병원장은 제자리를 서성이고 있었다. 천하대병원 병원장으로부터 도수가 다녀간 사실을 들었다. 동시에, 긴급 교수회의가 소집됐다는 소식을 받은 참이었다.

“그 자식이 천하대 이사장한테는 왜…….”

그는 참지 못하고 직접 응급실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를 발견하고 공손하게 인사하는 아무나 붙잡고 물었다.

“이도수 선생은?”

“오늘 오프입니다.”

“병원엔 안 왔나?”

간호사가 잘 모르겠는지 후임 간호사를 보았고, 그 눈길을 받은 간호사가 말했다.

“그게… 아까 간이식 수술 환자 보러 가신 것 같기도 한데… 확실한 건 아니고요.”

“고맙네.”

병원장은 다시 몸을 돌려 회복실로 갔다. 얼마 만에 진땀이 날 정도로 조급하게 돌아다니는 건지. 회복실 문을 열자 담당 환자를 체크하고 있는 도수가 보였다.

“이도수 선생.”

도수가 고개를 돌렸다.

“오셨습니까.”

얄밉게도.

당황하지도 않는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잠깐 나 좀 보지.”

“그러시죠.”

두 사람은 회복실을 나섰다.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병원장이 물었다.

“천하대병원에는 왜 갔지?”

역시 병원장은 아버지와 논문에 대해선 알고 있었지만, 어머니의 존재를 몰랐다.

그 순간 도수는 앞뒤 정황이 큐브처럼 맞춰졌다.

아버지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이사장이 보이는 반응을 봐선 부모님의 결혼을 반대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들의 행선지를 몰랐다는 것도 그 가설에 밑받침이 된다.

그래서 남몰래 식을 올리자마자 바로 다른 곳으로 떠났을 것이다.

이제야 모든 정황이 맞아떨어졌다.

‘그리고 또 하나.’

어머니의 존재를 모른다는 건, 아버지가 결코 병원장과 친분이 깊지 않다 의미였다.

친분이 깊지 않은 상대한테 평생을 받칠 각오가 되어 있는 논문을 맡긴다?

논문을 숨겼던 것도 그렇고.

아버지가 아닌 타의에 의해 병원장의 손에 들어갔을 확률이 컸다.

찰나의 순간 수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간 도수가 입을 열었다.

“소식 한번 빠르네요.”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지. 이도수 선생.”

병원장이 이름을 딱딱 끊어 부르는 게 영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앞으로 도수가 할 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지라, 그는 평온하게 제안했다.

“서로 하나씩 대답하기로 하죠.”

“뭐?”

“저도 무척 궁금한 게 있습니다. 제가 제 부모님과 관련된 일에 의문을 품는 건 이치에 어긋나는 게 아니니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여쭤보겠습니다.”

“지금 무슨…….”

“바티스타를 개량해 디씨엠 환자를 완벽에 가까운 확률로 치료할 수 있는 수술법을 제안한 논문을 왜 막으셨습니까?”

“……!”

“그 논문은 제가 이미 완성시켰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세계를 돌아다니며 완성시켰던 수술법보다 더 완벽한 수술법을 만들었고요.”

“네가 그걸 언제…….”

병원장은 말을 하다 말았다. 어찌나 놀랐는지 말이 헛나온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바티스타 수술에 적합한 환자를 찾아주겠다 약속했을 때까지만 해도 도수가 직접 시도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제대로 알아봐 줄 생각도 없었지만, 만약 제 발로 바티스타 수술을 받겠다는 환자가 온다 해도 성공확률이 높은 논문을 읽어본 것과 실제 수술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간이식과는 전혀 다른 부위와 방식의 수술.

“…그 말이 사실이라고 치자. 네가 그 수술을 할 수 있다고?”

“네. 이제 제 질문에 대답해주시죠. 왜 막으신 겁니까?”

“…….”

병원장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 도수가 말했다.

“제 존재를 알고도 논문을 주지 않으신 걸 보고 짐작했는데, 역시 일부러 숨기신 게 맞군요.”

“그건…….”

말을 잇지 못하자 도수가 덧붙였다.

“이유는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병원장님이 듣고 싶으신 부분에 대한 답변을 드리죠. 변수가 없다면 저는 천하대학병원 응급외상센터장으로 갑니다.”

“뭐……?”

응급외상센터장이라니?

천하대에서 타학교 인재를 전문의로 받아주는 것도 모자라, 과장급과 동급인 응급외상센터장에 앉힌단 말인가?

자신에게 그럴듯한 조건을 내걸었던 도수에 대한 배신감보다 당혹감이 앞섰다. 얼마나 놀랐으면 열도 안 받는다.

그야말로 벙 찐 병원장을 향해.

두 눈을 똑바로 직시한 도수가 말을 이었다.

“…그건 부차적인 이유였습니다. ‘왜 갔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천하대학병원 이사장님께서 제 할아버지라서 ‘할아버지를 만나러 갔다’는 대답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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