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저렉션-27화 (27/152)

# 27

천재 2

김해리는 도수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더니 생긋 웃으며 말했다.

“안녕… 하세요!”

도수는 고개만 까딱였다.

그러자 김해리가 손을 내밀었다.

“아빠한테 얘기 들었어요. 전 열일곱 살이고 김해리예요.”

도수는 그 손을 잡지 않고 대답했다.

“이도수. 열아홉 살.”

한국 나이로.

뒷말은 생략했다.

김해리는 민망한지 손을 뺐다. 그리고는 김광석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빠. 들어오세요.”

먼저 들어가는 그녀.

김광석은 도수의 등을 떠밀며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밖에서 보던 것과 달리 깔끔하게 정리가 잘되어 있었다.

밥 짓는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꼬르르르륵.

도수의 배 속에서 비명이 들린다. 배고프다고, 밥 달라고. 하긴, 천하대병원을 나서고 한 끼도 먹지 못했으니 당연한 생리현상이었다.

김광석은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 아내에게 말했다.

“나 왔어.”

몸을 돌린 아내, 임숙영이 대답했다.

“잘 왔어요.”

그러더니 도수를 보았다.

“이 아이예요?”

김광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당분간만 부탁할게.”

“…그 문제 말인데, 잠깐 얘기 좀 해요.”

그녀는 앞치마를 벗으며 안방을 눈짓했다.

고개를 끄덕인 김광석이 함께 들어갔다. 오랜만에 만난 부부의 해후라고 치기에는 시시하고 건조했다.

뒤에 남은 김해리가 눈을 반짝이며 도수를 관찰하고 있었다.

“진짜 전쟁터에서 살았어요?”

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김해리가 다시 물었다.

“거긴 어때요?”

“나중에.”

무뚝뚝하게 대답한 도수는 식탁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맞은편 액자를 보았다.

김해리가 말했다.

“사이 좋아 보이죠? 지금과 다르게.”

도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액자 속에는 김광석과 임숙영의 젊은 시절이 들어 있었다. 그 옆의 액자에는 더 어릴 때의 김해리도 있다.

‘가족.’

도수는 가슴속이 울렁거렸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거나 이성까지 반응하진 않지만 아직 속에 남은 가족에 대한 감정이 제멋대로 기분을 이상하게 만든다.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가족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의지가 되는 거야.”

그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건조함이 절절한 미사여구보다 더 와닿았다.

김해리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오. 빠.”

“오빠?”

“저보다 나이 많으면 오빠죠.”

씨익 웃는 김해리.

도수는 ‘오빠’란 단어가 낯설었다. 라크리마에선 서로를 그렇게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많든 적든 이름을 불렀다.

그때 해리가 덧붙였다.

“근데 오빠.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생겼어요.”

도수의 얼굴이 붉어졌다.

***

임숙영은 조금 열어둔 안방 문틈으로 계속 도수를 흘깃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김광석이 말했다.

“괜찮아. 나쁜 녀석 아니니까.”

“그래도 해리랑 둘이 남겨두기 불안해요.”

“학교는 불안해서 어떻게 보내?”

“그게 같아요? 전쟁터에서 자란 아이라면서요. 매일 사람이 죽어 나가는 그런 곳에서 지냈는데 어떤 생각을 할지 어떻게 알아요?”

“나도 그곳에서 왔어. 사람 사는 곳이고 도수도 이곳 아이들과 같아. 데려오라고 했으면서 왜 갑자기 이러는 거지?”

“밥이나 먹이려고 했죠.”

한숨을 내쉰 임숙영이 말을 이었다.

“당신이야 다시 병원에 가면 그만이지만 여자 둘만 있는 집 안에 어떻게 남자애를 들일 생각을 해요? 해리도 이제 다 컸어요.”

“도수는 아직 어려.”

“어려도 남자예요. 묵을 곳이 없는 것도 아니고 왜 하필 우리 집이에요?”

“말했잖아. 세간의 관심이 뜨겁다고. 아직 이곳 환경에 적응도 못 한 애야. 잠시 피할 곳이 필요하다고.”

“하.”

헛바람을 뱉은 임숙영이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나 그렇게 신경 써보지…….”

“그 얘기라면 내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미안하다.”

“할 말이 있으면 안 되죠. 아니, 할 말이 없어도 안 되고. 나야 모르고 결혼한 것도 아니니 그렇다 치고, 해리한테는 충분한 설명을 해줬어야 했어요.”

“밝아 보이는데…….”

“그런 척하는 거죠. 성숙한 애니까.”

김광석은 그림자 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아무튼, 다 큰 남자애를 들이는 건 안 돼요. 그렇게 알아요.”

통보한 임숙영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방을 나가 버렸다. 아무 일 없는 듯 음식을 차리는 그녀.

방 문턱 너머 세 사람의 모습을 바라본 김광석은 깊은 한숨을 뱉었다. 방 안과 밖. 그의 처지가 이처럼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

한편, 도수는 식탁에 펴진 참고서를 발견했다. 김광석을 마중 나오기 전 해리가 풀던 문제집이다. 그녀는 고등학교 일 학년이었지만 참고서는 삼 학년 것이었다.

“…….”

해리가 옆에 와서 기웃거렸다.

“어렵죠? 제가 알려줄까요?”

도수는 대답 없이 참고서 옆에 놓인 펜을 들고 참고서를 풀기 시작했다. 한 문제를 풀고 다음 문제로 넘어가는 데 30초도 걸리지 않는다. 해리가 정답을 확인할 새도 없이 거침없이 풀어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해리는 눈을 치떴다.

“어떻게…….”

스륵.

다음 장으로 넘긴 도수가 문제를 풀었다.

해리는 입을 딱 벌렸다.

“말도 안 돼.”

저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차라리 영어과목 문제집이었다면 이해나 했을 것이다. 외국에서 오래 살다 왔다고 했으니. 그런데 지금 도수가 풀고 있는 건 일상생활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수학 문제들이었다. 다 틀릴 걸 각오하고 막 찍는다고 해도 이렇듯 단숨에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잠깐만……!”

낱장이 넘어가려는 걸 손으로 붙잡은 해리가 물었다.

“정답 확인부터 해도 돼요?”

“다 맞았어.”

간결한 도수의 대답.

해리가 되물었다.

“확실해요?”

“…….”

도수는 낱장을 놓고 펜을 내려놨다.

“내가 가르쳐 줘야 할 것 같은데.”

그는 문제집 옆, 해리의 오답 노트를 눈짓했다. 그 시선을 좇다가 화들짝 놀란 해리가 황급히 노트를 감췄다.

“으익! 다 봤어요?”

“뭘?”

“몇 점인지…….”

“그건 모르겠고 비가 내리던데. 아주 장마가…….”

“그만!”

입술에 검지를 붙인 해리가 찡그린 표정으로 변명했다.

“그래도 전 제 나이보다 훨씬 어려운 문제들을 푸는 거거든요?”

“그럴 리가.”

“진짜로요!”

“그래?”

도수가 미심쩍게 중얼거렸다.

“난 열 살 때 풀었던 건데…….”

“넷!? 열 살???”

해리는 자기 귀로 듣고도 잘못 들었나 의심했다.

“고 삼 수학을 열 살 때 뗐다고요? 오빠 천재예요? 무슨 영재 그런 거?”

그랬었나?

잘 기억나진 않지만 공식적인 영재는 아니었다.

“습득력이 빠른 편이긴 해.”

“그 정도로 되는 게 아니라구요… 습득력은 저도 빠르거든요.”

“못 믿겠지만.”

“좀 믿어요. 레알, 진짜니까.”

“그래.”

“전혀 못 믿는 표정인데.”

“강요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흥. 어디, 얼마나 잘 풀었나 한번 보자구요……!”

두고 보자는 듯 채점을 하는 해리. 그러나 문제가 넘어갈 때마다 그녀의 표정은 묘하게 바뀌었다.

“…진짜네.”

“…….”

“진짜 만점이라구요.”

“알고 있어.”

“진짜 만점이라니까요?”

도수는 피식 웃었다.

“이게 그렇게 신기해할 만한 일인가?”

“네.”

고개를 크게 끄덕인 해리가 말했다.

“만약 학교 쌤들이 봤으면 기절초풍하셨을 거예요.”

그때였다.

임숙영이 반찬을 날라서 식탁의 빈자리를 채우며 물었다.

“둘이 무슨 얘길 그렇게 재밌게 해요?”

“엄마!”

“응?”

임숙영이 묻자, 해리가 외계인을 본 표정으로 도수를 눈짓하며 말했다.

“이 오빠 엄청 어려운 수학 문제를 다 맞췄어요.”

“어떻게?”

임숙영이 도수를 보고 물었다.

“타지에서 공부도 했었어요?”

도수는 고개를 저었다.

“열 살 때 풀었던 게 기억나서요.”

“고 삼 걸 열 살 때 풀었다고요?”

임숙영은 해리가 보였던 반응을 녹화해서 다시 틀어놓은 것처럼 똑같이 반응했다.

다시 설명해야 하나, 도수가 막 난감해지려는 찰나.

방에서 나온 김광석이 함께 반찬을 나르며 말했다.

“다들 못 다한 얘긴 밥 먹으면서 하자고. 그리고 여보.”

좋은 생각이 났는지 눈을 반짝인 그가 임숙영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내가 경황이 없어서 말을 못했는데 도수는 천재야. 우리 딸 학업에 도움을 줄 수 있단 말이지.”

“아무리 그래도…….”

“해리 학원도 안 다니잖아? 과외도 안 하고. 독학보단 배울 사람이 있는 게 낫지 않겠어?”

그러나 그 한마디는.

김광석이 둔 최악의 악수(惡手)였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것이다.

“맨날 환자들 병원비나 내주고, 우리 딸이 누구 때문에 아등바등 독학하는데!”

“아뿔싸.”

“아뿔싸는 무슨 아뿔싸예요? 얼른 반찬이나 날라요!”

김광석은 어두운 표정으로 오래된 가스레인지에 올라간 찌개를 푸러 갔다.

그때 두 사람을 올려다보고 있던 해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저도 도울게요. 그리구요…….”

임숙영이 쳐다보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도수 오빠 받아주세요오, 엄마.”

“…….”

“제 촉인데 좋은 오빠 같아요.”

한쪽 눈을 앙증맞게 감으며 조르는 해리.

임숙영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번 생각해 보자.”

그리곤 도수에게 고개를 돌린다.

“너무 불편하게 생각하진 말아요. 우리도 식구가 한 명 더 느는 문제니까 신중할 수밖에 없어. 아무래도 애 아빠 나가고 나면 여자만 둘인데 서로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구요.”

“괜찮습니다.”

미미한 미소를 입에 문 도수가 덧붙였다.

“배 채워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누가 될 순 없죠.”

“어쩌려고?”

김광석이 묻자.

도수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난민 생활만 7년을 했는데 설마 제 몸 하나 건사 못 하려구요. 이렇게까지 해주시길 바라고 드린 부탁이 아닌데 괜히 난처하게 해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우와… 말 잘하네요?”

해리는 색다른 모습에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도수가 이렇게 예의 바르게 말을 잘하는지 몰랐던 것이다. 그건 도수와 오래 함께 있었던 김광석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게 말이다. 나도 처음 알았다. 이렇게 예의 바른 녀석인지…….”

도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역시 적응의 동물이니 라크리마에서의 모습과 달라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뭐 어쨌든, 제 걱정은 마세요.”

그들은 오래도록 식사를 했다. 김광석은 라크리마에서의 이야기를 굳이 입에 담으려 하지 않았다. 그 일로 임숙영과의 불화가 절정에 치달았기에 그들 모두 그 일과 관련된 내용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 덕에 도수 역시 지옥 같았던 과거를 떠올리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수저를 내려놓은 도수가 말했다.

“식사 맛있게 했습니다.”

그리곤 드르륵, 의자를 밀며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인다.

“전 이만 가볼게요.”

“아…….”

해리는 안타까운 의미의 탄성을 흘리며 초조하게 임숙영 눈치만 봤다. 임숙영도 갈등하는 표정이었지만 아직 결정하진 못했는지 뭐라고 잡진 않았다.

그사이 김광석이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주며 말했다.

“아파트 단지 건너편에 호텔이 하나 있다. 일단 거기 가 있어. 내일 아침에 다시 얘기하자.”

도수는 카드를 받았다.

“은혜는 갚을게요.”

“그래.”

“감사했습니다.”

“혼자서 호텔까지 찾아갈 수 있겠어요?”

임숙영이 묻자 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유랑 생활만 7년을 했는데요.”

위풍당당하게 대답한 도수는 현관을 나섰다.

그렇게 세 시간 후.

도수는 덜덜 떨며 현관 앞에 돌아왔다.

“…….”

한국은 라크리마보다 훨씬 추웠다.

그리고 아파트단지는 어떤 미로보다 복잡했다.

혹한 속을 빙빙 돌다가 제자리에 온 것이다.

띵- 동!

도수가 벨을 누르자 머잖아 현관문이 열렸다.

“아니, 호텔로 안 가고 왜 여기…….”

김광석은 덜덜 떨고 있는 도수의 행색을 보고 대략적인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

“여긴 뭐죠? 반군 기지보다 더 복잡한 곳이에요.”

“…….”

고개를 저은 김광석이 문을 활짝 열며 말했다.

“일단 들어와라. 차라리 잘됐어. 안 그래도 가족회의 끝에 널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대한의사협회에 있는 내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네가 여기 있는 줄 알고 한 연락은 아니지만… 협회 임원진 대다수를 차지하는 천하대병원 과장들이 네가 국시에 응시할 수 있도록 특별 자격 부여 안건을 추진하고 있다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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