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제안
응급실엔 나타난 원 톤 정장을 입은 노인.
그를 알아본 사람은 도수뿐이었다.
워낙 분주한 응급실 환경 탓이다.
‘여긴 왜?’
도수가 의문을 품는 그때.
눈앞에 있는 환자가 다시 한번 밀치려 들었다.
“지금 내가 얘기하는 거 안 보여?”
턱!
양팔을 붙잡은 도수가 고개를 돌렸다.
흠칫.
눈이 마주친 환자는 소름이 끼쳤다. 의사치고 너무 잘생긴 얼굴 때문이 아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시커먼 눈동자와 정면으로 맞닥뜨린 것이다.
‘무슨 애새끼 눈빛이……’
자기도 모르게 가드를 올릴 뻔했지만 두 팔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힘깨나 쓴다는 말을 자주 듣는 사내는 저절로 위축이 됐다.
‘운동한 놈인가?’
하지만 우려하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철민은 단단히 붙잡은 팔을 부드럽게 만졌다.
주물주물.
“윽.”
“이제 팔 잘 움직이시죠?”
“그… 그런데?”
“아직 통증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을 겁니다. 정형외과 선생님 불러 드릴테니 반깁스 하고 가세요.”
그렇게 말하곤 팔을 놓고 스테이션으로 가서 정형외과로 콜을 했다.
“응급실 인턴 이도수입니다.”
-그래.
“오른팔 골절환자 입니다. 엑스레이 찍고 도수정복(뼈를 맞추는 치료) 했습니다.”
-누가?
“제가요.”
-인턴이?
“상황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하, 나 참… 노티도 없이 조치를 하나?
“김 교수님 지시였습니다.”
-…알겠다. 지금 내려갈게. 환자 건드리지 말고 기다려.
“알겠습니다.”
뚝.
전화가 끊겼다.
도수는 대답은 했지만 그를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아마 방금 통화한 레지던트보다 도수정복 자체도 자신이 훨씬 능숙할 터였다. 실수가 없었던 데다 응급실 자체가 워낙 바쁘게 돌아가니 특별한 문제가 생기진 않을 터. 기껏해야 나중에 우연히 마주치면 한 소리 듣는 정도겠지.
그보다 문제는 연락도 없이 찾아온 천하대병원 이사장, 그의 할아버지였다.
도수는 이사장에게 다가갔다.
“하실 말씀이라도.”
“대처를 잘하는구나.”
이사장이 다른 말을 했고.
도수도 자기 하던 말을 했다.
“나가서 말씀하시죠.”
그제야 주제가 겹쳐졌다.
“내가 할아비인 걸 숨기는 거냐.”
“아무도 묻지 않아서 말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괜히 시끄러워지는 게 싫어서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혹시라도 이사장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본다면 소란스러워질 터였다. 과장들이나 병원장이 직접 내려올지도 모른다. 천하대학병원은 국내 의료계의 유구한 역사 동안 단 한 번도 넘버원의 자리를 빼앗겨 본 적 없는 병원이었으니까.
그런 사람이 다른 병원을 직접 찾아온다는 건 충분히 이슈가 될 만했다.
“그런 것치곤 내가 온 걸 봤으면서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환자를 잘만 보던데.”
“의사한테 환자가 우선인 게 별스러운 일은 아니죠.”
“제법이야.”
피식 웃은 이사장이 말했다.
“따라 오거라.”
“차에 가 계세요. 지금 바로 처치받지 못하고 있는 환자 두 명만 더 보고 뒤따라가겠습니다.”
이 크고 분주한 응급실에서 치료받지 못하고 있는 환자 명수까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응급실 전체를 아우르는 시야, 천하대병원 이사장을 기다리게 만드는 배짱까지.
이사장은 눈을 반짝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인턴이 노티도 없이 치료도 하고. 아로대병원 기강이 무너진 건가, 외상센터장이 힘을 쓴 건가.”
그저 1분 남짓 지켜본 것만으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 그는 함께 온 비서실장에게 말했다.
“가지.”
“예, 이사장님.”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에서 미련 없이 눈을 뗀 도수는 스테이션으로 움직였다. 그는 모니터를 확인하며 검사를 끝냈음에도 치료를 받지 못하고 대기 중인 환자를 찾았다.
‘이수아. 탈장.’
다섯 살 소아 환자였다.
대부분이 어른 환자들이었기에 한눈에 들어왔다.
이수아 환자에게 간 도수가 보호자에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이도수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선생님.”
마주 인사한 어머니가 소아 환자에게 말했다.
“수아야. 우리 수아 치료해 주러 잘생긴 의사 선생님이 오셨다. 한번 봐봐.”
수아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을 들었다. 녀석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은 도수가 쪼그려 앉아 상태를 확인했다.
샤아아아아아.
탈장이 맞다.
우선 검사 결과를 확인하고 혹시 몰라 다른 곳도 투시를 해보았다. 다행히 탈장 외에 다른 문제점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배 좀 걷어볼래?”
수아가 상의를 걷자 배꼽 부위에 볼록하게 작은 혹 같은 게 나 있었다.
“금방 안 아프게 해줄게.”
도수는 투시력으로 배 속을 훤히 들여다보며 볼록하게 솟은 부분을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렀다. 그러자 밖으로 튀어나왔던 장이 복막 사이의 틈새로 쑥 밀려 들어갔다.
“어…….”
수아가 안 그래도 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어때?”
“안 아파요!”
다시 한번 머리를 쓰다듬은 도수가 몸을 일으키며 보호자에게 말했다.
“탈장은 한번 생기면 재발률이 높기 때문에 나중에 시간을 내셔서 재발 방지 수술을 해주시는 편이 좋습니다.”
“아!”
수아 어머니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내일 소아외과에 외래 잡아드릴 테니 진료 보시구요.”
“네, 꼭 그럴게요! 수아야! 선생님한테 감사하다고 인사해야지?”
그러자 수아가 배꼽 인사를 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래.”
머리를 쓰다듬은 도수는 스테이션 간호사에게 가서 말했다.
“이수아. 배꼽탈장 환자 내일 소아외과 외래 잡아주세요. 최대한 빠른 시간으로.”
“네.”
대답한 간호사는 얼굴을 붉혔다. 도수는 별 의미를 두지 않고 다른 환자를 보러 떠났지만, 그녀는 외래를 잡으며 동료 간호사와 수군거렸다.
“진짜 신기하지 않아?”
“그러게. 인턴이 어떻게 저렇게 능숙하지?”
“얼마 전까지 전쟁터에서 수술하고 다녔단 말이 진짠가 봐.”
“에이, 설마… 엄청 어려 보이는데?”
“어려 보이긴? 완전 남자다운데.”
이야기를 나누던 간호사는 피식 웃었다.
“완전 빠졌네, 빠졌어.”
“빠지긴 무슨…….”
“하긴. 이도수 선생님이 잘생기긴 했지.”
“조각이야 조각. 근데 얘 봐라. 남자 친구도 있는 애가 왜 눈독을 들여?”
“이거 봐라? 웃기는 짬뽕이네? 김칫국 마시면서 질투하지 말아줄래? 딱 보니 연애는 괜찮아도 좋은 남편감은 아니야.”
“난 저 정도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도수의 뒤태를 보며 몽롱해진 그녀가 덧붙였다.
“당당하고 솜씨도 좋잖아. 얼마나 섹시해?”
***
소아과 외래를 잡으면서 다음 환자를 확인한 도수는 열일곱 살 여학생에게로 찾아갔다. 피가 철철 나는 손을 부여잡은 채 앉아 있는데도 껌을 질겅질겅 씹고 있는 게, 여학생치고 지나치게 대담해 보였다.
“안녕하세요. 이도수입니다.”
“잉?”
소녀의 표정이 의아하게 변했다.
“선생님 완전 어려 보이시네요?”
“어려 보이는 게 아니라 어린데.”
“네?”
“아닙니다. 손 보죠.”
턱.
도수가 손을 잡자.
여학생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
“어머. 다 큰 처녀 손을.”
진짜 특이한 캐릭터다.
한 귀로 흘린 도수는 투시력을 사용했다.
샤아아아아아아.
유리 파편이 깊게 박히긴 했지만 혈관이나 신경을 찌르진 않았다.
피부만 꿰매면 된다는 뜻.
따로 검사를 의뢰하거나 노티를 할 필요도 없었다. 이 정도는 웬만한 인턴들도 처치할 수 있는 찰과상이다.
“소독하겠습니다.”
도수가 장갑을 끼고 자기 손을 소독한 뒤, 집게로 유리 파편을 제거했다. 투시력을 통해 보이는 작은 알갱이까지. 그다음 밑에 빈 통을 대고 상처부위에 소독약을 들이부었다. 그러자 소녀가 태연하던 모습과는 달리 몸을 비틀며 신음을 흘렸다.
“아으으…….”
“다 됐습니다.”
도수는 실과 바늘로 피부를 봉합했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소녀가 물었다.
“저번에는 무슨 호치케스 같은 걸로 집던데.”
“저번에도 왔었어요?”
꿰매는 사이 정신 분산을 시키려고 던진 질문이다. 따끔거려서 환자가 움직이면 치료가 몇 배 힘들어진다.
다행히 소녀는 소독약을 들이부을 때처럼 통증을 호소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근데 저번보다 훨씬 안 아프네요.”
어느새 다 꿰맨 도수가 손을 떼며 물었다.
“공장에서 일해요?”
“네?”
“자주 다치는 것 같아서.”
“아~”
그녀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
“제가 원래 스포티하거든요. 후훗.”
“그래 보여요.”
“잘 놀 것 같다는 뜻?”
“말괄량이 같다는 뜻.”
도수가 일어나자 그녀가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근데 왜 이렇게 빨라요? 잘생긴 얼굴 감상 좀 할랬더니.”
이걸 털털하다고 해야 할지.
당돌하다고 해야 할지.
도수는 별로 대답할 가치를 못 느끼고 어깨만 으쓱였다. 장갑을 벗고 선반을 정리하는 사이 여학생이 가방을 뒤적이더니 쪽지를 적어서 내밀었다.
“제 번호예요.”
도수는 우두커니 서서 물었다.
“근데요?”
“음… 받아주셔야 안 민망한데. 엄청 용기 낸 거라서.”
그제야 도수는 쪽지를 받았다. 대충 받고 돌려보내는 게 속 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 이제 가보세요. 그럼 전 이만.”
고개를 가볍게 숙인 그는 환자들을 지나쳐서 응급실을 나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보던 여고생은 입맛을 다셨다.
“흐응. 겁나 까칠하네. 앞으로 자주 다쳐야 하나?”
한편.
응급실을 나선 도수는 쪽지 같은 건 까맣게 잊고 할아버지가 타고 있는 차를 찾았다. 헤드라이트 불이 켜져 있는 차는 딱 한 대뿐.
검은색 대형 고급 세단이었다.
도수가 가서 뒷좌석 문을 열고 차에 탔다. 타자마자 시간을 확인한 그는 미리 양해를 구했다.
“콜 오면 바로 들어가야 돼요. 콜이 없어도 오 분 내로 들어가야 하고.”
“인턴 바쁜 건 잘 알지. 오래 안 붙잡으마.”
“이제 완전히 할아버지 모드신데요?”
“네가 혈육이란 게 확인됐다.”
“예상은 했습니다.”
“그랬겠지.”
고개를 끄덕인 이사장이 즉시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병원으로 옮기도록 해라.”
“이건 권유가 아닌데.”
“맞다. 권유하는 게 아니야.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달콤한 제안을 할 생각이다.”
“들어보죠.”
“널 우리 병원의 후계 구도에 포함시킬 생각이다.”
“그건 제게 달콤한 제안이 아닌데요. 경영 같은 건 할 생각도, 하고 싶은 생각도 없는데.”
“그저 환자만 많이 보면 다구나.”
“맞아요.”
도수의 대답을 들은 이사장은 다른 패를 꺼내 들었다.
“대충 예상은 했다. 하지만 두 번째 제안을 거절하기 힘들 거야. 네게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생략하고 전문의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주마. 이미 과장들 동의도 받은 사안이다.”
이건 도수가 놀랄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그게 가능한 겁니까?”
“우리 병원에선 가능하다. 국내 의료계를 주름잡는 각계의 권위자들이 모인 곳이 우리 병원이니까.”
“자부심이 대단하시네요.”
“너도 자부심을 갖게 될 게다.”
도수는 그 말을 한 귀로 흘렸다.
“…이게 끝인가요?”
“협상을 할 줄 아는구나.”
피식 웃은 이사장이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널 스타로 만들어주겠다. 넌 싫어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여러 케이스의 환자를 만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될 거야. 환자들이 널 찾아올 거다. 가까우면 전국 각지, 멀면 세계 각지에서 찾아오겠지. 그중에는 고위직 인사들부터 부자들, 유명인사들도 있을 거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수술을 할 수 있을 테고 병원정치에 휘둘리지 않아도 된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의 어느 병원을 가도 너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 곳은 없을 게야.”
도수는 시트에 몸을 기댔다. 단내가 여기까지 풍길 정도로 달콤한 제안이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앞좌석 차량용 시계를 확인하곤 입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