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천하대병원 이사장실.
도수는 할아버지와 2주 만에 마주 앉았다.
“…….”
후루룩.
차를 한 모금 들이킨 이사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 생각보다 빨리 왔구나.”
“약속한 2주가 됐으니까요.”
“간이식은?”
“제가 하는 수술이 간이식이라고 말씀드린 적 없는데.”
“…….”
“이미 아시잖아요?”
이사장이 피식 웃었다.
“그래, 축하한다. 수술은 너 혼자 했다고?”
“사정이 있었어요.”
“김 교수가 자리를 비웠겠지. 그 환자도 살았다더구나. 그날 두 사람이 둘을 살렸어.”
“정보력이 대단하시네요.”
“정보력이랄 것까지야. 전화 한 통이면 될 것을.”
은근히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한 이사장이 말을 이었다.
“빙빙 돌리지 말고 용건으로 들어가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도수가 말했다.
“지난번 제게 해주신 제안은 사양하겠습니다.”
“그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닐 테고.”
“다른 조건을 말씀드리죠.”
어느 정도 예상했던 걸까?
이사장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말해보거라.”
“천하대병원 응급외상센터장 자리가 공석이더군요.”
“돈이든 자리든 관심 없다면서?”
“관심이 있었다면 유명무실한 자리를 요구하진 않았겠죠.”
사실이었다.
아로대학병원과 달리 천하대병원은 응급외상센터가 제 역할을 못 하고 있었다.
다른 병원의 일반 응급실이나 크게 다른 점이 없는 것이다.
이유는 하나.
“적자가 큰 사업이다.”
“대신 저를 얻으실 길이 열릴 겁니다.”
이사장은 고요하게 눈을 빛내며 턱을 매만졌다. 돈도, 자리에도 관심 없는 도수가 응급외상센터장 자리를 내달라고 요구한 이상 천하대병원에 들어와서 해당 파트를 활성화시키겠다는 뜻일 터.
그는 좀 더 들어보기로 했다.
“천하대에서 응급외상센터를 해보려고 하는 이유는?”
“국내에 제 역할을 하는 권역외상센터는 경기권의 아로대학병원 한 곳뿐입니다. 그마저도 후원을 받아서 겨우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죠.”
“그걸 모르는 의료인은 없다. 병원도 이익집단인 만큼 적자 볼 걸 알면서도 시도하지 않을 뿐.”
“매일 사고 건수에 비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
“병원의 주된 목적은 다치고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겁니다.”
“영웅 대접을 받다 보니 진짜 영웅이라도 되려는 게냐?”
“의사로서 제 일을 열심히 하겠다는 겁니다.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자리에 서서요.”
“너 하나 얻자고 병원 재정의 손실을 감수해라…….”
“아로대병원 중증 외상센터장께서 발표하신 논문을 읽었습니다. 매년 병원 홍보와 내, 외관 설비에 드는 돈을 생각하면 큰돈이 아니더군요. 같은 돈을 병원 치장이 아닌 환자 구조에 쓰시라는 겁니다. 돈만 쓰시면 제가 직접 뛰겠습니다.”
나쁜 제안이 아니었다.
도수를 영입하는 것 하나만으로도 매년 지출하는 병원 홍보비를 대대적으로 감축할 수 있으니까.
고민하던 이사장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또 있을 것이다.
단순히 응급외상센터를 원했다고 보기에는 외상센터가 활성화된 아로대에서 천하대로 적을 옮기겠다는 동기가 약했다.
역시, 도수는 담담하게 다음 조건을 말했다.
“저 하나 말고, 저를 제외한 셋을 받아주십시오.”
“…이거야. 첫 번째 조건보다 더 터무니없군.”
이사장은 말과는 달리 잔잔한 표정으로 물었다.
“천하대병원 의료진 전원이 모교 소속이다. 그런데 타 병원 사람을 셋이나 받으라고? 강한 반대에 부딪칠 거야.”
도수도 예상한 바였다.
국내에서 천하의대의 입지는 독보적이다.
모교 출신 인재로만 구성해도 당당히 대한민국 최고의 병원 자리를 지키고 있는 현실에서 나오는 자부심이었다.
한데 도수는 그렇다 치고 타 병원 인재를 셋이나 들이라니.
이건 돈문제를 벗어난 자존심 문제였다.
물론 도수는 이에 대한 대답도 준비되어 있었다.
“중증 외상센터의 독립성을 인정할 생각이라고 설득해 주세요. 김광석 교수님을 모실 생각입니다.”
이사장의 눈이 커졌다.
독립성을 인정해 달라. 이건 다시 말해 중증 외상센터 인력들이 치외법권에 속한다는 뜻이 된다. 언뜻 들으면 좋은 말 같지만, 병원 내 정치력에 어떤 영향력을 받지 않고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너야 대놓고 영달에 관심이 없다고 했으니 그렇다 치자. 지금보다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사라지는데 누가 자원하겠느냐?”
“저와 같은 사람들.”
도수가 빙그레 웃었다.
“저는 앞으로 그런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이쯤에서 병원장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뭘 하려고?”
“그건 밝힐 수 없지만 제가 무언가를 한다면, 그건 병원에 이익이 되는 쪽일 겁니다.”
이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독립성을 인정하는 한해 김광석 같은 중증 외상의 권위자를 섭외할 수 있다. 이건 병원 중역들을 설득할 강력한 승부수가 될 터였다. 김광석은 기존에도 국내에서 유명했고, 도수를 살려서 데려온 일로 더 유명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그보다 더 유명한 도수를 영입하는 순간, 천하대병원은 환자를 빨아들이는 진공청소기가 될 터였다. 국내 의료계가 천하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좋다. 최대한 힘써보마. 그럼 한 명은 김광석 교수고 나머지 둘은 누구를 데려올 생각이지?”
“함께 손발을 맞췄던 사람들이요. 아로대학병원은 주기적으로 내전 지역에 의료봉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주로 중증 외상센터의 골칫거리들이 반강요식 권유를 받게 되고요.”
내보낼 명분은 충분하다.
애초에 내전 지역이면 중증 외상 환자가 절반이 넘을 테니까.
“그런데?”
“그래서 제가 하려는 일에 적합합니다. 그 사람들은 굳이 높은 곳까지 계단을 오를 생각이 없을 테니까요. 그들은 계단을 내려가 환자를 살피는 사람들입니다.”
이사장은 ‘그래서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이 뭔데?’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불과 열아홉 살짜리 소년이 아로대병원과 천하대병원을 양손에 쥐고 흔들며 어디를 자기가 원하는 일에 무기로 삼을지 저울질하고 있었다. 이 고약한 손자가 스스로 말하고자 않으면 누구도 대답을 듣지 못할 것이다.
그리 여긴 이사장이 대답했다.
“얼추 구색은 갖췄구나. 약속은 지킬 테니 더는 저울질하지 말아라. 이 이상 애를 태웠다간 그땐 이 할아비가 모진 고초를 겪고 찾아온 혈육을 마다할 수도 있으니.”
“아직 안 끝났는데요.”
“뭐?”
“마지막입니다.”
도수는 품에서 두툼한 서류 봉투를 꺼냈다.
“일단 이걸 먼저 보시죠. 제 아버지의 논문입니다.”
“찬이의?”
“네.”
이사장은 서류 봉투에서 논문을 꺼내 한 차례 훑었다. 한번 훑는 데만 해도 삼십 분 가까이 걸렸다. 그사이 도수는 묵묵히 차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검토가 끝났을 때, 이사장의 잇새로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세계를 돌아다녔구나. 둘이서.”
논문은 바티스타 수술에 대한 것이었다.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수술이 필요한 환자에게 수술을 하고 성공 사례들을 기록한 논문이었다.
도수가 읽어본 바로 바티스타 수술은 그 역시 당장 성공을 장담하기 힘들 정도로 난도가 높은 수술이었다. 그런 수술을 수차례 성공시킨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대단한 의술을 가진 의사이자 환상적인 한 팀이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사장이 재차 입을 열었다.
“네 부모는 국내뿐 아니라 세계 어디서도 보기 힘든 의술을 가진 굉장한 의사들이었다. 너처럼 개인의 영달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지. 오직 환자 생각만… 그래서 내 욕심을 모두 내쳤어. 난 네 엄마가 이 병원을 맡아주길 바랐다. 다른 남매들보다 네 엄마가 남아주길 바랐어.”
지금껏 수많은 타인의 감정을 접해왔던 도수는 이사장 목소리에 벤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깊은 슬픔과 한 스푼의 배신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돌아왔구나. 내 그리 미래가 아닌 현실을 살라고 했건만.”
도수를 대할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물론 도수보단 이사장이 갑자기 나타난 가족을 더 애틋하게 생각하겠지만, 자기 손으로 먹이고 재워가며 키운 자식만 못했다. 특히 이사장처럼 이성적인 사람에게는.
물론 도수도 그런 사감을 바라지 않았다.
“저는 자식으로서 그 미래를 완성시킬 겁니다.”
“바티스타 수술… 말이냐?”
“완전해진 바티스타 수술을요.”
“…….”
“이건 한 가족으로서의 부탁이기도 합니다. 바티스타 수술이 필요한 디씨엠(Dilated cardiomyopathy: 확장성 심근병증. 약칭 DCM) 환자들을 끌어모아 주세요.”
“…그랬다가 한 번이라도 실패가 생기면 그 순간 끝이다. 너뿐만 아니라 이 병원 전체가 구설수에 오를 거야.”
“이 병원에는 쓰리디 바이오 시뮬레이터가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쓰리디 바이오 시뮬레이터(3D Bio Simulator).
환자의 인체 일부분을 3D 모형으로 구현해 내 의사들이 수술 연습을 할 수 있게끔 해주는 기계였다. 매 순간 실전인 의사들에게나 수술을 받는 환자들에게는 굉장히 메리트가 큰 의료기계였지만 단점은 비싸다는 것.
천하대병원에는 그 기계가 있는 것이다.
오직 천하대병원만 갖추고 있는 제품이기도 했다.
“몇 번을 연습하든 성공을 장담할 수 있는 수술이 아닐 텐데.”
“초기에 발견하면 다행이지만 증상이 나타나면 오 년 내 사망률 오십 퍼센트입니다. 바티스타 수술이 성공을 거듭할수록 언제 어느 때 심장이 멈출지도 모른 채 시한부 삶을 살던 환자들이 마음 놓고 살아갈 수 있게 된단 뜻이죠. 앞으로 생겨날 디씨엠 환자들도 그 수술을 받고 건강하게 회복할 테고요. 이로 인해 바티스타 수술의 성공확률이 증명된다면 천하대병원은 세계적으로 손에 꼽히는 병원으로 도약할 수 있을 겁니다.”
도수 말은 틀린 구석이 없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인 셈이다.
게다가 이사장이 읽은 도수의 아버지 ‘이찬’의 논문은 근거가 탄탄했다. 왜 발표되지 못하고 묻혔는지 납득이 가지 않을 만큼.
“이 논문이 왜 네게 있는 게냐.”
“아버지가 전에 근무하셨던 아로대학병원 병원장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논문과 관련이 있는 병원장과 정형외과 과장이 이 논문을 숨기려 하는 걸 응급실 레지던트가 제게 몰래 건네주었습니다.”
“그건 내가 알아보도록 하마. 그리고 아마 내 직권으로 네게 디씨엠 환자들을 몰아주게 되면 외과 쪽에서 난리가 날 거야. 흉부외과는 더할 테고. 명분이 필요하다.”
“제가 밝힐 겁니다.”
이사장이 눈을 치떴다.
그러자 도수가 덧붙였다.
“이 논문. 그리고 제가 할아버지 손자라는 것, 모두 다요.”
“…우리 병원에 오길 망설인 이유 중 하나가 나와의 관계가 밝혀지면서 ‘다시 한번 시끄러운 소란에 휘말릴까 봐’였던 걸로 아는데.”
“이젠 괜찮아요.”
간단히 대답한 도수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할아버지 제안을 한 번에 수락했다면 그건 말이 나올 여지가 있었습니다. 모든 조건에 명분이 부족했으니까요. 그렇다는 건 결국 제가 할아버지께 빚을 지게 되는 거죠. 빚은 갚아야 합니다. 만약 빚을 진 상태에서 제게 병원경영에 관련된 일을 덜컥 맡기셨다면 전 거절하지 못했을 거예요.”
“이제는 아무런 빚이 없다?”
“…아로대학병원에서도 할아버지가 제안하셨던 것과 동일한 조건과 바티스타 수술에 관한 조건을 허락해 줬으니까요.”
“바티스타 수술에 관한 것도?”
“네. 아군은 가까이 두고 적은 더 가까이 두고 지켜본다. 뭐 이런 거겠죠. 만약 거절하면 저는 다른 곳으로 갈 테지만 아로대는 그들의 세상이니까. 제가 딴 마음 먹어도 뜻대로 못하게 막을 수 있다고 여겼을 테고요.”
도수는 간암 말기 환자의 수술결과를 확인한 날, 병원장에게 같은 제안을 던졌던 것이다.
병원장은 덥석 물었지만.
도수는 대답을 미룬 채 천하대병원에 찾아왔다. 아로대에서 같은 조건을 허락한 이상 천하대병원에서 하는 제안은 혈육 간의 사적인 감정이 아닌, 합당한 제안이 되는 셈이다.
단숨에 이런 상황을 이해한 이사장은 눈을 빛내며 도수를 응시했다.
왜일까?
이 순간.
돈과 지위에 관심 없는 놈에게 더 많은 걸 쏟아붓고 싶어지는 이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