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맞불
“이도수 선생님이시죠?”
인포를 지키고 있던 병원장 비서가 물었다. 그녀 정도 직책쯤 되면 병원 내 모든 임직원들의 용모나 신상명세는 기본으로 파악하고 있을 터였다.
“맞습니다.”
“약속되신 건가요?”
“아뇨. 급한 일입니다.”
“잠시만요.”
그녀는 크고 두꺼운 문 안쪽에 있을 병원장에게 인터폰을 쳤다.
“원장님. 이도수 선생님 오셨습니다.”
-무슨 일로?
“급한 일이시랍니다.”
-들여 보내세요.
허락이 떨어지자 비서가 손을 뒤집어 문 쪽을 가리켰다.
“들어가시죠.”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인 도수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널찍한 병원장실.
꼭대기 층의 절경을 등에 업은 병원장이 책상에 앉은 채로 고개를 들었다.
“오랜만이군, 이도수 선생.”
“네.”
“좀 앉지.”
도수는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러자 보고 있던 결재 서류에 사인을 한 병원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도수 맞은편에 엉덩이를 붙였다. 마저 다리를 꼰 그가 물었다.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습니다.”
“두 번씩이나 연달아 수술을 했는데 괜찮을 리가.”
역시.
병원장은 이제 출근했음에도 간밤 일을 모두 알고 있었다.
도수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두 번밖에’죠. 라크리마에선 때때로 훨씬 더 많은 환자들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력이 있나 보군.”
빙그레 웃은 병원장이 물었다.
“그래, 아침부터 내 방엔 무슨 일이지?”
도수는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방금 전 응급실로 기자들이 난입했습니다.”
“그걸 보고하러 온 건 아닐 테고. 자네가 그 기자들 보고 천하대병원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고 얘기했다지?”
“……!”
정말이지 모르는 게 없다.
병원 어디든 병원장의 눈과 귀가 있다는 말이 공연한 헛소리는 아닌 듯했다.
“…맞습니다.”
“그래서 공론화되기 전에 미리 알려주러 온 건가? 그게 무슨 별일이라고, 그렇다면 공연한 걸음을 한 것 같은데 말이야.”
병원장이 시치미를 뚝 떼자.
도수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제가 이 병원에 남길 바라시지 않습니까?”
병원장이 그를 빤히 쳐다봤다.
“…당연한 얘길. 설마 천하대병원을 마다하고 우리 병원으로 온 사람이 스카우트 제의에 응하겠어? 아니면 이제 와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건가?”
“천하대병원에선 저한테 전문의 자격을 주겠다더군요.”
“전문의 자격을?”
지금껏 아무런 질문도 동요도 드러내지 않던 병원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애가 탈 것이다.
병원장은 같은 약속을 못 할 테니까.
만약 다른 인턴이나 레지던트였다면 수년의 과정을 생략하고 ‘전문의’를 주겠다는 말에 혹해서 뒤도 안 돌아보고 병원을 옮겼을 것이다.
하지만 도수는 여느 인턴이나 레지던트가 아니었다.
“전 감투를 바라지 않습니다. 인턴을 거치면서 여러 과를 돌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제가 잘 모르는 분야까지 섭렵하는 게 제 목표입니다. 그래야 한 명이라도 더 치료할 수 있을 테니까.”
새벽 뇌출혈로 사망한 애 엄마가 떠올랐다. 도수가 만약 중증 외상만큼 신경외과 수술에 조예가 깊었다면 시도라도 해봤을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두 손 놓고 잃는 수밖에 없었다.
다신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 결연한 의지가 눈빛에 언뜻 내비친 걸까?
병원장이 물었다.
“감투도 관심 없다는 사람이 여기까지 찾아와서 얘기하는 건 내게 다른 원하는 게 있어서겠지?”
“네.”
도수는 부정하지 않았다.
“얘기해 봐.”
“주치의가 되고 싶습니다. 진료도 하고 수술 집도도 할 수 있도록 공표해 주세요.”
“…….”
병원장은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며 되물었다.
“이미 김광석 교수 허락하에 그러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공개적인 지침이 없으면 딴지 거는 이들이 생길 겁니다. 정규 수술팀을 꾸릴 수도 없고요. 수술방에 손님이 될 뿐 주인이 될 수는 없죠. 더 중요한 건 수술 후 환자를 끝까지 책임질 권한이 없다면 환자에게 아무 약속도 할 수 없습니다.”
“공개적인 지침을 통해 특권을 달라?”
병원장이 표정을 찌푸린 채 고개를 들었다.
“이건 내 권한을 벗어나는 일이야.”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다른 방법?”
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며칠 후면 간이식 수술이 잡혀 있습니다. 집도의는 중증 외상센터장. 저도 참여하기로 과 내에서 얘기가 끝난 상태입니다.”
“민혁찬 과장이 주치의였던 환자를 말하는 거구만.”
“네.”
“민 과장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자존심 빼면 시체인 사람이.”
아니.
이미 가만히 있지 않았으니 병원장이 이 환자에 대해 소상하게 알고 있는 것일 터.
도수는 알면서도 모른 척 말했다.
“그 수술을 공개 수술로 돌려주십시오.”
병원장의 주름이 더 깊어졌다.
“그러다 실패하면?”
“병원 이미지에 타격을 받겠죠.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저도 끝입니다. 라크리마에서의 수술은 단지 운이 좋았다. 실력은 모두 거품이었고 살인자나 다름없다고 모두가 비난할 겁니다.”
“자네와 센터장 어깨에 병원 이미지를 걸어라?”
“네. 성공한다면 전례 없는 빅이슈가 될 테니까요.”
“그렇겠지.”
모두가 포기한 환자다.
이쪽 계통의 권위자인 민혁찬이 그러한 판단을 내렸다면 백 명 중 아흔아홉은 같은 판단을 할 것이다.
시한부 선고.
그렇다는 건 만약 수술을 통해 살려냈을 때 반향도 더 크다는 의미였다.
그 점을 상기시킨 도수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되면 제가 요구했던 것들을 교수회 안건으로 올려주십시오.”
이제 절차에도 맞는다.
하지만.
“자네 요구 사항이 교수회에서 통과될 거라고 확신하나?”
불안할 만도 한데, 도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개 수술을 한다는 건 제 수술을 모두가 본다는 뜻이겠죠. 민혁찬 교수님은 물론 모든 외과의들이 포기한 수술을 성공시킨 후에도 저를 ‘인턴’이란 이유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 병원에 미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수회에서 부결될 경우 스스로 나가겠다는 뜻이다.
잠시 두 사람의 시선이 얽히고.
병원장이 말했다.
“좋아. 나도 궁금하군 그래. 과연 모두가 고개를 내젓는 수술을 성공시킬 수 있을지.”
“성공할 겁니다.”
도수가 간결하게 대답했다.
너무 쉽게 들려서 병원장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두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리 자신하니 교수회에서 통과가 됐다 치고. 특권을 주면 우리 병원에 뼈를 묻을 텐가?”
그 역시 대놓고 표현은 안 해도 도수를 탐내고 있었다. 그저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말을 아낄 뿐.
그런 마음이 있으니 인턴이 수술하는 것도 좌시한 것이다.
하긴, 아로대학병원 세 배에 달하는 의료진 수, 매년 열 배가 넘는 논문을 발표하고 있는 천하대병원에서도 탐을 내는 마당에 아로대병원이 탐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도수는 그리 쉬운 남자가 아니었다.
“그건 확답할 수 없습니다. 제 요구조건이 교수회에서 통과돼 봐야 천하대병원과 동등한 조건일 뿐이니까요.”
“이거 아주 어이없는 자식이네.”
병원장의 눈빛이며 어조가 완전히 바뀌었다.
그럼에도 도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잠시 도수를 노려보던 병원장은 얼굴을 찌푸린 채 물었다.
“다른 원하는 게 있으면 얘길 하지?”
“그 얘긴 수술 끝나고 하시죠. 돈이나 지위를 바라진 않을 겁니다.”
“…아주 건방진 놈이야.”
병원장은 혀를 차면서도 머리를 굴렸다.
돈도 아니다. 지위도 싫다.
그럼 대체 뭘 원한다는 걸까?
‘하긴, 돈이나 지위를 원하는 놈이면 진즉 천하대로 갔겠지.’
병원장은 오기가 생겼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도수를 내치고 싶었지만 한 가지 욕망이 발목을 붙잡았다.
지금 자신이 대한민국 첫손가락에 꼽히는 천하대병원을 상대로 경쟁심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대단한 천하대병원에서도 무리를 감수하고 데려가려는 도수.
그런 도수를 데려올 수만 있다면, 어쩌면 한 분야 정도는 천하대병원을 이겨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승부욕이 솟구쳤다.
‘그렇게만 되면 병원장 연임도 유리해질 테고…….’
태도가 건방지긴 해도 도수의 제안은 손해 볼 게 없는 장사였다.
병원장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좋아. 간암 사 기 환자 수술은 공개 수술로 진행하지. 만약 수술에 성공한다면 요구 사항은 모두 들어주겠어.”
“약조의 의미로 하나만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뭐야, 또?”
병원장이 신경질적으로 묻자.
도수가 덧붙였다.
“오늘 제가 수술한 환자들은 직접 돌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붕괴 사고가 있던 날부터 도수를 대하는 응급실 식구들의 태도는 백팔십도 바뀌어 있었다.
콜을 하기 위해 스테이션에 가면 오더를 내고 있던 레지던트인 이시원이 조용히 전화기를 들었다.
“어디?”
“…정형외과요.”
도수는 과한 대접이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응급실 식구들 입장에선 어쩌면 당연했다.
센터에서 오직 김광석만이 가능한 수술들을 척척 해내는 인턴이라니.
도수는 더 이상 인턴이 아니었다.
같은 인턴인 임재영 역시도 같은 생각이었다.
“도수야. 나중에 시간 날 때 스터디 좀 도와주면 안 될까?”
묻는 태도가 묘하게 조심스럽다.
교수님한테 질문하는 것보단 가볍지만 동기를 대하는 태도는 결코 아니었다.
도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죠.”
“고, 고맙다!”
백팔십도 안색을 바꾸며 화색을 띠는 임재영.
“내가 네 시간에 맞출게. 무조건! 오프 때도 괜찮으니까 시간만 알려줘!”
“굳이 그렇게까지…….”
인턴에게 오프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시간.
도수가 중얼거렸지만 임재영은 이미 얼굴이 벌게져서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임재영과 같은 인턴에게 도수는 우상이나 원동력이 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던 강미소는 피식 웃었다.
“하여간…….”
그녀는 얼마 전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일을 경험했다.
도수가 정말 병원장에게 가서 담판을 짓고 주치의 자격을 따온 것이다.
도수가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엄두조차 못 낼 일이었다.
이런 식으로 뱉은 말을 다 실현시키는 도수의 추진력. 그리고 가공할 수술 실력은 응급실의 분위기를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오죽하면 그동안 병원 내 압력을 홀로 견뎌야 했던 김광석조차 도수가 사고 치는 걸 즐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예전엔 조마조마했던 도수의 행동에 내성이 생겼는지, 그를 보는 이들까지 덩달아 간덩이가 불어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도수와 함께 지내는 응급실 식구들이 받는 긍정적 영향.
반면 부정적인 시선도 있었다.
김광석 교수와 사이가 좋지 않은 타과에서 호시탐탐 건수를 잡으려 애썼던 것이다.
물론 도수는 그런 걸 신경 쓸 겨를도 없었지만.
그는 인턴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며 나머지 시간을 간이식과 임파선 절제를 공부하는 데 쏟기도 바빴다.
아는 건 다시 확인했고, 새롭게 등재된 지식이 있으면 기존 지식을 업데이트했으며, 모르는 부분은 알고 있던 부분보다 더 깊게 파고들었다. 그 과정에서 인턴, 레지던트들과 함께 스터디를 하기도 했다.
안 그래도 휴게 시간이 아예 없다시피 한 응급실 생활 가운데서도 잠을 줄여가며 간암 말기 환자의 수술을 준비하길 총 2주.
마침내 대망의 날 아침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