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상황은 끝나지 않는다
순간 차가운 인상이 해빙되며 미소가 떠올랐다.
“너 걔지? 라크리마에서 왔다는 애.”
“네.”
“김 교수님 말씀처럼 제법이다, 얘.”
“감사합니다.”
“인턴이 어시스트 서면서 어떤 수술을 했는지, 어떤 항생제를 처방했는지까지 정확히 파악해서 얘기하긴 쉽지 않거든. 응급실 애들은 다 이렇게 똘똘한가?”
피식 웃은 그녀가 막 봉합을 끝내고 다가온 이시원을 눈짓했다.
“레지던트 2년 차가 이렇게 어려운 수술을 다 하고. 아주 훌륭해.”
그녀는 도수가 이 모든 일을 해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하는지 아주 확신을 하고 있었다.
도수는 말해봐야 귀찮은 일이 생길 걸 알기에 별말을 하지 않았지만 레지던트 이시원의 입까지 막진 못했다.
“교수님, 사실… 제가 아니라 이도수 선생이 했습니다.”
얼씨구.
말끝마다 인턴, 인턴 야지를 주더니 이젠 이도수 선생이란다.
그러나 이유리는 선뜻 알아듣지 못했다.
“뭘 해?”
“이도수 선생이 수술을 했습니다. 비장적출, 제왕절개, 처방까지… 모두 이도수 선생이 했습니다. 김광석 교수님의 허락하에 환자를 살린 겁니다. 여기 이 선생이요.”
이시원의 한쪽 얼굴 근육이 씰룩였다.
자, 보라고.
우리 외상센터 인턴은 이 정도라고.
이제는 자랑 비슷한 걸 하고 있는 것이다.
‘이래도 되나?’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죽을 날이 됐다는 뜻이라던데.
도수는 지금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
한편 이시원과 도수를 번갈아 쳐다본 소아과 교수 이유리는 혼란스러운 표정이 됐다.
‘정말 얘가 수술을 했다고? 인턴이?’
황당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지만 놀랍게도 그녀는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의학저널을 통해 공개된 도수의 수술 장면이 떠오른 것이다. 레지던트 2년 차인 이시원은 정확한 수준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미국에서 공부할 때 소아외과를 전공했던 이유리는 도수가 했던 외과 수술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수술 자체도 힘든 수술이었고 귀신같은 손놀림도 편집된 거라는 착각이 들 만큼 놀라웠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건 소생 가능성이 희박한 환자를 살려냈다는 결과였다.
그래서 그녀는 추궁하는 걸 보류했다.
“…일단 이 문제는 나중에 얘기하자. 둘 다 빨리 응급실로 내려가 봐.”
“알겠습니다!”
이시원은 도수의 손목을 잡아끌며 수술실을 나섰다. 두 사람이 함께 복도로 나와 고개를 돌린 순간.
이시원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이게 다 뭐야?”
열 개가 넘는 수술실에 일제히 초록색 불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수술 중이라는 뜻.
새벽 네 시에 흔히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곁에 있던 도수가 입을 뗐다.
“…빨리 가죠.”
고개를 끄덕인 이시원은 도수와 함께 응급실로 내려왔다.
바로 그때.
사복에 대충 가운만 걸친 응급의학과 교수 양진명이 이시원을 발견하고 말했다.
“시원이는 나랑 수술 들어가자. 인턴, 넌 응급실에서 대기하고.”
왜인지 도수 눈치를 본 이시원이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환자 상태는 가면서 설명해 줄테니까…….”
양진명과 이시원이 멀어지자 홀로 남은 도수는 응급실을 둘러봤다.
또 한 명의 환자가 스트레쳐카에 실려 들어오고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어린아이였다.
“선생님!”
구급대원이 외쳤다.
그 순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연이어 한 사람이 더 실려 왔다.
차르르르르륵!
“아이 어머니입니다!”
그녀 역시 방금 전 아이처럼 피투성이였다.
샤아아아아아아.
투시력이 발현되고.
“환자분, 여기가 어딘지…….”
도수는 말을 멈췄다.
두개강 안쪽의 심한 출혈.
붉은 핏물이 뇌를 절반 가까이 물들이며 압박하고 있었다.
이미 출혈이 이 정도 진행됐다면 생존할 수 있는 경계선을 넘은 것이다.
순간 환자가 간신히 한 단어를 뱉어냈다.
“…유빈…….”
아이 이름을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꽈악.
도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미 불가능한 수술을 여러 차례 성공했던 그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아이 엄마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머릿속으로 부모님을 잃던 순간이 떠올랐다.
‘지금이나 그때나… 똑같다……!’
“유빈… 유빈…….”
생명의 불씨가 꺼져가고 있었다.
꺼져가는 와중에도 계속 아이 이름만을 반복하는 어머니.
그리고 아이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외쳤다.
“엄마아… 으아앙! 엄마……!”
피 묻은 작은 손이 도수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당장이라도 놓칠 듯이.
“살려주세요……! 엄마! 살려주세요……!”
“…….”
난생처음 경험해 보는 참기 힘든 고통을 겪고 있을 아이. 불과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아이가 자기 몸보다 엄마를 걱정하고 있다.
그리고 어머니는 죽음의 그림자가 완전히 그녀를 뒤덮은 상황에서조차 아이 이름을 부르며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도수는 다시 어머니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드님은 제가 반드시 치료하겠습니다.”
아마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들리지 않을 걸 알았음에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한 도수는 그녀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아이의 상태를 살폈다.
샤아아아아아.
“살려… 주세요…….”
아이의 간절한 애원이 비수처럼 가슴을 파고들었지만, 그는 최선을 다했다. 라크라마에서 그러했듯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여러 차례 겪는 상황임에도 그는 전혀 적응이 안 됐다.
‘…이런.’
아이 쪽도 상태가 안 좋긴 마찬가지였다. 아이 엄마만큼은 아니지만 당장 응급수술이 필요한 상황이다.
일단 왼쪽 가슴 속 갈비뼈가 골절되면서 왼쪽 폐를 찔렀다. 폐가 찢어져 혈흉이 생겼고, 간도 파열된 상태였다. 팔꿈치와 무릎관절의 출혈은 그에 비하면 사소해 보일 정도였다.
문제는 출혈.
도수는 뭔가 이질적인 느낌을 받았다.
‘너무 빨라.’
기하급수적으로 피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심각한 외상 환자를 수도 없이 봐왔던 도수이기에 남들은 느끼지 못할 출혈량을 직감할 수 있었다.
‘다친 정도에 비해…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출혈량이다.’
숱한 경험과 예리한 감각을 가진 의사들조차 수술을 할 때만 눈치챌 수 있는 부분.
하지만 도수는 투시력으로 즉시 알아채고 간호사에게 말했다.
“바로 씨티 찍을게요.”
투시력으로 판단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이동식 씨티로 검사부터 지시했다.
그리곤 막 엘리베이터에서 나오고 있는 인턴 동기 임재영에게 외쳤다.
“여기!”
쓰러질 듯이 구부정하게 기어 나오던 임재영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도수가 손짓했다.
“저건 또 왜 부르고 지랄이야… 같은 인턴끼리.”
안 들리게 중얼거린 임재영이 투덜거리면서도 달려왔다. 한눈에 봐도 도수 앞에 있는 환자들 상태가 위중해 보였기 때문이다.
임재영은 애 엄마를 보자마자 물었다.
“뭐 하는 거야? 당장 씨피알 안 하고……!”
도수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사망했다는 뜻.
임재영이 부르르 몸을 떨자, 그가 덧붙였다.
“이쪽부터.”
아이가 들을까 봐 최대한 말을 아꼈다.
임재영은 눈치 빠르게 대처하며 물었다.
“…뭘 하면 돼?”
“응고선별검사랑 혼합검사, 혈소판 수치 검사요.”
“바로 의뢰할게.”
고개를 끄덕인 도수가 말했다.
“그리고 피 주머니 최대한 많이 받아다 주세요.”
“최대한 많이? 몇 개나…….”
“있는 대로 다요.”
“있는 대로?”
고개를 끄덕인 도수가 상상만 해도 아찔한 선고를 내렸다.
“이 아이, 헤모필리아(Hemophilia: 혈액응고장애)일지도 모릅니다.”
“혀, 혈우병?”
“네.”
임재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시간이 많다면 혈우병 유형을 검사하고 그에 맞춰 부족한 응고인자 농축액을 주면 되겠지만 지금은 응급상황.
수술을 미룰 수도 없었다.
역시나 도수는 한마디 덧붙였다.
“전 일단 아이 데리고 수술방으로 올라가겠습니다.”
“우리 같은 인턴이? 수술실에서 수술방 어레인지(Arrange: 수술방을 잡는 일)도 안 해줄 텐데…….”
“그건 제가 알아서 해볼게요. 서두르시죠. 여기 이 환자 수술실로 옮기겠습니다!”
간호사를 불러 모은 도수는 즉시 아이가 누워있는 스트레쳐카를 밀며 엘리베이터 앞에 있는 스테이션으로 내달렸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임재영 역시 이미 숨이 끊긴 아이 어머니를 일별하곤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려준 뒤 오더받은 일을 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에게는 누구의 오더인지, 지금 그 말에 따라하는지 선택권이 없었다.
***
‘출혈이 심해.’
아직 추가 혈액이 오지 않은 상황.
표준량보다 더 많은 혈액을 공수하기 위해선 검사 결과가 나와야할 터였다.
삼십 분 정도 시간이 걸린다는 뜻이다.
아이를 응시하던 도수는 그동안 공부한 지식을 떠올리며 간호사에게 말했다.
“검사 결과 나올 동안 동결침전제제(Cyroprecipitates) 이십 유닛 해동 준비해 주세요. 그리고 세프트리악손(Ceftriaxone) 영 점 사 그램 주시고요.”
임시방편이었다.
동결침전제제에는 응고인자 성분이 모두 포함돼 있기 때문에 혈우병 유형이 어떻든 일단 출혈을 막아줄 수 있는 것이다.
“일단 수술 시작하고 출혈이 멈출 때까지 계속 수혈할 겁니다.”
통보한 도수는 수화기를 들어 소아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일전 수술방 앞에서 만났던 이유리가 전화를 받았다.
-소아과입니다.
목소리를 확인한 도수가 말했다.
“응급실 인턴 이도수입니다. 소아외상 환자입니다. 환자 신상은 파악 안 되고 혈우병 의심됩니다. 검사 의뢰 해둔 상태고 혈흉, 간 파열, 팔꿈치와 무릎관절에 출혈 있습니다.”
-뭐? 바로 사진 보내!
“지금 보냅니다.”
딸각.
도수는 확인도 않고 보냈다.
그리고 역시, 투시력으로 봤던 것과 일치하는 소견이 나왔다.
-바로 응급수술 들어가야겠는데?
“네.”
-난 지금 못 가. 응급실에 누구 있어?
이곳저곳을 구분하지 않고 병원 전체가 붕괴사고 환자들에게 집중돼 있는 상황이다.
아마 소아과도 이쪽만큼 분주할 터.
도수가 대답했다.
“아무도 없습니다. 중증 외상센터에 배정된 수술실 모두 수술 중입니다. 제가 수술 들어갈 테니 수술방 어레인지해 주십시오.”
-뭐?
인턴을 믿고 수술시키는 것도 모자라 소아과 수술방까지 내놓으란다. 그 말인즉 자신을 믿고 소아과로 환자를 돌린 뒤 수술실까지 빌려달란 뜻이다. 만약 환자가 잘못되면 응급실과 소아과, 두 과 공동의 책임이 될 터였다.
너무도 뻔뻔한 요청에 이유리 교수가 물었다.
-젠장, 왜 우리야? 소아외과 수술은 해봤어?
“네, 수도 없이.”
-…….
비록 그녀가 물어봤다 해도 다른 인턴이 이렇게 대답했으면 욕을 한 바가지하고 끊었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인턴이라도 도수는 달랐다.
-아까 수술. 김 교수님이 허락하신 거 확실하지?
잠시 망설이는 이유리.
“네. 확실합니다.”
도수가 대답하자, 그녀는 굳게 결심한 어조로 말했다.
-어레인지해 줄 테니까 환자 무조건 살려.
“살리겠습니다.”
확고한 대답.
이유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 일단 끊어.
뚝.
전화가 끊어지고 잠시 후.
다시 벨이 울렸다.
도수가 전화를 받자마자 이유리가 말했다.
-됐어. 근데 우리 수술방이 빈 줄은 어떻게 안 거야?
아마 인턴인 도수가 어레인지를 요청했다면 마취과 소속 수술실 코디네이터가 기겁을 했을 것이다. 절대 안 된다고 했겠지. 스트레쳐카에 누워 있는 환자에게 시선을 돌린 도수가 대답했다.
“아까 수술하고 나왔을 때, 빈 수술실 다 체크해 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