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대한의사협회는 ‘이도수 특별법’을 제정할 것을 정부에 요구했다.
라크리마에서 확보한 매디 보웬의 자료, 그리고 미국의사협회의 동향이 근거로 제출됐다.
그 결과 도수의 수술 성공률이나 실력은 객관적인 근거에서 인정되는 부분이나 의사로서 지녀야 할 사명이나 지식, 체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바. ‘예외적으로 국시를 350점 이상으로 통과할 경우 의사 자격을 부여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물론 정부의 이러한 결정에는 지지와 반발이 뒤따랐다. 몇몇 전문의들을 필두로 레지던트, 인턴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법안을 지지하는 상대는 국내 의학계를 이끌어가는 천하대병원 과장급 인사들과 여론.
특별법이 재정됐고, 곧 그 내용이 전파를 타고 전 세계에 퍼져 나갔다.
***
“씨알도 안 먹히는구만?”
아로대학병원 휴게실.
인턴 동기 다섯 명이 모이자 그중 한 명이 TV를 보다 뱉은 말이다.
그들 다섯 명 모두 ‘이도수 특별법’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렇게 치면 어렸을 때부터 수술 영상이나 보고 수술 연습이나 하지, 미쳤다고 10년씩 공부해서 의대를 가? 누가 코피 터지게 공부해서 의대를 졸업하겠느냐고.”
“아무리 특별 케이스라고 해도 좀 너무하긴 한다. 편입도 아니고 국시라니.”
“헌재야 여론 눈치 보는 거지, 뭐. 그러다 완전 영웅 된 애를 미국한테 빼앗기면 보수적인 한국이다, 답답해 죽겠다 난리가 날 테니까.”
“천하대학병원 과장들이 한뜻으로 손을 썼으니 학계 눈치도 볼 거야. 천하대병원에선 걜 홍보용으로 써야 되니까. 어차피 윗대가리들은 다 한통속이잖아.”
“에이, 씨발. 더러운 세상.”
“김광석 교수님도 심란하시겠다. 안 그래도 바쁘신데 언론에 시달리시느라…….”
“뭐, 그래도 그 덕에 외상센터장 되셨잖아. 허울 좋은 감투긴 하지만 이도수 덕분에 스타 되신 건 사실이지.”
‘이도수’에서 ‘김광석’까지 말이 돌 무렵, 머리를 뒤로 묶은 포니테일의 미녀 의사 한 명이 빈자리에 턱 앉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인턴 선생들, 뒷얘기하느라 정신없네. 한가한가 봐?”
인턴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레지던트 1년 차 강미소 선생이다.
인턴들 사이에서 별명은 ‘살인 미소’. 환자를 죽여서는 아니고, 웃으면서 인턴들을 죽기 직전까지 굴린다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활짝 웃는 강미소. 그녀가 새로운 인턴들을 죽어라 굴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나도 교수 딸이라고 뒷담 까던 애들이 누군들 안 깔까. 남 까는 건 좋은데 실력 좀 쌓고 까자. 천태백 선생. AGE(Acute gastroenteritis: 장염) 환자 진단은 어떻게 하지?”
“루틴 랩 내고 심플 업도맨(Simple abdomen: 단순 복부 촬영) 찍고…….”
“수액은 뭘로?”
“…….”
강미소의 눈길이 옮겨갔다.
“한지혜 선생?”
“오, 오프로디더블유(5%DW) 줍니다.”
“그런데 환자가 복통을 호소하면?”
“진정제를…….”
“뭐로?”
“…….”
한지혜가 동기들 눈치를 봤다. 하지만 누구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강미소가 버젓이 두 눈 뜨고 살피고 있었으니까.
“공부 좀 하자. 간단한 장염 환자 오더도 못 내는 게 말이 돼?”
“죄송합니다.”
“됐고. 가봐.”
고개를 꾸벅 숙인 인턴들이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강미소는 커피가 든 종이컵을 입으로 가져가며 중얼거렸다.
“이도수라…….”
그녀는 협회 소속인 아버지를 통해 도수의 수술 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레지던트는 꿈도 못 꾸는 실력이다.
아니, 전문의라 해도 그런 큰 수술을 그렇게 정교하고 빠르게 소화할 수 있는 의사는 손에 꼽을 터였다.
그러한 도수가 지금 아로대학병원에 와있다니.
강미소는 우연이라도 도수의 실력을 직접 한번 보고 싶었다.
***
그 시각, TV를 끈 김광석이 곁에 앉아 있는 도수에게 말했다.
“허허. 정말 네 의도대로 됐구나. 그나저나…….”
아로대학병원, 자신의 연구실을 휘휘 둘러본 그가 물었다.
“왜 여기 있는 거냐?”
도수는 ‘여자들만 있는 집에 남자아이를 들이기 부담스럽다’는 임숙영의 주장이 무의미하게 매일 아침 일찍 집을 나와 아로대학병원으로 출근(?)을 했다. 그리고 저녁 늦게 들어가서 김해리의 공부를 봐주었다.
이렇게 되자 오히려 불편한 건 김광석이었다. 대담하고 종잡을 수 없는 도수의 성격을 잘 아는 그는 도수가 병원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1분 1초가 가시방석이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의사로서 지녀야 할 사명이나 지식, 체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판결이 났잖아요. 그걸 채워야 국시에 통과할 수 있을 거고요.”
“그래서?”
“그걸 채우기엔 병원이 제격이죠.”
“모든 건 교과 과정이란 게 있다. 네가 선행해야 할 일은 책을 보는 거야.”
순간 도수가 씨익 웃었다. 그리곤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리며 말한다.
“이미 책 내용은 다 들어 있어요.”
“뭐……?”
책을 본 지 불과 며칠밖에 되지 않았다. 이렇게 빨리, 그것도 독학으로 책 내용을 모두 습득할 수 있다면 의대가 왜 필요하고 누가 몇 년씩 의대에 썩어가며 밤낮없이 공부에 매진할까.
하지만 도수는 그 상식을 전면 부정했다.
“지금은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단단하게 다지는 작업을 할 차례예요.”
“정말 다 머릿속에 넣었다고?”
“네.”
“몇 개만 물어보자.”
김광석은 그 즉시 도수가 취약한 부분에 관한 질문들을 던졌다.
“AMI(Acute myocardial infarction).”
“급성심근경색.”
“pul. Tb(Pulmonary hypertension)?”
“폐고혈압.”
“LC(Liver cirrhosis)?”
“간경변증.”
“UTI(Urinary tract infection).”
“요로 감염.”
일단 전문용어.
분명 라크리마에선 몰랐던 부분이다.
그러나 도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술술 답했다. 각 분야별로 다양한 질문을 던졌음에도.
“암기력 하나는 인정해야겠군.”
중얼거린 김광석은 틈을 주지 않고 질문을 이어갔다.
“감염이 없는 혼수상태의 환자에게 해야 할 일반적인 수액 처방은?”
이번에도.
도수는 망설이지 않았다.
“하트만 용액 플러스오퍼센(+5%) 덱스트로스 용액 하루 킬로그램당 십미리(10㎖)씩 줍니다.”
“네가 겪었던 패혈증의 경우 어떤 검사를 하지?”
“혈액검사를 합니다.”
“특징은?”
“젖산 수치가 오르고 혈소판 수치가 감소하죠. 혈압이 떨어지고 심박수가 올라가고 체온이 비정상적이고 호흡부전이 생깁니다. 이런 증상이 한꺼번에 다 나타나는 게 가장 큰 특징이에요.”
“심해지면?”
“의식을 잃고 중증패혈증으로 악화될 경우 장기들이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치료는?”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해 주면서 필요한 처치들을 바로바로 해주는 게 중요하고 수액 치료로 혈압을 유지해 줍니다. 주로 승압제 약물을 투여합니다. 승압제 약물의 종류에는……”
“그만.”
그야말로 툭 찌르면 좌좌좍 나온다.
어떤 질문에도 막힘이 없는 것이다.
수술에 관한 부분이 아님에도 안다는 건 책에 있는 내용을 빠삭하게 익혔다는 뜻이다.
하지만 김광석은 머리로 아는 것과 달리,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학습한 거냐?”
“용어들만 외우면 별로 어렵지 않았어요. 용어들 사이에 공통되는 부분도 많았고요.”
“증상과 처방은?”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도수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굳이 배우지 않아도 운동화 끈이 풀리면 묶는 걸 아는 것처럼 수술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했다고. 이것도 마찬가지였어요. 약물의 효능들을 공부하고 제 경험들에 비춰 생각해 보니 어떤 환자에게 어떤 처방을 내려야겠다는 게 바로 떠오르더라고요. 확인해 보니 다 일치했고요.”
“…….”
김광석은 할 말을 잃었다.
이게 일반적인 상황인가?
절대 아니다.
그래서 그는 일반적이지 않은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국시는 언제 볼 생각이냐?”
“내일이요.”
역시 비상식적인 대답.
누가 들었다면 미쳤다고 할 것이다.
아무리 도수가 수술의 천재라지만 이전까지 국시에 필요한 지식적인 부분들에선 문외한이다시피 했다. 그런데 보름도 안 되는 시간 만에 그 모든 걸 터득했다고?
물론 김광석은 믿었다.
“그래. 그리 전해두마.”
대리인 역할을 해줄 사람이 김광석뿐이었다.
누구 하나 의도한 건 아니지만 말하자면 도수의 보호자인 셈이다.
도수도 이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감사해요.”
“은혜는 꼭 갚고.”
김광석의 농담을 도수가 받아쳤다.
“백골난망(白骨難忘)입니다.”
“얼씨구? 사자성어까지?”
“당연한 건데요 뭐. 한자가 좀 많아야죠.”
의학 용어는 한자, 영어, 한국어별로 모두 암기해야 한다.
피식 웃은 김광석이 말했다.
“또 한 번… 학계가 까무러치겠구나.”
지금도 도수의 천재성을 신비롭게 여기며 추종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의심을 갖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번 국시까지 치르고 나면 어느 쪽이든 몇 배로 불어날 터였다
정말 그럴 것이다.
***
늦은 밤.
도수가 누운 방안으로 그림자와 붉은 불빛이 들이닥쳤다. 마치 지옥에서 내뻗는 손길처럼 그림자는 손 모양을 그리며 슬금슬금 다가왔다.
하지만 도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쾅! 콰앙!
밖에선 폭음이 이어졌다.
도수는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제발 이 순간이 지나가길.
폭탄이 지붕 위로 떨어지지 않길 기도하며.
아니, 아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고통스럽긴 하겠지만 반군들이 총을 들고 들이닥치는 상황보단 나았다. 만약 그런 비극이 벌어진다면 죽음보다 못한 꼴을 당하게 될 테니까.
“으으…….”
끙끙 앓는 도수.
그때 누군가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으.”
신음뿐.
아무 대답이 없자 문을 두드린 이가 살짝 문을 열어 문틈 새로 얼굴을 내밀었다.
“오빠……?”
얼굴을 내민 이는 김해리였다.
도수의 상태를 본 그녀는 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뛰어들어 왔다.
“오빠!”
“…….”
도수의 상태는 일견 보기에 열이 한 40도쯤 올라서 끙끙 앓는, 그런 상태였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고 손톱이 면을 파고들 정도로 이불을 꽉 잡고 있다. 전신이 쉴 새 없이 떨렸다.
덜덜덜덜.
“오빠……!”
김해리의 손이 살짝 닿는 순간.
타악!
“아……!”
손목을 홱 낚아챈 도수가 그녀를 뒤집었다. 눈 깜짝할 새에 포지션이 바뀌어 누워 있던 도수가 김해리에게 올라탄 형국이 됐다.
“…….”
“…….”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김해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무서워.’
도수의 눈빛은 살기를 담고 있었다. 평범한 고등학생 친구들에게는 아무리 화가 나도 볼 수 없는 눈빛.
김해리는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할 정도로 몸이 굳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아까부터 심장이 쉴 새 없이 두방망이질 치고 있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길게 느껴지는 찰나.
도수의 입장은 전혀 달랐다. 그는 아직도 밤이면 늘 라크리마 내전 당시의 지옥으로 돌아가서 사투를 치렀다. 그래서 잠이 깨지 않은 상태로 습관이 나왔고, 서서히 깨는 중이었다.
“…미안.”
도수가 그녀의 위에서 내려왔다.
“무슨 일이야?”
“아…….”
잠시 말을 잃었던 김해리.
그녀는 한참을 벙 쩌 있다가 퍼뜩 용건을 생각해 냈다.
“어, 엄마가 밥 먹으래. 오빠 오늘 자격 시험 보는 날이잖아.”
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갈게.”
“…….”
멍하니 서서 도수를 바라보는 김해리.
도수가 티를 벗는 시늉을 하며 물었다.
“지금 옷 갈아입을까?”
“아, 미안!”
김해리는 황급히 방을 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도수는 피식 웃고는 티를 갈아입었다. 머리를 대충 손으로 흩뜨린 후, 방문을 열고 나갔다.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도 김광석은 없었다.
대신 임숙영이 웃으며 인사를 해주었다.
“그래. 오늘 시험 날이지?”
“네.”
도수는 식탁 앞에 앉아 수저를 들었다.
그런데 맞은편에 앉은 해리가 좀 이상하다.
평소답지 않게 깨작깨작거리며 도수를 흘깃거리는 것이다.
“왜?”
도수가 묻자 해리가 화들짝 놀랐다.
“아, 아니…….”
“많이 놀랐어?”
“그건 아니고오……”
그녀는 한숨을 푹 쉬더니 어머니 임숙영에게 말했다.
“엄마, 저 다 먹었어요오. 옷 갈아입고 학교 갈게요……”
어딘지 김빠진 목소리.
하지만 도수는 캐묻지 않고 밥을 욱여넣었다. 그에게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은 배불리 밥 먹는 시간이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