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미완의 논문
도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쪽이나 그쪽이 속한 집단이 날 아니꼽게 생각하든 말든 전혀 관심 없거든요. 됐습니까?”
“……!”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도수는 무감정한 눈빛으로 천태백을 응시했다.
그 눈길을 받은 천태백은 온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동기들이 지켜보고 있는 상황.
간신히 눈을 피하지 않은 천태백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김광석 교수님과 친한 것 같던데. 우리 병원에 올 생각은 아예 없나 보죠?”
뭐라고 한 거지?
자기도 모르게 횡설수설하고 말았다.
그러나 도수는 여전히 고요하게 되물었다.
“대답해야 합니까?”
으드득.
천태백은 이를 갈았다. 망신을 주려고 했는데 망신을 당한 셈. 상대를 베려던 칼에 자신이 베인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도수의 입가에는 미소가 스쳤다.
“다음에 다시 볼일 없길 바라시죠.”
그렇게 말하고 옆을 지나치는 도수. 그를 맞닥트린 동기 인턴들이 우르르 비켜섰다. 도수가 완전히 지나간 후에야, 뒷모습을 보던 인턴 한지혜가 중얼거렸다.
“워… 성격 장난 없네.”
“그러게. 대박이다.”
“저런 성격으로 병원에 적응할 수 있을까?”
“천 선생이 너무하긴 했어. 그래도 난 좀 충격. 눈 한 번 깜짝 안 하대.”
저마다 혀를 내두르는 인턴들.
그러나 망신살 뻗친 천태백만은 주먹을 굳게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이 개새끼가……!’
동기들 앞에서.
완전히 개망신을 당한 것이다.
그것도 태어나 한 번도 당해본 적 없는 모욕을.
‘제발 우리 병원으로 와라, 제발……!’
다른 곳으로 간다 해도 지위고하가 정확한 병원체계에 적응하지 못할 테지만, 반드시 아로대학병원으로 왔으면 좋겠다.
천태백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 있으니까. 손 안 대고 코 풀 자신이.
‘수술실력이 다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마.’
도수의 등을 쫓는 천태백의 시선에 냉기가 피어올랐다.
***
도수는 시답잖았다. 그래서 방금 있었던 일을 기억에서 지우고 김광석 교수 연구실 문앞에 섰다.
철컥.
문이 열리지 않는다.
“아.”
도수는 그제서 깨달았다.
평소에는 잠겨 있구나.
민망해진 그는 몸을 돌려 휴게실로 갔다.
‘이런.’
그가 걸음을 멈췄다.
휴게실에 웬 여의사가 홀로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몸을 돌리려는데, 하필이면 눈이 마주쳤다.
“이도수 씨?”
도수가 다시 돌아섰다.
“…네.”
“전 레지던트 1년 차 강미소예요.”
여의사, 강미소가 이어 물었다.
“잠깐 시간 돼요?”
“……?”
도수 입장에선 황당했다.
생전 처음 보는 여의사가 그에게 무슨 볼일이 있단 말인가?
“무슨 일이신지.”
“김 교수님을 찾아왔다는 거 알고 있어요. 이유도 알고 있죠.”
“이유……?”
“그래요. 논문 때문이죠?”
도수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논문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전 잘 몰라요. 우리 아빠가 알죠. 이 정도면 시간 내줄 이유가 충분한가요?”
우두커니 선 도수는 머릿속을 정리했다. 김광석은 분명 병원장을 통해 아버지 소식을 들었다고 했는데.
“병원장님이 가족입니까?”
“아뇨. 병원장님의 수족 같은 분이 우리 아빠죠.”
“교수.”
“그래요. 교수 중 한 분이세요.”
조금 더 들어볼 필요가 있다. 왜 논문 이야기가 거기까지 퍼져 나간 것인지.
도수는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러자 강미소가 물었다.
“마실 거라도?”
“됐습니다.”
도수가 주제를 바꿔 물었다.
“제게 해줄 얘기가 있습니까?”
“이야기는 아니고. 얼마 전에 병원장님이 아빠한테 논문 하나를 주셨죠. 원래 이도수 씨 아버님 것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럴 겁니다.”
김광석의 말로는 병원장이 논문을 가지고 있다고 했으니까.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 논문을 읽어봤어요. 혹시 바티스타 수술(Batista operation: 심실성형술의 일종)에 대해 알고 있어요?”
도수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강미소가 말했다.
“수술에 대해선 논문에 나와 있으니 각설하고. 이 수술은 아직 안정성과 유효성을 인정받지 못한 미완의 수술이죠.”
바티스타 수술에 대한 논문이라는 뜻.
도수가 물었다.
“그런데요?”
“그 논문은 이 바티스타 수술을 완성시킨 새로운 수술법에 대한 논문이에요.”
“지금 주시죠.”
도수가 부리나케 말하자 강미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죠. 어차피 제자리로 돌려놓을 생각이었으니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덧붙였다.
“따라와요. 아버지 논문을 돌려줄게요.”
강미소의 뒤를 쫓은 도수는 다시 김광석의 연구실 앞에 섰다.
“여긴 왜……?”
“전 김 교수님 연구 보조를 하고 있거든요.”
그녀는 자연스럽게 열쇠를 꺼내서 연구실 문을 열었다. 그리곤 도수에게 말했다.
“들어와요.”
도수는 따라 들어가며 물었다.
“그 전에 왔을 땐 안 계셨는데요.”
“우린 응급외상센터 소속이에요. 연구하는 시간보단 환자를 보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죠.”
“아아.”
도수는 납득이 갔다.
지금만 해도 김광석은 출동한 상태.
집에는 한 달째 들어온 적이 없다.
강미소의 사정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도수를 연구실 안쪽으로 데려간 강미소는 서랍을 열어 논문을 꺼냈다.
“일단 앉아서 한번 읽어봐요.”
고개를 끄덕인 도수는 엉덩이를 붙이고 논문을 차근차근 읽었다. 그녀 말대로 논문은 바티스타 수술에 관한 내용이었다. 나라별로, 환자별로 케이스가 정리되어 있었다.
“가난한 나라들을 돌아다니면서 수술을 하셨군요.”
“그러셨던 것 같아요.”
팔락.
“수술 후 예후도 좋았고요.”
“맞아요.”
탁.
논문을 덮은 도수가 물었다.
“그런데 왜 논문을 발표하지 못했을까요?”
“제가 훔쳐 들은 바에 의하면 ‘수술대상자가 전부 외국인이라서’ 발표하지 못했다고 들었어요.”
“그게 타당한 이유가 되나요?”
“글쎄요. 되더라고요. 타당한 이유가.”
“제 생각엔 아닌데.”
“제 생각도 마찬가지. 그래서 뭔가 있다 싶었고, 이도수 씨한테 논문을 돌려드린 거예요. 여기까지가 논문을 돌려드린 경위고. 이제부턴 제가 들은 이야기예요.”
도수가 잠자코 기다리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논문을 발표하지 못한 이도수 씨 아버지는 국내 환자들을 대상으로 수술한 뒤 다시 논문을 쓰려고 했어요. 하지만 복지부의 방해를 받아서 환자도 배정받지 못하고 떠나야 했죠.”
“복지부?”
“그래요. 카바수술이 그랬듯 복지부에서 비급여 고시 폐지 처분을 내렸어요. 사실상 수술을 금지시킨 셈이죠. 그래서 이도수 씨 부모님이 회의감을 느끼고 한국을 떠난 거예요.”
도수는 다시 한번 논문을 훑었다. 아직 완전히 끝맺음되지 않았기에 전산이 아닌 문서로 남은 논문을.
그를 빤히 응시하던 강미소가 흥미진진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
“이건 제 생각인데 안정성과 유효성은 충분했어요. 만약 수술이 금지되지만 않았더라면 심장이식이 필요하지만 대체할 심장이 없는 수많은 확장성 심근병증 환자를 살릴 수 있었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지부가 막았다?”
딱 들어도 구린 부분이 있다.
그 사실을 인지시킨 강미소가 말을 이었다.
“병원장님과 우리 아빠는 논문을 바로 돌려주지 않았죠. 김 교수님을 통하면 되는데. 그 논문을 들고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걸까요?”
도수가 검지와 중지를 폈다.
“두 가지.”
“네?”
“첫째, 그쪽 말대로라면 그쪽 아버지가 구린 일에 연루됐을 수도 있다는 건데 왜 저한테 논문을 돌려줬으며, 이런 이야길 해주는 겁니까?”
허락 받고 논문을 가져온 것은 아닐 터.
그렇다면 그녀 아버지에게 넘어갔던 논문을 빼돌렸단 건데.
강미소는 입꼬리를 올리며 그 질문에 답했다.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거친 의사라서? 그리고 이도수 씨에 대해 어마어마하게 궁금한 대한민국 국민 중 한 명이거든요. 마지막 제일 시시한 이유는 김교수님랑은 친하고 아빠랑 별로 안 친해서라고 해두죠.”
“그렇다고 치고.”
도수는 중지를 접고 물었다.
“누가, 왜 논문 발표를 막았던 걸까요? 그리고 어째서 우리 부모님은 외국에서 이 논문을 발표하지 않았던 거죠?”
“…….”
강미소라고 그 모든 걸 알 리 없었다. 하지만 그게 질문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반응을 확인한 도수는 논문 커버를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길 한참.
견디다 못한 강미소가 먼저 물었다.
“논문을 손에 넣었어요. 외국에 나가서 논문을 발표할 건가요? 안 그래도 신개념 수술로 유명한 이도수 씨라면 충분히 신뢰받을 수 있을 텐데.”
그녀를 빤히 응시한 도수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되면 지금 품고 있는 어떤 의문도 밝혀낼 수 없어요. 만에 하나 외국에서도 같은 이유로 다시 제재당할 수도 있고. 아버지가 굳이 여기서 논문 발표를 하려 하셨던 게 애국심 때문은 아니었을 거예요.”
그럴 것이다.
어차피 외국에서 인정받았다면 국내에도 수술 방법이 들어올 확률이 커졌을 테니까.
“그럼요?”
“아직은, 불안 요소가 있었던 거겠죠.”
그렇게 생각하는 게 가장 타당했다.
고개를 끄덕인 강미소가 물었다.
“그렇다고 치고.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대화가 길어지자 다소 지친 듯한 기색이다.
이제 결론을 내달라.
그녀 눈빛에 부응한 도수가 입을 열었다.
“논문의 안정성과 유효성을 보완할 겁니다. 그럼 국내 환자들도 수술을 받을 수 있겠죠. 이게 아버지가 바라시던 거고요.”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강미소의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돌았다.
“기존 바티스타 수술이 아닌, 바티스타 수술을 토대로 한 새로운 수술법이 탄생할 거예요. 이도수 씨 이름을 붙일 수도 있겠죠.”
눈을 반짝이는 게, 과연 그처럼 어마어마한 일을 할 수 있을지 다음 내용을 기대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피식 웃은 도수가 논문을 짚었다.
“이건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원래 이도수 씨 거예요.”
“은혜는 꼭 갚죠.”
“기대할게요.”
누가 은혜를 입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뒷말을 삼킨 강미소는 흥미로운 눈길로 도수를 지켜봤다.
가볍게 목례를 한 도수가 논문을 챙겨서 일어났다. 더 이상 병원에 머물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막 연구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찰나.
강미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병원은 정했어요?”
“…….”
고개를 돌린 도수가 문을 열며 대답했다.
“어디든, 제가 가장 필요한 곳으로 갈 겁니다.”
***
집으로 돌아온 도수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며칠 밤낮을 논문에 골몰했다.
논문을 다시 처음부터 재정립하려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가 논문을 쓸 때처럼 우선 논문의 모태가 된 바티스타 수술 케이스나 관련 문헌을 샅샅이 찾아봤다. 아무래도 초고난도 수술이라 자료가 많지도 않을 뿐더러 확실히 검증되지 않은 부분도 존재했지만, 아버지가 어느 정도 보완해 둔 상태였다.
물론 도수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좀 더 개량된 수술법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실제로 메스를 들고 사람 몸을 해체하진 않았지만 긴 시간 공을 들여서 도면처럼 과정을 그릴 순 있었다.
오죽 몰입했으면 가족들과 얼굴을 맞대는 시간도 식사 때나 김해리의 공부를 봐줄 때뿐이었다.
한편 도수가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언론과 여론은 그의 행보에 대해 각종 추측을 쏟아내며 촉각을 세웠다. 라크리마의 소년 영웅. 의사 국가고시에서 380점 만점을 맞은 수석 합격자이자, 최연소로 의사가 된 장본인. 이 어마어마한 스펙을 가진 인턴이 어느 병원으로 갈지 귀추가 주목받는 건 당연했다.
그렇게 한 달.
마침내 도수가 현관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