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파격 대 파격
약속한 오 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에 도수가 말했다.
“오 분 더 내죠.”
이사장이 회심의 미소를 짓는 순간.
도수가 다시 한번 예상을 뒤엎었다.
“2주만 주세요.”
“2주?”
“네.”
“왜지? 네가 원하는 걸 모두 충족시킨 조건인데.”
“입에 단 음식은 이를 썩게 만들죠.”
당장 맛볼 달콤한 음식보단, 음식을 맛볼 이빨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호의의 본질을 못 믿겠다?”
“못 믿는 건 아닙니다.”
“그럼?”
“조심하는 거죠. 약인지 독인지.”
“하.”
“전 번복도, 후회할 짓도 안 하는 편이라.”
이사장은 헛웃음이 나왔다.
‘이 녀석이 내 손자라고?’
이제 열아홉 살이다. 평범하게 살았다면 한창 학교에 다닐 나이. 한데 예리한 협상가를 상대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나만 묻자.”
“말씀하세요.”
“왜 하필 2주냐?”
이미 협상 테이블에 앉은 이상 한마디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이사장을 응시한 도수가 대답했다.
“2주 뒤 환자 수술이 잡혀 있습니다.”
“인턴이 무슨 수술?”
“제가 참여하기로 했거든요.”
이사장은 직감했다.
‘외상센터장.’
김광석이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게 확실해졌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결정에 뜸을 들이는 이유가 부족했다. 이쪽은 훨씬 더 탐스러운 제안을 던졌으니까.
“어차피 네 환자는 아닐 테고.”
“아뇨.”
도수는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본 환자는 모두 제 환자죠. 주치의가 누구든 상관없이.”
“의사로서 올바른 책임 의식이다. 하지만 엄연히 주치의가 있는 이상 인턴 신분의 네가 개입할 여지는 없을 거야.”
이런 식으로 다시 한번 손짓했다. 인턴이 아닌 전공의로 인정해 줄 테니 천하대병원으로 오라고.
그러나 도수에게는 씨알도 안 먹혔다.
“인턴은 신분이 아닙니다. 사회적 지위와는 무관한 직급일 뿐이죠. 그리고 저는 2주 뒤 수술할 환자의 보호자를 만나서 얘기했습니다. 최선을 다하겠다고.”
이사장은 도수의 두 눈을 빤히 바라봤다. 보호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옮기면 되지 않냐는 말 따윈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승부수를 던졌다.
“좋다. 트랜스퍼(Transfer: 다른 병원으로 환자를 이송하는 것)시켜 주지.”
“환자 상태가 안 좋습니다.”
“특별히 헬기를 동원해 주마. 환자나 보호자 동의만 받으면 된다.”
도수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왜 이렇게까지?
손자라서?
그건 아닐 터였다.
만약 혈육이라서 움직이는 거라면 처음부터 이사장으로서 조건을 제안하는 게 아니라 할아버지로 다가왔을 것이다.
“주치의께서 트랜스퍼를 동의하실까요?”
“전화 한 통이면 된다. 아로대학병원 병원장한테 직접 얘기하지. 부담이 큰 환자라면 더 넘겨받기 쉬울 테고.”
도수는 그 말이 허언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특히 환자가 간암 말기 환자라면 아로대학병원에선 땡큐를 외칠 일이었다.
하지만 이직 트랜스퍼를 결정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남아 있었다.
“해당 환자와 보호자는 이미 이 병원에서 1차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다음 이식이 필요해서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입니다. 마음의 준비도. 이런 상황에 환자의 환경을 다시 바꾼다? 환자가 느끼는 불안감은 증폭되고 신뢰는 떨어질 겁니다.”
“국내 최고의 병원에서 최고의 의료 서비스를 지원하겠다는데 신뢰가 떨어진다?”
도수는 피식 웃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무슨 뜻이냐?”
“할아버지. 제가 있던 라크리마에선 무너진 건물, 파편 더미, 흙탕물이나 모래밭 같은 곳에서 응급수술을 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감염은 물론이고 의료인 력이나 장비도 부족한 최악의 환경이죠. 그럼에도 죽을 것 같던 사람이 살아나더군요. 전 그곳에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뭐지?”
“사느냐 죽느냐는 병원시설이나 써전의 칼끝에 달린 게 아니라는 것.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과정일 뿐 결국 종착역은 환자입니다. 결국 이겨내는 건 환자의 몫입니다.”
청산유수다.
이사장은 어린 인턴에게 한 편의 강의를 들은 기분이었다.
‘이러니 더 탐나는구나.’
그의 눈빛에 처음으로 애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애정은 애정. 2주는 너무 길었다.
“2주 안에 기회가 날아갈 수도 있다. 사회는 그리 녹록지 않아. 특히 의사 집단은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집단이다. 그런 집단이 기존의 틀을 깨고 남에 병원 인턴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했는데 거절을 당했다? 내가 어떻게 설득하든 그들은 납득하지 못할 거야.”
2주도 못 준다?
정리도 하지 말고 바로 옮기라는 뜻이다.
도수는 그가 서두르는 게 마음에 걸렸다.
“상관없습니다.”
“뭐?”
“협박은 안 통해요. 후계구도에 포함시켜 줄 테니 할아버지를 따라라. 전문의까지의 과정을 생략해 줄 테니 병원을 옮겨라. 병원을 홍보하는 스타가 돼서 더 많은 환자를 보거라…….”
“그렇지. 전무후무한 제안이다.”
“환자는 여기도 차고 넘칩니다.”
“넌 여기선 인턴일 뿐이야.”
도수는 입꼬리를 올렸다.
“제가 왜 인턴에 지원했는지 아세요?”
“인턴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아뇨.”
도수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인턴에 지원한 이유는 각 과를 다 돌아보며 기존에 몰랐던 경험과 지식을 채우고 싶기 때문입니다. 현대 병원의 포맷, 피부, 성형, 이비인후과, 안과, 치과, 신경외과까지. 제가 취약한 부분을 모두 섭렵하기 위해서요.”
말도 안 된다.
왜 분과를 하겠는가?
어떤 분야를 전공하든 인체는 무궁무진한 미지의 영역이다. 공부는 끝이 없고 누구라도 완벽에 도달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모든 분야를 전부 다 섭렵한다?
얼마나 기가 막혔으면 이사장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인즉 네가 몇 개 분야에 통달했다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부정하지 않습니다.”
“뭐?”
이사장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지만 도수는 꿈쩍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전 몇 가지 분야에 밝습니다. 모든 환자를 살릴 순 없지만 살릴 수 있는 환자를 놓치는 실수를 하진 않아요.”
물론 투시력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지만, 실수해서 환자를 잃은 적이 없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
이사장은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전쟁터에서 굴러먹다 왔다지만 인턴에 불과한 녀석이 이미 여러 분야에 통달한 의사라고 자부하는데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사장에게는 여전히 절대 거부하지 못할 히든카드가 있었다.
“전문의까지 몇 년이 걸리는 줄이나 아느냐? 그 전까지 넌 네가 좋아하는 수술도 제대로 못 한 채 수련의로서 생활해야 한다.”
“제가, 제가 좋아하는 수술도 못 하는 것처럼 보이세요?”
“뭐?”
도수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후에 수술이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그저 참가지 않느냐.”
“아닌 것 같은데요.”
이사장의 동공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게 무슨 뜻이지?”
“인턴, 레지던트, 전문의…….”
말끝을 흐린 도수가 덧붙였다.
“중증외상센터에선 그런 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환자는 여기도 넘쳐나요. 의사들 수십 명이 더 있어도 손이 부족할 정도로.”
“…….”
“천국이죠.”
“미친.”
이사장은 자기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이사장 체면에 얼마 만에 해보는 욕이던가? 그 어려운 일을 수십 년 만에 처음 만난 손자 놈이 끌어냈다.
그 손자 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오히려 태연하게 차량용 시계를 확인하며 물었다.
“이제 시간이 거의 다 됐네요. 이번에는 제가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말해봐라.”
기가 빨리고 진이 빠졌다.
이런 만만찮은 상대를 만난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그런 그에게 도수가 말했다.
“할아버지는 저한테 전문의까지 과정을 생략해 주겠다는 제안을 하셨어요. 심지어 모든 과장님들이 오케이하셨다고 하셨죠. 저랑 피 한 방울 안 섞인 자존심 높은 의사 집단의 과장님들께서도 동의하셨으니, 제가 할아버지 혈육이기 때문에 받아들인 게 아니란 뜻이에요. 그 이유가 제 수술 실력을 인정해서든 병원 홍보를 위해서든, 저한테 그만한 값어치가 있다는 뜻이죠.”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이건 제가 만든 판입니다.”
“뭐?”
“그래서 할아버지가 제안을 하신 거고요.”
“…….”
“2주 주십시오.”
이사장과 도수의 시선이 다시 한번 부딪혔다. 파지직, 전류가 흐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들만큼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그 순간, 상황 해제를 알리듯 호출기가 울려 퍼졌다.
삐비빅, 삐비빅.
손목에 찬 호출기를 확인한 도수가 고개를 꾸벅 숙이곤 차에서 내렸다.
타악.
차 문이 닫히는 것을 보면서도.
이사장은 그를 잡을 수 없었다.
“2주라.”
2주 후에 과연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왜 도수는 2주를 요구했을까?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었던 건 2주의 시간을 요구한 게 단순히 환자 수술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대체 뭘 하려는 거냐.’
창밖.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도수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생전 처음 만난 손자는 품에 두고 키우기도 전에 이미 날개가 돋아 날아가 버리려고 한다. 이사장은 올 때보다 훨씬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지.”
***
병원에 돌아온 도수는 레지던트 이시원의 굳은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근무시간에 어딜 쏘다니는 거냐?”
“할아버지가 찾아오셔서 뵙고 왔습니다.”
“뭐? 이 새벽에?”
새벽 네 시가 넘은 시간이다.
하지만 도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이제 한숨 돌릴 틈이 생겨서요.”
응급실은 전날 아침 여섯 시부터 오늘 새벽 세 시까지 환자들로 붐볐다. 지금에서야 소강상태에 들어선 것이다. 물론 두세 시간 후면 다시 환자가 쏟아져 들어오겠지만.
하지만 이시원이 그를 호출한 건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왜 불렀는지 알지?”
“모르겠습니다.”
“하…….”
한숨을 내쉰 그는 허리에 손을 얹고 물었다.
“똥 싸놓고 도망치면 전부야?”
“똥?”
도수가 미간을 찌푸리자.
이시원이 말했다.
“그래. 네가 멋대로 환자들을 처치하고 토끼는 바람에 다른 과에서 한 소리씩 하고 갔다.”
“김 교수님 지시대로 한 겁니다.”
“교수님 팔지 말고.”
한마디로 자른 이시원이 덧붙였다.
“그 공정한 분을 어떻게 뒷배로 뒀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병원엔 김 교수님만 계시는 게 아니야. 네가 이런 식으로 설쳐대면 김 교수님도, 그리고 우리 응급실 식구들도 곤란해진다.”
“이해합니다. 다만.”
“다만?”
“그 공정한 분이 그런 결단을 내리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인턴.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전 분명 해당 과 선생님들에게 모두 연락을 드렸습니다. 그분들이 내려올 때까지 환자들 상태가 더 악화되지 않도록 조치했고요. 응급실에서 해야 할 일을 한 건데 왜 문제가 되죠?”
“그건…….”
이시원은 말문이 턱 막혔다.
하지만 말을 꺼낸 이상 이대로 물러날 순 없었다.
“넌 인턴이야.”
“알고 있습니다. 왜 자꾸 말씀들 해주시는지.”
“네가 인턴답지 않으니까.”
“평범한 경우는 아니죠.”
뻔뻔한 대답에 이시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래서 노티도 없이 알아서 환자를 본 건가? 기어코 김 교수님 말씀대로 하겠다는 거냐?”
“네.”
“뭐라고?”
“…하나만 묻죠. 혹시 제가 치료한 환자한테 문제가 생겼습니까?”
“지금 그걸 말이라고 묻는 건가?”
“환자한테 문제가 생겼나 해서요.”
“문제가 생겼으면 넌 지금 이 자리 서 있지도 못했어!”
“그럼 문제없군요.”
“뭐?”
“전 인턴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의사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치료를 했습니다. 그 덕분에 환자는 좀 더 편하고 빠르게 치료를 받았고요. 의사로서의 본분은 보다 안전하고 빠르게 환자를 치료를 하는 것. 그 행위가 어떤 행위보다 선행돼야 한다고 알고 있는데요.”
“날 가르치는 건가?”
“그렇게 보이십니까?”
이시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런 인턴은 정말이지 듣도 보도 못했다.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쳤지만, 주먹을 날릴 수도 없는 노릇.
‘이 자식을 어떡한다?’
지금 잡지 않으면 앞으로 계속 속을 썩일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선 정강이를 한 대 후려 차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녹록지 않다. 만취한 환자를 간단히 제압하던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반격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는데.’
지금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시선들.
싸움이 나면 단순히 쪽팔린 게 문제가 아니었다. 병원 전체가 후폭풍에 휩싸일 테고 징계위원회가 열릴 것이며 위로는 김광석부터 아래로는 이도수까지 누구 하나 책임 소지를 피할 수 없을 터였다.
“후…….”
이시원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도수가 고개를 숙였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저는 환자 보겠습니다.”
그가 몸을 휙 돌렸지만, 이시원은 잡지 못했다.
당장 잡아 세운다 해도 어떻게 혼쭐을 내줘야 할지 감이 안 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