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역사적인 국시
도수는 일반적인 국시생들과 같은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러려면 필기에 앞서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바로 도수가 병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살다시피 한 이유.
바로 실기다.
이 실기는 여러 개 방에서 치러진다. 모의 환자들이 있는 방, 그리고 진료 수기가 준비된 방에서 실제 상황인 것처럼 시험을 보는 것이다.
첫 번째는 OSCE(Objective structured clinical: 객관구조화진료시험)였다. 수험생이 여러 개의 5분 단위 스테이션을 돌면서 각 스테이션에서 요구하는 수기들을 수행하는 시험이다.
기본적인 면접이나 검사 실행 전 절차, 주사 관련 항목 등 공통 체크 리스트는 모든 수험생들이 무난하게 통과했다. 하루 이틀 준비한 시험이 아니기에 웬만한 장애물은 그들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되는 항목들이 있었다.
바로 5분으론 시간이 모자랄 수 있는 항목들.
도뇨관 삽입, 채혈, 농양 절개 배농술, 봉합술, 뼈관절 부목 고정, 척추 천자, 심전도 검사 정도.
그러나 도수에게는, 이 항목들이야말로 누워서 떡 먹기였다.
봉합술?
뼈관절 부목 고정?
전쟁터에서 말도 못 하게 해봤던 일들이다.
도뇨관 삽입?
쉽게 말해 소변줄을 다는 일인데, 중환자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했다.
채혈 정돈 투시력이 있으니 네비게이션을 보면서 운전을 하거나 답안지를 옆에 둔 채 문제를 푸는 수준이고.
그렇게 32항목으로 구성된 OSCE가 끝나자 평가자들이 몇몇이 모여 앉았다. 그들은 미리 정해진 체크리스트에 따라 객관적인 채점을 마친 상태였다.
“이도수… 보셨습니까?”
“유명인사를 보니 신기하더라구요. 연예인이라도 본 것처럼.”
몇몇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실제로도 그렇게 잘생겼던데.”
“얼굴이 공개됐으면 더 유명해졌을 텐데요. 외모지상주의잖아요?”
“지금도 여기저기 섭외 빗발치고 있을 텐데 얼굴까지 공개하면 그야말로 떼돈 벌겠죠? 왜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을 택하는지…….”
“어린 패기 아니겠습니까.”
“패기는 무슨.”
도수에 대해 떠들던 평가자들은 잠시 말이 없더니, 다른 각도에서 다시 접근했다.
“…패기가 있을 만하던데요.”
“후… 인정할 건 인정해야죠. 미국 기자가 터트린 그 영상이 진짜였어요. 보고도 너무 비현실적이고 믿기 힘들어서 혹시나 조작은 아닐까, 뭔가 착오가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일말의 의심이 남아 있었는데.
“그 정도 실력을 보유한 써전한테 OSCE가 웬말입니까. 눈에나 차겠어요?”
“이건 그냥 나온 말인데… 왼손으로 봤어도 다른 수험생들은 찍어 누르지 않았을까요?”
몇몇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충분히 가능성 있습니다.”
“봉합 땐 정말이지…….”
봉합 스테이지를 담당했던 평가자가 혀를 내둘렀다.
“조금 과장해서 손이 보이지도 않았어요. 5분을 줬는데 시작하자마자 끝!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솔직히… 저보다도 훨씬 빨라요.”
맞은편에 있던 평가자가 쿡쿡댔다.
“당신보다만 빠를까요. 웬만한 써전들은 다 씹어 먹겠던데. 채혈은 진짜 ‘어?’ 하는 사이에 혈관 찾아서 찌르고 피를 뽑더군요. 무슨 동물 피 뽑는 것처럼.”
대개 혈관이 좁은 환자를 대상으로 채혈하는 것을 시험한다.
그런데 도수는 단 한 차례의 망설임도 없이, 미처 제대로 파악할 틈도 없이 푹 찔러서 쭉 뽑았다. 그런데 놀랍도록 정확했다. 마치 몸속을 보고 찌르기라도 한 듯이.
완벽한 기술.
심지어 빨랐다.
모든 평가자의 대화를 정리해 보기만 해도 그 두 가지는 명확했다.
그러자 그때까지 턱을 괴고 내내 말이 없던 평가자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점수들은 어떻게 주셨습니까?”
“크흠!”
다들 기침을 뱉으며 대답을 외면했다.
특정 수험생의 점수를 말하는 건 금기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모든 평가자들에게 적용되는 규칙이었지만, 대놓고 물어본 평가자에게는 아니었다. 그는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괜한 걸 물었습니다. 보나마나…….”
말끝을 흐린 그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하지만 실기에서 얼마나 높은 점수를 득점하든 이도수는 의사가 될 수 없어요. 녀석이 라크리마에서 온 지 이제 보름입니다. 수술 실력과 달리 이론은 형편없다던데, 보름 만에 국시공부를 끝낼 수 있었겠습니까?”
“하긴…….”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렸고.
애초부터 도수의 탈락을 예견하고 있는 평가자가 말했다.
“뭐, 일단 완전히 끝날 적에 다시 얘기하시죠.”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평가자.
그는 결코 알 수 없었다. 이 특별한 시험판에서, 앞으로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
실기시험 두 번째 순서는 CPX.
CPX는 술기를 시험하는 OSCE와 달리 환자와의 의사소통, 환자를 대하는 예절, 의학적 개념을 환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줄 수 있는지 등 의료인으로서의 능력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시험이었다.
CPX에선 평가도 환자인 척 연기하는 모의 환자들이 직접 한다.
주어진 시간은 10분.
도수 역시 이 같은 모의 환자 겸 평가자와 마주 앉았다.
“저는 닥터 이도수입니다. 무슨 일로 병원에 오셨죠?”
소개부터 범상치 않다.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고 간결하다.
환자 역할의 평가자가 대답했다.
“열이 나서요.”
“언제부터 열이 나셨죠?”
“3달 전부터…….”
고개를 끄덕인 도수가 이어 물었다.
“그 외에 다른 증상은 없었나요?”
“밤중에 오한이 들고 계속 기침을 해요.”
이런 식이다. CPX는 실제 진료와 다르게 의사가 질문하지 않는 사항에 대해서 환자가 대답해 주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도수는 색다른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실제 환자면 투시력으로 몸속을 살피면 그만인데, 모의 환자이니 투시력이 무의미한 셈이다. 순수하게 공부한 것들로 시험을 치러야 하는 상황.
‘결핵?’
도수는 하나하나 체크해 보기로 했다.
“몸무게는요?”
“아! 근래 팔 킬로 정도 줄었어요.”
“기침할 때 혹시 피가 섞여 나왔나요?”
“아뇨. 피가 섞여 나온 적은 없어요.”
결핵이 아니다?
도수가 다시 물었다.
“그 외 증상은요?”
“음… 피부에 발진이 생겼다 없어졌다 해요.”
그렇게 대답한 평가자는 내심 미소 짓고 있었다.
‘제법이긴 하다만 과연 맞출 수 있을까.’
제한 시간이 걸려 있음에도 섣부르게 병명을 진단하지 않고 침착하게 문진을 이어가는 건 좋은 자세다. 하지만 그가 설명하고 있는 증상. 이는 대부분의 수험생들을 혼란에 빠트리는 고난도 테스트였다.
아니나 다를까 도수가 중얼거렸다.
“발진…….”
다시 원점.
정확한 진단명을 알 수 없게 됐다.
그러나 도수는 더 침착하게 머리를 굴렸다. 진단을 위해 필요한 질문을 생각해 내고 정리해서 입 밖으로 내는 데 1초도 걸리지 않았다.
“혹시 예전에 진단받거나 치료받은 질환이 있으세요?”
“몇 달 전에 입안에 하얀 반점 같은 게 생겨서 동네 병원에서 약을 먹었더니 괜찮아졌어요. 무슨 약인지는 모르겠는데 감염이란 말을 들었어요.”
힌트는 모두 던져졌다.
이제 평가자가 할 일은 기다리는 것뿐.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이 정도 정보만으로 그가 의도하는 정답을 말하는 수험생은 손에 꼽았으니까.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도수의 눈이 반짝였다.
‘입안의 반점?’
칸디다 감염을 의미한다.
면역 기능이 저하된 환자에게서 주로 생기는 증상. 라크리마에서 수도 없이 보아왔던 증상이다.
이러한 감염 증세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결핵일 수도 있고, 결절성 홍반일 수도, 림프종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세 가지 질환 모두 뭔가 부족하단 느낌을 받았다.
‘아니야.’
도수는 선입견을 버렸다.
진단에는 작은 오차도 없어야 한다.
뭐가 이 환자의 증상과 가장 가깝게 일치하는 병일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도수의 머릿속에 한 줄기 결론이 번뜩였다.
‘설마?’
그는 환자에게 물었다.
“혹시 수혈을 받은 적이나, 낯선 사람과 성관계를 가진 적이 있으신가요?”
평가자는 도수의 얼굴을 유심히 뜯어봤다. 대부분 수험생들이 스스로 의료인이란 자각을 못하고 예민한 부분에서의 질문을 꺼리거나 돌려 묻는다. 그러나 도수는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그 모습이 평가자의 호기심을 더 자극했다.
그래서, 평가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뭘 그런 걸… 제가 그런 사람 같아 보이세요?”
이런 환자도 있기 마련이니까.
어떻게 대처하나 보는데, 도수는 굉장히 이성적인 태도로 대답했다.
“지금 에이즈(Acquired Immune Deficiency Syndrome: 후천성 면역 결핍증)로 의심되는 증상을 가지고 계십니다.”
“……!”
‘에이즈’란 한마디에 실제 환자여도 놀랐겠지만.
평가자는 다른 의미로 놀라서 표정이 변했다.
‘문진만으로 에이즈를 알아낸 것도 놀라운데… 자기 진단에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건 중요한 덕목이었다.
의사란 사람이 환자에게조차 믿음을 못 주면 안 되는 법이니까.
하지만 에이즈 같은 질환은 환자 입장에서 대부분 ‘불치병’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를 알리는 것에 있어서 대부분의 수험생이 곤혹스러워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도수는 문진만으로 짚어내기 어려운 ‘에이즈’라는 질환을 정확히 파악한 것도 모자라 진짜 의사답게 상황을 이끌어가고 있었다. 도무지 수험생이라곤 생각 들지 않을 만큼 모든 대처가 자연스러운 것이다.
“지금 에이즈라고 하셨습니까?”
평가자는 언성을 높였다. 일부러 더 흥분하며 도수를 압박하려는 속셈이었다.
“한두 해 전에 모르는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에이즈가 걸려요? 정확한 겁니까? 아니, 잘못 알았을 가능성은 없냐고요. 의사 선생, 뭔가 착오가 있었다고 말씀 좀 해주세요. 예?”
냉철하게 환자의 상태를 인지시켰던 도수는 의젓하게 그를 달래주었다.
“에이즈라고 해서 무조건 해결책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에이즈는 무조건 죽는 병 아닙니까.”
“아닙니다. 최근에 HIV바이러스를 강력하게 억제할 수 있는 치료제가 개발됐습니다. 치료만 잘 받으시면 면역력을 유지할 수 있어요. 즉, 에이즈에 걸리셨더라도 치료를 잘 받으면 면역력을 유지하며 어느 정도 정상인과 같은 생활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제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전문가적인 태도로 환자를 대하여 안심을 유도한다.
의대를 나온 이들이라면 대부분이 배운 것들이지만 도수는 달랐다. 마치 수없이 해본 일 같았던 것이다. 인턴, 레지던트도 아니고 최소 전문의처럼 보인다.
‘역시 다른 건가?’
평가자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몇 년을 전쟁터에서 떠돌며 환자를 봤다고 했던가? 그 경험이 실제로 말 한 마디, 표정 하나, 행동 하나에서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었다.
도수는 불쑥 평가자의 손을 잡았다.
“……!”
“의사인 제가 전혀 거리낌이 없죠?”
“아… 네.”
당황한 평가자.
도수는 자기 페이스대로 그를 이끌었다.
“보시다시피 에이즈는 쉽게 전염되는 병이 아닙니다. 전염 경로는 오로지 정액과 혈액뿐입니다. 대부분은 직접적인 성관계 시에 감염이 되지만 상처를 통해 혈액으로 감염이 될 수 있으니 주의하시는 게 좋습니다. 에이즈는 절대 죽을병이 아니니 포기하지 마시고, 의지를 갖고 떳떳하게 치료에 집중하세요.”
손을 잡고 있는 도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평가자 역시 실제 에이즈 환자가 아님에도 울컥하는 느낌이 올라왔다.
“알겠습니다.”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땡!’ 하고 종이 한 번 울렸다.
10분 중 5분이 지나간 것이다.
고작 5분밖에 안 됐음에도 도수는 문진만으로 정확한 병명을 진단하고 완벽하게 환자를 케어한 셈이다.
‘아직 5분밖에 안 됐다니.’
평가자는 진심으로 놀랐다.
이렇게 애매한 병명을 문진할 경우 대부분의 수험생이 정답을 놓치기 마련이다. 아주 뛰어난 학생들은 에이즈란 걸 알아내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10분이 간당간당할 정도로 시간이 걸린다. 정답을 맞히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의사에게 가장 중요한 ‘환자를 대하는 일’에 소홀한 수험생도 많다. 그 모든 게 감점이고 탈락 사유가 된다.
하지만 도수는 완벽했다.
“수고했어요.”
그렇게 말한 평가자가 평가지 리스트에 체크를 했다.
‘정말이지… 실기로는 흠잡을 데가 없군.’
이 정도면 트집조차 잡을 수 없다.
정작 도수는 손을 소독한 후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곤 스테이지를 나섰다.
문을 닫고 나온 순간.
고개를 든 그의 눈앞에 뜻밖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도수다.”
“이도수 맞아?”
“TV에서 아직 얼굴공개 안 했잖아.”
“아니야, 내가 아까 봤어.”
수군대는 몇몇 수험생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중 여자애가 다가와서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이도수 맞지?”
“네.”
도수는 존대를 했다.
상대가 열아홉 살인 그보다 어릴 리는 없었기 때문.
그러자 여학생의 친구들까지 우르르 몰리며 한 마디씩 했다.
“우리 네 팬이야!”
“시험 어떻게 봤어?”
“뭘 그런 걸 물어. 실전이랑은 전혀 다를 텐데.”
“하긴… 그래도 좋은 경험이 됐을 거야.”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도수는 기가 찼지만 별 내색하지 않고 종이와 펜을 받아서 ‘이도수’ 세 글자를 정자로 써서 돌려줬다.
“으엑.”
악필이다.
그것도 심한.
한국말에 익숙한 도수였지만 안 쓴 진 오래됐기에 글자체까지 다듬을 여력이 없었다.
“흠흠! 어, 어쨌든 고마워. 이번 시험 잘 보길 바라.”
“그쪽도 잘 보셨길.”
그 말을 남긴 도수는 쌩하니 그들을 지나쳐 멀어졌다.
뒷모습을 보던 수험생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애가 라크리마에서 와서 그런지 분위기가 쎄하네.”
“가서 한마디 해보든가.”
“그러다 죽을 수도 있어.”
“아무튼, 저래선 CPX에선 망했겠네. 환자들 문진하면서도 저런 태도로 했을 거 아니야.”
“맞아. 저건 그냥 원래 성격이 저런 거야.”
빗발치는 추측들.
하지만 정작 도수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고, 1달 뒤 있을 필기시험 예상 문제들을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돌려보고 있었다. 그에게 이번 ‘실기’는 투시력의 도움 없이도 문진을 통해 환자의 병명을 충분히 알아낼 수 있다는 희열과 충족감을 얻은 것.
그 이상 이하의 의미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