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오빠, 엿 먹어.”
“…….”
필기시험장 앞에서, 해리가 꺼낸 첫 마디다.
도수는 ‘엿’의 숨은 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너 그게 무슨 말버릇…….”
척.
손을 쭉 뻗은 해리의 손에 큼직한 엿이 들려 있었다.
“내가 특별히 인사동까지 가서 사온 거야.”
특별히 인사동까지 가긴 무슨.
친구들과 약속이 있어서 간 거면서.
도수는 진작 알고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왜 이걸? 왜 자꾸 엿 타령이야?”
이쪽이 더 궁금했다.
그러자 해리가 말했다.
“엿 감촉이 어때?”
“끈적거려.”
도수가 질색하자 해리가 피식 웃었다.
“그거야. 끈덕지게 척! 붙으라고 엿을 준 거라고. 그러니까 꼭 먹어야 돼?”
엿을 빤히 쳐다보던 도수가 진지하게 말했다.
“이런 걸 잘못 먹으면 식도나 위벽에 붙어서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아니.”
도리도리.
고개를 저은 해리가 눈을 마주치고 생긋 웃었다.
“내 십칠 년 평생 그런 사람 듣도 보도 못했어. 오빠, 엿 먹어본 적 없지?”
“…어.”
“그럼 지금 맛만 봐.”
도수는 엿을 깨물려다 말고 핥았다. 혀끝에서 시작된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이 썩겠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 먹어. 아무튼!”
해리가 불쑥 도수에게 다가서며 어깨를 두드렸다.
“꼭 합격하시게!”
“자네도 이만 돌아가시게.”
김해리가 피식 웃었다.
“긴장 별로 안 하는 것 같네.”
“약간은.”
무뚝뚝하게 대답한 도수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따라서 그는 해리의 눈빛에 복잡한 기색이 스치는 것을 볼 수 없었다.
***
막 교문으로 들어서려던 도수는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근처에 취재진이 눈에 불을 켜고 진을 친 것이다.
“수험표… 이름이 찍힌 수험표를 숨기고 있는 애를 찾아.”
“열아홉 살이니 딱 봐도 어려 보일 거야.”
“얼굴 가리고 들어오는 앨 찾아보자고.”
“…….”
도수는 말을 잃었다.
아직 얼굴이 공개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망정이지 지난번 실기시험을 본 후 그가 국시에 응시했단 소문이 언론가에 쫙 퍼진 것이다.
하지만.
“후우.”
이쯤이야.
귀찮을 뿐 얼마든 피할 수 있다.
도수는 난민 생활에서 터득한 법칙대로 행동했다. 빠르게 진입하는 인파를 훑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는 여자 수험생 몇이 보였다.
포착 완료.
도수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녀들 틈으로 물처럼 스며든 도수는 발걸음을 맞췄다. 그러자 교묘하게도 겉에서 두 눈 크게 뜨고 도수를 찾는 취재진의 눈에 띄지 않고 수험장 안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여기서도 이런 귀찮은 짓을 하게 되다니.’
고개를 내저은 도수는 외투를 벗고 수험표를 꺼냈다.
이제 시작이다.
그런데 시작도 전에 주위의 따가운 눈총이 느껴졌다.
“이도수…….”
“저 사람이 이도수?”
“우와…….”
“잘생겼다.”
뒤따르는 감상들.
하지만 도수는 개의치 않고 필기시험을 준비했다.
몇몇 수험생들이 다가오려 했지만, 때마침 감독관이 들어오는 바람에 자리로 가야 했다.
자기소개를 끝낸 감독관이 말했다.
“지금부터 핸드폰 등 전자기기, 그리고 액세서리를 각자 제출합니다.”
전자 기기나 액세서리를 수거하는 동시에.
감독관은 개개인에게 컴퓨터용 사인펜과 샤프를 제공했다.
그리고 곧, 정적 속에 시험지 넘기는 소리만 들어찼다.
팔락, 팔락…….
“시험 시간은 한 시간 사십 분이니, 잘 분배해서 보시길 바랍니다.”
이내 문제 푸는 소리가 이어졌다.
사각, 사각.
펜이 지면을 스치는 마찰음이 기분 좋게 고막을 자극한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도 도수는 자유로웠다. 일단은 의사 자격을 받아야 자유로운 의료 활동이 가능하다. 이 자리만 통과하면 합법적으로 사람들을 마음껏 치료할 수 있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한 가지 더 기쁜 사실은.
모든 문제의 정답이 확실하게, 막힘없이 딱딱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마치 답안지를 보고 답을 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한두 문제만 아리까리했어도 굉장히 불안했을 텐데.
도수는 점점 자신감이 붙었다.
‘이제 남은 과목은 네 개.’
중식을 먹은 도수는 다시 교실로 돌아왔다. 머릿속으로 다음 과목의 체크포인트를 떠올리고 있는 그때 감독관이 들어섰다.
“다들 밥 먹은 후라 졸리고 늘어질 수 있을 텐데 정신 차리고 앞으로 과목도 잘 보시기 바랍니다.”
곧 시험이 시작됐다.
거기까진 전 교시들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교실 귀퉁이에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억, 헉……!”
큰 키에 마른 체형을 가진 남학생 한 명이 안경을 떨어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리한 얼굴색. 비틀대는 몸짓이 큰 문제가 있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몇 걸음 못 가 크게 넘어졌다.
콰당탕!
“뭐야?”
“헐…….”
주위에 있던 수험생들이 몸을 피하며 당혹성을 질렀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이 돌발 상황에 침착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도수였다.
‘천식 발작?’
얼마 전 아로대병원 응급실에서 이와 같은 환자를 맞닥트린 적이 있었다. 그땐 기도 삽관을 통해 해결했지만, 지금은 그런 조취를 취할만한 도구가 없었다.
‘아니… 나서지 말자.’
도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금은 국가고사 중.
멋대로 나섰다간 자칫 의사 자격이 물 건너 갈 수도 있었다.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해도 자격을 얻는 일이 늦춰질 것이다.
그때 당황해 있던 감독관이 수험생들을 통제했다.
“모두 가만히 있어요! 여기 선생님!”
교실 뒤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양호교사가 쓰러진 수험생에게로 달려가 천식 흡입기를 들이마시게 조치했다.
‘다행이야.’
도수는 주먹을 쥐었던 손을 느슨하게 풀었다.
환자 본인이 시험보기 전 미리 언질을 해두었던 것이다.
“된 건가?”
“괜찮아진 것 같기도 하고…….”
술렁이는 교실 안.
모두가 예비 의사들인데도 이렇듯 속수무책이다. 모두들 눈앞의 환자 한 명보단 앞으로 살릴 많은 환자들을 생각하고 있으니까.
감독관이 그런 수험생들을 보며 외쳤다.
“의사 자격시험은 국가고시입니다! 나라에서 진행하는 시험이라 다른 시험처럼 예외가 없습니다! 시험 시간이나 점수는 바뀌지 않아요! 나중 가서 지금 상황 탓하지 말고 다들 자기 시험에 집중하세요!”
어수선한데다 쓰러진 사람을 외면하긴 쉽지 않았지만 당사자가 아파도 두 번 기회를 주지 않는 국가고시다.
어차피 조치는 감독관이나 양호교사의 몫.
수험생들은 저마다 고개를 돌리며 다시 시험에 집중했다.
사각, 사각…….
다시, 펜 끝이 지면을 스치는 소리.
모두 다시금 시험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단 한 명.
도수만 눈을 떼지 못했다.
“허윽… 허윽……!”
환자의 숨소리가 여전히 탁했다.
천식 흡입기를 들이마셨음에도 증상이 나아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급기야 그는 고통에 몸부림을 쳤다.
“끄으으으으… 끄으으!”
괴로워하는 환자를 보며 양호교사는 어쩔 줄 몰랐다.
“왜, 왜 이러지?”
자기도 모르게 내뱉는 한마디.
그야말로 진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건 시험을 진행해야 하는 감독관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 뭐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겁니까?”
“검사할 기계도 없고 저도 당장은 잘… 이, 일일구에 신고해야 될 것 같습니다!”
양호교사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대답하자 감독관이 바로 핸드폰을 들었다.
“제가 신고하겠습니다.”
‘시간이 있을까?’
도수는 시험지와 환자를 번갈아 바라봤다.
구조대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시험 시간 까먹다 필기를 망치면 적어도 한국에 있는 어느 병원도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험 잘 보려고 환자를 외면하고 그대로 두면 한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
도수는 일순 투시력을 쓰려다 말았다. 이틀에 걸친 국가고시를 봐야 하는 판국에 극심한 체력소모를 감수할 순 없는 까닭이다. 게다가.
‘발작 증세가 심해. 천식 흡입기도 듣지 않는다. 일반 천식이 아닐 수 있어. 저대로 두면 위험하다.’
어느 정도는 투시력 없이도 파악이 가능했다.
실기시험에서 문진할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반면 양호교사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기에.
도수가 불쑥 외쳤다.
“가방을 뒤져보세요! 비상시에 쓰려고 갖고 다니는 에피네프린 주사가 있을 겁니다.”
“아!”
그제야 돌처럼 굳어 있던 양호교사가 깨어났다.
천식환자의 가방을 쏟자 역시, 에피네프린 주사가 있었다.
그녀는 주사기를 꺼내 90도로 환자 허벅지에 찔러 넣곤 크게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휴우! 정말 다행이에요! 십년감수했습니다! 하하하하……! 주사기가 있는지 어떻게 알았어요?”
도수에게 묻는 말.
하지만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
도수는 대답하지 않고 환자의 경과를 지켜봤다.
‘역시… 천식이 아니야.’
환자 상태는 더 악화되고 있었다.
그사이 시험지가 눈에 밟혔다.
시험지……?
시험 따위가 중요한가!
“젠장!”
욕지거리를 뱉은 도수가 벌떡 일어나 성큼 환자에게 다가갔다. 시험을 치르는 건 어디까지나 환자를 살린 후.
그러자 감독관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뭐예요? 거기 안 섭니까?”
도수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실갱이하고 있을 여유가 있었다면 애초에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환자 곁에 다가간 그는 환자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역시… 미동도 없다.
“보세요. 흡입기가 효과를 본 게 아니라 의식을 잃은 겁니다.”
“아…….”
양호교사는 당황했다.
그녀의 흔들리는 동공을 응시하던 도수는 환자의 목에 손을 대고 맥박을 확인했다.
‘맥박은 정상. 천식 발작이 아니면…….’
천식과 구분이 힘들고, 큰 키에 마른 체형을 가진 젊은 사람들에게 주로 생기는 질환.
도수는 직감했다.
‘기흉?’
더불어 뻣뻣한 근육, 바짝 마른 입술.
‘갑자기 심해진 걸 보면 긴장성이다.’
어느 정도 확신이 섰지만 실기에서 배웠듯 정확한 진단이 필요했다.
‘투시력을 써야 하나?’
아니.
아직 이르다.
그런 판단이 들었다.
시간을 보니 아직은 환자를 살리고 시험을 치를 가능성이 있었다.
따라서 그는 투시력 대신, 라크리마에서 배웠던 진단법을 떠올렸다.
손가락 끝을 환자 가슴에 대고 다른 손으로 손톱 위쪽을 두드리는 것.
먼저 왼쪽 가슴.
퉁, 퉁.
울리는 소리가 났다.
그 모습을 보던 양호교사가 비명처럼 물었다.
“서… 설마 타, 타진(打診)을……?”
이제 막 국가고시를 보러 온 수험생이, 요즘은 의사들도 안 쓴다는 타진을 하다니!
그는 인간 엑스레이가 되어 반대쪽 가슴을 두드렸다.
통, 통-!
왼쪽 가슴에 비해 높은 소리.
왼쪽 가슴에 비해 가벼운 진동이 손가락 끝에서 느껴졌다.
이건…….
확인절차를 마친 도수가 진단을 내렸다.
“기흉입니다.”
하지만 진단은 치료의 시작.
그가 보기에 환자 상태는 안 좋았다. 그리고 앞으로 더 나빠질 것이 불 보듯 빤했다. 여기서 더 심해지면 한쪽 폐가 완전히 쪼그라들 수 있었다. 심장이 압박될 경우 순식간에 심정지가 올 가능성도 있다.
‘놔두면 사망할 수 있어.’
도수는 양호교사를 보며 물었다.
“빨대… 아니 그러니까, 도레코스토미(Thoracostomy: 흉관삽입술) 할 수 있어요?”
자기도 모르게 라크리마에서 하던 대로 ‘빨대 꽂기’라고 지칭할 뻔했다.
하지만 이젠 의대생만큼 이론을 공부한 국시응시생.
도수의 말에, 양호교사가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수술을 어떻게…….”
해박한 의학 지식은 공부했다 치고, 타진에 흉관삽입술까지.
“…대체 뭐죠? 어떻게 그런 것들을 알아요?”
“지금 그게 중요해요? 묻잖아요, Thoracostomy 할 수 있는지!”
“……!”
양호교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간호사 자격만 있지, 의사가 아닌 것이다. 의사들은 고시 내내 이곳에서 머물 만큼 한가하지 않다. 그녀는 응급처치만 남들보다 능숙할 뿐,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수험생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연히 흉관삽입술도 못한다.
눈치로 알아챈 도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환자는 제가 살리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항거할 수 없는 무언의 힘이 있었다.
어쩌면 당연하다.
누구도 인생이 걸린 국시를 포기하고 환자를 돌볼 용기가 없었고.
흉관삽입술을 이 자리에서 실행할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
수험생들은 물론 감독관도, 양호교사도 덤벼들어 그를 말리지 못했다.
지금도 모두가 죽어가는 수험생을 보고 있는 상황.
도수는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젠장.’
기흉을 해결하려면 공기를 빼줘야 하는데 매스도, 튜브도 없다.
여긴 학교지 병원이 아니니까.
하지만…….
“잠시 물건 좀 빌리겠습니다.”
멋대로 양해를 구한 도수는 양호교사가 가져온 구급상자에서 에탄올 소독약을 꺼냈다.
“필통 갖고 있는 사람?”
수험생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선뜻 필통을 꺼내주지 못했다.
가방을 열고 뭔가를 꺼내는 행위는 충분히 부정행위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감독관님.”
도수의 부름에 감독관이 정신을 차렸다.
“저… 정말 그렇게 위급한 겁니까?”
“그대로 두면 죽습니다.”
단호한 한마디.
감독관은 결심했다.
“…다들 말에 따르세요!”
우르르, 수험생들이 저마다 필통을 꺼냈다.
도수는 직접 필통을 까보고 카터 칼과 볼펜을 꺼냈다. 하지만 칼이란 건 존재만으로도 위협적인 도구.
“카, 칼은 왜? 설마 절개를 하려고……?”
필통주인이 물었지만 도수는 말없이 환자 곁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양호교사가 말했다.
“진짜 여기서 흉관삽입술을 할 생각이이에요? 그 필기도구들만 가지고?”
그녀는 아까보다 침착해 보였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도수는 볼펜을 분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수 있어요?”
“…….”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죽어가는 사람을 마주하는 공포.
이 자리의 모두를 얼어붙게 한 원인이지만, 매일 같이 사람이 죽어나가는 지옥에서 살았던 도수에게는 대수로울 것 없다.
“절개 시작합니다.”
에탄올로 소독한 카터 칼은 메스가, 볼펜 펜대는 호스가 됐다.
도수는 절개 부위인 가슴 아래쪽을 에탄올로 소독한 뒤 카터 칼로 절개했다. 그러자 칼날이 지나간 자리로 피가 질질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